아레나, 이계사냥기 78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78화
일어나 보니 소파였다.
민정은 이 좁은 소파에서 용케 떨어지지 않고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잘도 자고 있었다.
왜 이러고 있지?
아아.
생각났다. 간밤에 85인치 TV의 대화면을 느껴보고자 노트북에 연결해 영화를 실컷 보다 잠들었다.
킹사이즈 침대를 놔두고 여기서 새집의 첫날밤을 보내다니, 나 원.
난 민정을 번쩍 들어 침실로 옮겼다. 그러고 나오려니까 민정이 키득거리며 두 팔로 나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입을 맞추고 오른손을 그녀의 셔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건 싫었는지 슬며시 뿌리친다. 아직 졸린가 보다.
가볍게 키스를 해주고 스마트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처럼 드넓은 60평짜리 테라스를 빙 둘러보며 전화를 걸었다.
-시험은 잘 보셨소?
전화 건 상대는 오딘이었다.
“예, 무사히 클리어했습니다.”
-잘됐군. 나도 마찬가지요. 어려울 건 없었는데 어쩐지 폭풍전야 같더군.
“……?”
-바스티앙 자작가 기억하시오?
“물론이죠.”
-그들과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라더군. 그게 지난번 시험이었소.
“전쟁이요?”
-그렇소. 전에 김현호 씨를 돕고자 파견한 군대가 그들에게 당했잖소. 그냥 넘어갈 수 없지.
나는 뭔가 아레나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게 시험이었다면, 율법이 바스티앙 자작가를 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바스티앙 자작가를 치는 게 시험의 목적에 부합하기에 그런 시험이 나온 게 아니겠소.
“저는 모든 일이 갈색산맥의 엘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엘프들? 혹시 김현호 씨는 그쪽의 엘프들과 함께 있소?
“예.”
-놀랍군. 엘프와 접촉할 수 있는 인간은 시험자를 통틀어도 없을 텐데.
나는 갈색산맥을 둘러싼 정세를 간단히 설명했다.
갈색산맥의 동쪽에는 라이칸스로프 실버 씨족.
북쪽은 바스티앙 자작가.
남서쪽은 절벽을 징그럽게 기어오르고 있는 언데드들.
어쩐지 사방에서 엘프를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약에 바스티앙 자작가가 실버 씨족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면, 최근 어린 엘프를 납치하려 했던 인간들 또한 바스티앙 자작가 측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흐음…….
“혹시 흑마법사에 대해 아십니까?”
-흑마법은 전 대륙 국가가 금지한 마법의 일종이오. 본래는 불노불사를 연구하다가 변질된 학문이라더군.
“언데드들이 대량으로 엘프의 영역을 침공하고 있는데, 실버 씨족과 바스티앙 자작가와 흑마법사들을 함께 묶어서 생각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넓은 관점에서 보자는 거군. 확실히 그렇게 본다면 정세를 뒤에서 조종하는 어떤 세력이 엘프를 노린다고 봐도 되겠소.
“어쩌면 그들이 이 시험의 최종 목적이 아닐까요?”
-그건 속단할 수 없소.
“그렇겠죠.”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소. 결국 주어진 시험을 클리어하면 그만이니까.
오딘이 계속 말했다.
-나는 다음 시험에서 바스티앙 자작가를 섬멸할 것이오. 아마 그쪽은 언데드들이나 라이칸스로프들과 싸우게 되겠지.
“예, 아마도요.”
-그럼 셋 중 둘을 격파하여 합종을 깨부수게 되는 셈이오.
“그렇군요. 주어진 시험만 제대로 클리어하면 되는 거네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시험이 알아서 제시해 준다고 봐야지.
“네.”
그 점에서 난 생각이 다르다.
율법이 원하는 방향성을 미리 바라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라고 본다.
-아무튼 다음 시험도 건투를 빌겠소.
“예, 오딘 씨도요.”
-그리고…….
“말씀하세요.”
-박진성 회장이 완쾌됐더구려.
“예.”
-김현호 씨의 이번에 주어진 휴식시간이 어느 정도요?
“60일입니다. 이제 58일 남았죠.”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소?
“따님 말이죠?”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
박진성 회장 완쾌 얘길 먼저 꺼냈으니 뻔하지.
-딸아이를 연말까지만 당신과 함께 있게 하면 안 되겠소?
“그렇게 하시죠.”
-고맙소. 사례는 어떤 것을 원하시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돈은 별로다. 지금도 충분히 많다.
되도록 아레나에서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는 아레나에서 영주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말했다.
“아레나에서 엘프가 노예로 유통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놈들이 있지. 내로라하는 귀족가문 놈들이 꼭 그런 짓을 하오. 엘프처럼 사로잡기 힘든 귀한 노예가 자기들의 위세를 증명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오. 난 인권이라는 개념을 아는 현대 지구인이라 구역질이 나지만 말이오.
“엘프 노예를 최대한 많이 사셔서 저희 쪽에 돌려보내 주시는 건 힘드신가요?”
-엘프 노예들을?
“예,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오딘 씨의 가문이 갈색산맥의 엘프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죠.”
-그거 좋은 생각이군!
오딘은 크게 찬성했다.
-전쟁 준비가 한창이라 엘프 노예를 구매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갈색산맥의 엘프들과 우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소.
“그럼 대가는 그걸로 해주세요.”
-그게 대가가 되겠소? 그 얘긴 나에게도 이득인데.
“좋은 게 좋은 거죠. 그렇게 해서 엘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게 제 공로로 적용되는 거니까요.”
-알겠소. 그렇게 하지. 당신이 나와 엘프들 사이에 다리를 놔주시오.
“좋습니다.”
-딸아이가 도착하기 전에 연락하겠소.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침실로 돌아가니 민정이 옷을 벗고 나에게 손짓했다.
아까 거절당해서 내가 삐쳐서 나간 거라고 생각했나?
하얀 나신을 보니까 잡념이 싹 사라진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난 거절당해서 삐쳐 있던 척을 하기로 했다.
***
빈방 하나를 민정의 제안대로 손님방으로 꾸미기로 했다.
작은 침대와 화장대 등을 놓고서 누가 와도 며칠 머물다 가기에 충분한 환경을 만들어놓았다.
오딘 씨의 딸이 오면 여기서 재워야겠다.
생각난 김에 테라스도 꾸미기로 했다.
나는 훈련을 위하여 샌드백과 목인장을 구매해 테라스에 설치했다.
목인장은 영춘권이나 홍가권 등 중국 남파 무술에서 쓰이는 수련 도구의 일종이었다.
중국 무술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건데, 나무로 사람 팔·다리·몸통을 형상화한 그것이다.
연습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혹해서 질러 버렸다. 돈이 많으니까 지름신이 수시로 강림하신다.
그냥 혹해서 산 목인장인데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무술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이걸로 뭘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 몰랐으나, 유튜브의 무술가 동영상을 보며 조금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운동신경 중급 1레벨.
나는 금방 유튜브 영상의 동작들을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금방 요령을 터득하니 서서히 내 실전에 걸맞은 연습을 시작했다.
쌍권총을 양손에 쥐고서 목인장을 연습했다.
사람의 팔에 해당하는 ‘장수(樁手)’들 사이를 파고들며 권총을 몸통에 겨누는 연습이었다.
파파팟!
내 팔이 점점 빨라졌다.
체력보정 중급 5레벨인 내 몸은 강철과도 같아서 손목을 비튼 채로 권총을 겨누고 발사해도 반발력에 다칠 염려가 없었다.
때문에 나는 자유롭게 목인장을 상대로 쌍권총 근접전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게 실전에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냥 심심풀이인 셈 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샌드백을 상대로는 발차기를 연습했다.
퍼퍼퍽!
힘껏 뛰어올라 3단 차기.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발차기를 했고, 한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착지하며 다시 2연속으로 샌드백을 걷어찼다.
이렇게 난이도 높은 동작을 굳이 연습하는 이유는, 절벽에 매달려서 언데드들과 싸울 때 발차기를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몸의 무게중심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발차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오빠, 식사하세요!”
안에서 민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운동을 마치고 부엌으로 간 나는 식탁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며 감동했다.
“이걸 다 한 거야?”
“헤헤, 특별한 날이잖아요. 어제 양념에 재어놓은 거예요.”
소 갈비찜이었다.
나는 민정의 뺨에 입을 맞추고 폭풍처럼 식사를 했다.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민정의 모습은 마치 아내와도 같았다.
이러니까 우리 정말 신혼부부 같네.
별 생각 없이 그냥 유혹에 혹해서 시작한 연애였는데, 사귀면 사귈수록 민정은 괜찮은 여자였다.
‘시험을 전부 클리어한다면 결혼도 나쁘지 않지.’
나중에는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시험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머나먼 일을 기약할 수 없다. 그러니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뿐이었다.
“아참, 민정아.”
“네, 오빠.”
“조만간 외국에서 손님이 올 거야.”
“외국?”
“응, 아는 사람의 딸인데 연말 동안 내가 맡아 돌봐주기로 했어. 괜찮지?”
“아는 사람 딸… 몇 살인데요?”
“글쎄? 상당히 어리겠지?”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민정. 하하.
“그럼 괜찮아요. 만 15세 이상만 아니면 돼요.”
“만 15세 이상이라니, 내 수비 범위를 너무 광범위하게 잡는 거 아니니?”
내 불만에 민정이 깔깔 웃었다.
그러고부터 며칠 후, 오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 시각으로 내일 오전 8시 40분에 이사벨라가 도착할 거요.
“이사벨라요?”
-벨라라 부르면 되오. 가장 예쁜 금발의 아이가 보이면 그게 벨라요.
뭐냐, 갑자기 이 팔불출모드는.
저런 소리를 진지하게 하니 황당해진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오딘의 말대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민정도 굳이 따라가겠다며 옆자리에 탑승했다.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경계 대상이 아닌지 믿을 수 없어요.”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내 안주머니에 쪽지를 넣는 건 아니란다.”
“흥! 그 여자랑 연락하는 건 아니죠?”
“아니라고.”
“그럼 스마트폰 보여줘요.”
“맘대로 보렴.”
나는 잠금장치를 풀어서 민정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통화기록을 슥슥 훑어보던 민정은 갑자기 뭔가를 터치해서 조작하기 시작했다.
“뭐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때 내 스마트폰에 진동이 왔다.
“어? 전화 왔나 봐요.”
“이리 줘봐.”
수신자의 이름은…….
[귀요미 아내♡]
“…….”
“히히, 전화 안 받아요?”
열심히 만지작거리던 게 이거였냐.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응, 내 아내 되시는 분 맞으신가요?”
“히히, 맞아요.”
“현지랑 클럽 쏘다니시던 그분 맞나요?”
“아이 참, 끊은 지 오래 됐어요. 이제 재미없어요.”
“과연 그럴까요? 어느 순간 클럽에서 광질을 하던 당신의 본성이 깨어나진 않을까요?”
“안 돼요. 남편한테 스토커 기질이 있거든요.”
“저런,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누가 아니래요. 밤마다 얼마나 괴롭히는지 요즘 허리가 저려요.”
“…….”
“게다가 갑자기 솜씨가 너무 좋아진 거예요. 수상하지 않아요? 어떤 년이랑 연습한 걸까요?”
운동신경의 레벨이 올라서 그렇단다. 그게 그쪽 방면에도 효과를 발휘할 줄을 누가 알았겠니.
“그건… 당신 남편이 천재라 그래요.”
결국 민정이 빵 터져서 배를 잡고 자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