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70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70화
-시험자들 가운데 총기 전문가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총기 전문가요?”
-그렇소. 총기류를 제작하는 메인스킬을 가진 시험자가 노르딕 시험단에 있소.
“아!”
그런 시험자가 있었다니!
확실히 있을 법했다.
지구의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목숨 걸린 싸움에서 총기류를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테니까. 나처럼 말이다.
-제한도 있고 해서 아무에게나 총을 주지는 않지만, 나는 아무나가 아니지. 그럼 사흘 뒤에 코펜하겐에 오시오. 그때 거기서 뵙겠소.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하고서 나는 대충 계획을 잡았다.
내일 스위스로 가서 계좌 개설하고 바로 덴마크로 가는 게 좋을 듯했다.
난 일단 박진성 회장에게 문자를 보내서 일정을 설명하고 통역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전부 준비해 놨어. 넌 그냥 다녀오면 돼.
“정말요?”
-너 혼자 잘도 티켓 끊고 호텔 잡고 계좌 개설하고 하겠다. 내가 널 알지, 이놈아.
“하하…….”
-게다가 내가 스위스 계좌라고 했다고 스위스의 아무 은행인 줄 알지?
“그럼 아니에요?”
-신문 좀 보고 살아. 스위스 은행 요즘 한물갔어. 우리나라랑 조세협약 맺어서 뒷돈 못 숨겨.
“잘 아시네요. 많이 해보신 분처럼.”
-시끄러. 아무튼 내가 말한 은행은 따로 있어. 전 세계 시험자를 위한 은행이지.
“네? 그런 게 있었나요?”
-시험과 아레나에 대한 모든 사항은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어. 때문에 시험자가 마정을 팔아서 거두는 소득을 설명할 길도 없지.
그건 그렇다.
그래서 나도 스위스 은행에 계좌를 만들려고 하는 거고.
-돈을 적게 버는 시험자는 월급 같은 명목으로 위장하면 되는데, 너처럼 큰돈을 받는 거물급 시험자는 그러기가 좀 난감하단 말이야.
“그런 시험자들을 위한 은행이군요?”
-그래, 스위스가 그런 쪽으로 재미를 본 놈들이잖아.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거야.
한마디로, 미국이 온갖 협박을 하며 개인정보를 요구해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는 초강력 보안의 특수은행이란다.
-아무튼 준비 다 해뒀고, 오늘 중으로 너한테 연락이 갈 거야.
“예, 감사합니다.”
박진성 회장을 알게 되고서 느끼는 건데, 정말 일처리가 빠르고 빈틈없다. 저러니까 사업을 잘하지 싶었다.
박진성 회장 덕분에 여행준비가 간단해졌다.
나는 민정에게도 얘기해 두기로 하고 전화를 걸었다.
-오빠?
“응, 나야.”
-일하는 중 아니세요? 히히, 내가 보고 싶어서 못 참았구나?
“당연하지.”
남들이 들으면 닭살 돋을 만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다가 내가 말했다.
“민정아, 나 내일부터 2박 3일 정도 외국에 다녀올 거야.”
-스위스요?
역시 안 잊어버렸구나. 그 문자.
“응. 스위스랑 덴마크.”
-오빠…….
“응?”
-내가 너무~ 너무~ 사랑하는 오빠!
갑자기 애교가 듬뿍 들어간 목소리가 된 민정.
난 곧바로 그 뜻을 알아차렸다.
“너도 같이 갈래?”
-히히, 따라가도 돼요?
“응, 내가 볼일 볼 땐 따로 관광하면 되니까. 근데 여권 있어?”
-네, 작년에 현지랑 지현이랑 도쿄 놀러갔다 왔거든요.
“오케이, 그럼 당장 준비해. 내일 출발할지도 모르니까. 비용은 내게 맡기고.”
-네~!
민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활기차졌다.
이제 박진성 회장이 붙여준 사람한테 오늘 연락이 오면 비행기 한 자리 더 예매해 달라고 해야겠다.
그보다 민정과 함께 유럽에서 보내는 2박 3일이라니. 흐흐흐, 정말 흐뭇한 유럽 여행이 되겠구나.
상상만으로도 달콤한 기분이 들어서 오늘따라 포르쉐 카이엔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오빠!”
내가 오자마자 현지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뭐냐, 닭강정 소녀?”
현지는 갑자기 납작 엎드려 내 바짓가랑이를 꽉 붙잡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일단 나를 도망 못 가게 꽉 붙잡은 후에야 비로소 현지는 본색을 드러냈다.
“나도 갈 거야! 나도 유럽 갈 거야! 스위스! 덴마크!”
…유민정!
내 여친은 왜 이렇게 입이 싼 거야? 현지랑 일심동체냐?
“야, 이 눈치 없는 사백아! 커플끼리 여행 가는데 끼지 좀 마라!”
“흐아아앙! 나도 갈 거야! 스위스! 덴마크!”
“안 돼! 넌 공부나 해!”
“씨이! 민정이 그 계집애한테만 돈 펑펑 쓰고! 무슨 오빠가 동생은 하나도 안 챙겨줘?!”
“얼마 전에 나한테 용돈 받은 건 벌써 잊었어? 치매냐?”
“흐아앙, 나도 갈래! 나도 데려가! 나도 여권 있단 말이야!”
“그래, 여권 있어서 좋겠다. 그러니까 이거 놔!”
“싫어 안 놔!”
아이고, 내가 미쳐 정말…….
내 기억에 의하면, 현지는 어릴 적부터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 사냥개였다.
특히 사냥감이 나라면 절대로 사냥에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내가 어릴 적부터 얼마나 많이 양보를 해야 했던가!
“그럼 까놓고 말하마. 민정이랑 한 방 쓸 거니까 방해하지 마라.”
“안 할게!”
“좋아.”
결국 내가 허락하자 현지는 좋아서 방방 뛰며 여기저기 전화하기 시작했다. 내일 유럽 간다며 자랑질이다.
“어휴.”
난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전화가 왔다.
-김현호 씨?
“예, 누구시죠?”
어쩐지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회장님의 지시로 연락드렸습니다. 이수현입니다. 기억나시는지요?
“…엑?”
-후훗, 뭔가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나직이 웃는 이수현의 목소리는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
하필이면 이 여자냐!
“아, 아니요.”
-다행이군요. 일단 티켓은 예매해 두었는데 혹시 변동사항이 있나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 변동사항 있어요. 두 자리 더 예매해 주시겠어요?”
-일행이 있으십니까?
“네, 두 사람이요.”
-알겠습니다. 그럼 동행 두 분의 영문 이름과 생년월일을 문자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나는 현지와 민정에게 물어서 영문 이름과 생년월일을 이수현에게 보냈다.
***
다음 날, 이수현이 알려준 시간에 맞춰서 우리는 인천공항에 왔다.
오는 내내 나는 삐쳐 있었고, 민정은 옆에서 열심히 애교 부리며 그런 날 달랬다.
“현지가 갑자기 놀자는데 3일 내내 안 된다고 하니까 어디 가냐고 막 추궁하는 거예요.”
“잠깐 집에 다녀온다든가 이유는 많잖아.”
“오빠도 사흘간 없을 텐데 당연히 현지가 알아차리잖아요. 거짓말했다고 현지가 삐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고요?”
“맞아, 맞아. 내가 삐치면 어떻게 감당할 거야?”
현지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뻔뻔스럽게 말한다.
나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유럽에서 오붓한 시간이 될 줄 알았거늘! 토익 사백 점짜리 바보가 이렇게 끼어들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토익 공부나 할 것이지…….”
“오빠 점수는 따라잡았거든? 이제 700점 고지도 머지않았어!”
“그렇게 공부했는데 아직도 700이 안 된다니…….”
나는 현지의 나쁜 두뇌 성능에 진심으로 치를 떨었다.
그 바람에 울컥한 현지와 티격태격했지만 오랜만에 내가 승리했다.
“이 여행을 누구 돈으로 가더라?”
“…….”
“비행기랑 숙식은 내가 낼 테니 나머지 비용은 각자 알아서 하자꾸나.”
“오빠, 민정이는요? 민정이도 더치페이예요?”
민정이 내 팔에 찰싹 달라붙어 애교를 떤다. 팔에서 느껴지는 흐뭇한 감촉에 나는 헤헤 멍청하게 웃었다.
“당연히 넌 나한테 맡기면 되지. 돈 걱정 말고 신 나게 놀자.”
“오빠 멋쟁이!”
“흐흐흐.”
이 돈 많은 호구 오빠만 믿으려무나.
그때 현지가 반대편에 달라붙었다.
“오빠! 현지는요?”
뭐야, 얜?
“어이쿠, 이게 누구신가? 닭강정계의 찬란한 샛별 아니야.”
“아앙, 현지도! 오라버니, 현지도 챙겨주세요.”
“뭐래? 안 떨어져? 징그럽다.”
“아이잉!”
그렇게 현지를 굴복시키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이수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안녕하십니까. 이수현입니다.”
그녀의 소개에 별안간 민정의 두 눈에서 헬 파이어가 튀어나왔다.
민정이 라이칸스로프와 비슷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머머, 언니가 이수현이에요?”
뜬금없이 현지가 알은체를 했다.
“그렇습니다. 저에 대해서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아주아주 멋진 커리어우먼이라고 들었죠!”
그 말에 이수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현지 쟤는 이수현을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민정을 쳐다보니, 이번엔 민정이 내 눈을 피했다.
…너희는 서로 비밀을 공유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니?
탑승수속을 하는 내내 현지는 이수현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그녀가 답할 때마다 우와 하고 감탄을 하기 바빴다.
그런 주제에 인천공항 면세점에 이르자 다시 나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사달라고 앙탈을 부렸다.
마지못해 화장품을 사줬는데, 득템하고 기뻐 날뛰는 현지를 민정이 부러운 눈으로 보는 게 아닌가.
민정은 가족인 현지와 달리 뭐 사달라고 조를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결국 민정에게도 무언가 하나를 사줘야 했다. 민정은 끝까지 아니라고 사양을 했다. 손에는 이미 샤넬 향수를 쥔 채로.
그런 우리를 이수현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게이트 앞에서 줄을 섰는데, 우리는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여권과 티켓을 체크받고 탑승했다.
퍼스트 클래스 탑승객은 줄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우와!”
현지는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보며 감탄했다.
민정도 입을 가리며 놀라고 있었고, 나는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런 우리를 다른 퍼스트 클래스 탑승객 몇 명이 웃으며 바라본다. 아, 쪽팔려.
그러나 나는 곧 쪽팔림을 잊게 되었다.
“아, 민정이가 보고 싶다.”
“오빠가 옆에 없으니까 외로워…….”
좌석마다 일정 간격으로 떨어져 배치된 퍼스트 클래스에서 우리는 견우와 직녀 놀이를 했다.
“아오, 저것들을 그냥.”
우리의 애정행각에 현지가 몹시 열받아했다.
***
확실히 이수현이 있으니 정말 편했다.
이수현은 일정 관리, 통역, 가이드는 물론이고 계산까지 도맡아 처리했다.
우리의 여행비를 진성그룹이 처리해 주는 모양이었다. 역시 통 큰 회장님이시다.
첫날,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체크인하고 관광을 시작했다.
제네바의 거리를 다니며 관광을 조금 즐기다가, 지친 현지와 민정을 호텔에 데려다 놓고 나는 이수현과 단둘이 따로 움직였다.
시험자 전용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기 위함이었다.
이수현과 단둘이 떠날 때 민정이 질투에 불타는 얼굴을 하고 있던 게 조금 걸렸다.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면서, 문득 이수현이 말했다.
“애인분이 귀여우시네요.”
“아, 네.”
나는 움찔했다.
아니, 작업을 건 쪽은 이수현인데 오히려 내가 위축되어야 한다는 게 슬펐다. 이게 다 나의 내공이 부족해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변두리 지역의 어느 10층짜리 빌딩이었다.
아무런 간판이나 상호 표시도 없는 빌딩이라는 점이 못내 이상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두 명의 경비원이 인사했고, 이수현과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오른편을 가리켰다.
“계좌 개설은 저쪽이라고 합니다. 따라오세요.”
나는 이수현의 뒤를 쫓으며 흘깃 경비원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아마 국가 소속이겠지?
복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비로소 은행처럼 보이는 곳이 보였다.
하지만 직원들만 있을 뿐 고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이수현은 창구 직원에게 여러 가지 서류를 꺼내 보여주며 대화를 나눈다. 창구의 여직원은 나를 보더니 뭐라고 말하며 손짓한다.
이수현이 통역했다.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네요.”
난 여권을 꺼내 건넸다.
비밀번호를 찍고, 이런저런 서류에 서명을 하고…….
여러 절차가 끝나자 비로소 카드 한 장이 발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