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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이계사냥기 63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4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63화

 


엘프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동화 속의 세계와 같았다.
직물로 짜인 튼튼한 천으로 커다란 나무에 걸쳐 만든 집들이 사방에 보였고, 온갖 모양의 정령들이 날아다녔다.
실프나 카사는 물론 물의 정령 운디네와 땅의 정령 노움 등이 다양한 모양새를 띠었다. 작은 소녀 모습도 있었고 팅커벨처럼 생긴 정령도 있었다.
“어?”
“인간이다!”
“인간이야!”
“제이크 아저씨가 데려왔나 봐.”
정령들과 함께 뛰어 놀던 자그마한 어린 엘프들이 하는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씩 섞인 초롱초롱한 어린 눈빛들.
‘귀엽다!’
저런 자식을 낳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 정도로 어린 엘프들은 귀여웠다.
저런 애들을 납치해 팔려고 하다니, 정말 괘씸한 놈들이다.
‘인면수심한 놈들. 비료로 만들어버린 건 정말 잘한 일이야.’
어린 엘프들은 얼마 전에 있었다던 납치 미수 사건 때문인지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였다.
쟤네들한테도 실프와 카사를 보여줄까? 그럼 호감을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이크라 불린 엘프 남자가 나를 채근했다.
“뭐 하나? 어서 따라와라!”
“아, 예.”
나는 제이크의 뒤를 쫓아갔다.
키가 커서인지 원래 엘프가 다 그런 건지 걸음걸이가 너무 빨라서 쫓아가기가 힘들었다.
마을의 성인 엘프들도 나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린 엘프들과 달리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냉정하고 경계 어린 눈빛이었다.
‘다들 선남선녀네.’
남자든 여자든 하나같이 아름답게 생겼다.
여자들은 누구나 모델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긴 생머리와 날씬한 허리, 매끈한 다리.
짧은 바지와 젖가슴을 살짝 드러낸 상의를 입고 있어서 몸의 아름다움이 더 잘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성적인 대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강하게 들어서 성욕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엘프를 노예로 두려는 놈들은 성노예보다는 예술품을 소장하는 마음이 더 강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과도한 엽색으로 성욕이 변질되어서 엘프를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인간들도 있겠지만.
“제이크!”
엘프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사슴처럼 걸음걸이가 사뿐사뿐 가벼웠다.
“엘라.”
“제이크, 이게 무슨 짓이야? 어째서 인간을 데려왔지?”
엘라는 왠지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날 한 번 쏘아본다.
제이크가 말했다.
“이 인간은 친구다.”
“친구? 제이크, 너 미쳤어? 지난번의 일을 벌써 잊은 거야?”
“그럴 리가.”
“어떻게 이런 무심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인간이 마을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엘리스가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알아?!”
“나도 네 여동생을 걱정하는 사람 중 하나다. 엘리스를 구출한 게 나라는 것을 잊지 마라.”
아레나에서는 엘프도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모양이었다.
하긴, 지구와 달리 고등생명체가 인간뿐이 아니니까.
“그런데 인간을 데려와? 불안에 떨고 있는 엘리스는 어쩔 거야?”
제이크와 엘라라는 여성 엘프의 대화를 통해 나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파렴치한 인간 사냥꾼들에게 납치당했던 어린 엘프가 바로 그녀의 여동생 엘리스인 모양이었다.
내가 마을에 나타나자 엘리스가 납치당했던 기억 탓에 불안에 떨고 있고, 그 언니인 엘라가 화가 난 것이다.
“엘리스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제이크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새침한 엘라의 물음에 제이크가 나를 가리켰다.
“이 인간을 보면 엘리스의 불안증도 치유될 거다. 모든 인간이 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테니까.”
“이 인간을 어떻게 믿는 거야?”
“곧 알게 된다.”
실프와 카사의 귀여움이 내 신뢰의 증거라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인간에게 가장 화가 났던 건 제이크 너잖아?”
“당연하지. 엘리스는 내 여동생이기도 하니까.”
“제이크…….”
엘라의 얼굴에 감격이 어린다.
제이크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엘라의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하, 연인이었구나.
어쩐지 둘의 논쟁이 커플들 말다툼 같은 느낌이다 싶었지.
엘라는 나를 쏘아보았다.
“지켜보겠어, 인간.”
“그러세요.”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엘라의 눈빛이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내 대답이 도발로 들렸나?
나는 다시 제이크의 뒤를 따라 걸었다.
우리는 엘프 마을의 중심부로 향했다.
마을 중심부는 집들이 없는 빈 공터였다. 온갖 종류의 꽃들로 가득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나를 경악하게 만드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저게 나무야 빌딩이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였다. 일단 잎사귀로 보아 활엽수 종류로 보이긴 한데, 높이가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이 저렇게 클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벨탑 같은 죄악감 대신 엄청난 생명력이 느껴진다.
어머니 같은 따스함이랄까?
그 숭고한 거목을 보며 감동에 젖어 있을 때, 제이크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어머니들의 허락 없이 인간을 생명의 나무에 접근시킬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제이크는 생명의 나무라 불린 거목으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나는 생명의 나무를 감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모계사회구나.’
엘프들은 중요한 의사 결정을 여자들이 결정하는 모양이었다.
제이크가 말한 ‘어머니들’이 바로 이 마을의 지배자들이리라.
지배자?
그냥 지도자가 더 적절한 표현 같았다.
엘프 마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누군가에게 지배받는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인류 사회의 특징인 질서가 구축되지 않은 자유분방함.
그 증거로…….
“저 인간이 우리의 친구라고?”
“제이크가 그랬대.”
“인간은 좀 그런데. 어머니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까?”
“글쎄. 그래도 어머니들의 판단은 항상 옳으니까.”
엘프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내 주변에 모여 있었다.
내게 접근해서 말 거는 엘프는 없었지만, 마치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빙 둘러 모여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들이 제이크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보러 갈까?”
“됐어. 어머니들이 정신 사나워하실라.”
역시나 엘프들에게 질서 같은 건 없었다. 이곳의 지도층인 어머니들에게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전에 엘리스가 납치당했을 때, 어머니들이 대책을 세우는데 애들이 거기 몰려가서 울고불고 하는 통에 고생하셨잖아.”
“제이크가 눈 뒤집혀서 혼자 추격에 나섰으니 다행이지.”
“근데 애들 탓이라기보다는, 원래 어머니들이 워낙 수다가 길잖아?”
음, 권위가 없다는 건 이런 단점도 있구나.
아무래도 엘프들은 지배와 피지배의 개념이 없는 대신, 의사 결정 속도도 느린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족히 한 시간이 넘은 것 같은데 여전히 제이크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걸까?’
그냥 인간을 한 번 데려오라고 하면 될 텐데, 뭔 회의를 저렇게 길게 하지?
지겨워진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앉았다.”
“인간이 앉았어.”
“심심한가 봐.”
엘프들이 또 수군거린다.
연예인들도 밖에 나가면 이런 고충을 겪고 있겠구나. 연애할 때 힘들겠다.
엘프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서 혼자 가만히 있기가 몹시 뻘쭘했다.
나는 고민 끝에, 실프와 카사를 소환했다.
엘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

“믿을 만한 인간입니다. 정령술사란 말입니다.”
제이크가 강하게 자기주장을 피력했다.
어머니들…….
생명의 나무 아래에는 겉보기에 중년쯤으로 보이는 여인들 다수가 모여 있었다.
이 엘프 마을의 모든 나이든 여인은 이곳에 다 모여 있는 듯했다.
그녀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제이크, 네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정령술사인 인간 중에 악인은 없지. 하지만 인간이란 꼭 악인이라고 해롭지는 않듯, 선인이라고 꼭 이롭지는 않단다.”
“그야 옳은 말씀이시지만……!”
“무엇보다 부자연스럽잖니. 인간이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목적이 친구가 되기 위해서라니?”
“확실히 이상해. 인간은 그렇게 할 일 없이 움직이는 종족이 아니야.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좋은 인간이라 해도, 못된 인간의 조종을 받고 있을 수도 있고. 난 젊은 적에 인간들의 나라를 구경하면서 그런 모습을 본 적 있어.”
어머니들의 대화는 점점 인간의 본질에 대한 원론적인 토론으로 변해갔다.
제이크는 결론이 빨리 내려지지 않자 답답함을 느꼈다.
‘또 다들 수다를 떨고 계셔! 이래서 문제란 말이야!’
남성 엘프들이 그녀들에게 품는 불만도 딱 하나, 바로 이거였다.
무슨 회의를 하든 엄청 수다를 떨어댄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그것을 실질적으로 행동에 옳기는 남성 엘프들은 그녀들이 결론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에 신물을 내야 했다.
그렇게 장시간 수다를 떨어대다가 내린 결론이 언제나 옳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모계사회가 유지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머니!”
“어머니들!”
멀리서 엘프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들은 사색이 되었다.
“어마, 쟤네들이 또 왜 온대?”
“아이고, 이제 회의는 다 틀렸구나.”
“궁금했나 봐.”
“좀 더 기다리지, 쟤들은 하여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우르르 몰려든 엘프들이 두서없이 마구 소리쳤다.
“저 인간은 우리의 친구예요!”
“친구로 받아주어야 해요!”
“맞아!”
“수다 그만 떠시고 일단 인간을 보시라고요!”
“친구로 받아주지 않으면 안 돼요!”
“저 정령은, 정령이……!”
어머니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제이크만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폭동을 일으키듯이 생명의 나무로 달려갔던 엘프들 수백여 명이 다시 우르르 나에게 몰려들었다.
저 많은 인원이 나 한 사람에게 해일처럼 밀려들자 나는 오싹함을 느꼈다.
“꺄하하!”
“이 실프 너무 좋아! 야옹, 야옹!”
“카사 꼬리 너무 빨리 흔들어, 히히히!”
그나마 내 주위에서 정령들과 놀고 있는 어린 엘프들이 있어 위안이 된다.
수백 엘프 무리가 나를 빙 둘러 포위했고, 제이크와 나이든 중년쯤 된 여성 엘프들이 내게 걸어왔다.
그녀들은 나이가 들어 보임에도 대단히 아름다웠다.
하나같이 ‘나 왕년에 한 미모 했음’이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그녀들이 바로 제이크가 말한 어머니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20명? 30명?
‘최고령 여성 몇 명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여성 엘프들은 나이 들면 누구나 ‘어머니들’이 되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의사결정자 숫자가 많으니까 판단이 느리지.
“네가 제이크가 말한 인간이구나.”
가장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되는 중년 여성 엘프가 물었다.
최고령으로 보인다지만, 그런 그녀조차 아름다웠다. 이상하게도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나는 공손히 대답했다.
어머니들의 시선은 그녀들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령들과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향했다.
나의 실프와 카사를 본 어머니들은 나직이 탄식했다.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그렇구나. 저러면 친구로 받아줄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어.”
나는 슬슬 엘프들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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