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61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61화
최혁의 빠른 콤비네이션이 이어졌다.
나는 양손을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파파팟!
스토핑으로 최혁의 빠른 연타를 일일이 쳐냈다.
마지막에 최혁의 라이트 훅이 날아들었지만, 위빙으로 피하고 짧은 어퍼컷으로 반격했다.
툭.
어퍼컷은 최혁의 턱을 살짝 쳤다. 제대로 후려쳤으면 다운될 게 분명했다.
최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단하시군요. 이제 제가 가르쳐 드릴 만한 게 없습니다.”
“별말씀을요.”
오늘은 20일로 주어진 휴식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정타를 한 대도 허용하지 않고 최혁을 압도했다.
테크닉이 능숙한 최혁은 빠른 스피드로 화려한 콤비네이션을 펼쳤지만, 모조리 막거나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냐고? 맞다.
하지만 복싱 실력이 최혁을 능가하게 되었느냐? 그건 아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내 테크닉이 최혁을 따를 리 만물했다.
하지만 운동신경 초급 2레벨 덕에 여러 복싱 동작들이 빠르게 몸에 익었고, 무엇보다도 체력보정 초급 5레벨의 순발력과 반사 신경이 마침내 빛을 발했다.
순발력과 반사 신경이 압도적이다.
가벼운 잽 한 방에도 묵직함을 줄 수 있는 근력이 있다.
운동신경으로 정확한 동작이 몸에 익어 반사적으로 펼칠 수 있다.
이런 압도적인 조건 하에서는 최혁이 아무리 능수능란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아직 배우셔야 하는 게 많은데, 제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지니까 가르쳐 드리기가 민망하군요.”
“아닙니다. 정말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고, 앞으로도 부탁드릴게요.”
“예, 내일도 여기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올 거예요.”
점심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일찍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포르쉐 카이엔을 몰고 천안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의 이기적인 욕망일까.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민정이가 보고 싶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
아니, 그녀를 안고 싶었다.
-여보세요?
“민정아.”
-네, 오빠!
“오늘 일찍 돌아가게 됐는데 저녁에 볼까?”
-아이, 어쩌죠? 오늘 친구들 만나기로 했는데.
“현지?”
-아뇨, 요리학원에서 사귀게 된 친구들이에요.
“그래?”
-얘들 손이 되게 야무져서 제가 도움 많이 받거든요. 오늘 보답으로 밥 사기로 했어요.
“…그럼 어쩔 수 없네.”
-힝, 미안해요. 내일 봐요. 내일 우리 재미있게 놀아요.
나는 쓸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자.”
-미안해요.
“괜찮아.”
통화를 끊자 공허함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 쓸쓸한 걸까?
당연히 민정이 거절해서가 아니었다. 오늘이 주말도 아니고, 민정도 자기 삶이 있는 게 당연했다.
대뜸 보자고 볼 수 있을 리 없다.
집에 가면, 여전히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시험을 봐야 하는 것만 빼면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다.
알바 하고 돌아가면 비좁은 텅 빈 지하 원룸만 있던 백수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외롭다.
먼저 죽은 세 사람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렇구나.’
이제는 함께 생사를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였다.
시험자로서 함께 긴장과 두려움을 공감하고, 그걸 견디고 헤쳐 나갈 동료들이 이제는 없었다.
아무도 나의 두려움에 공감해 주지 않는다.
혼자 싸워야 한다.
고독한 싸움…….
이제는 곁에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나는 또 가야 한다.
집에 도착했다.
평소와 똑같다.
엄마와 누나는 일 하러 가서 늦게 오고, 현지는 오전 수업만 하는 날인데도 아직 안 돌아오는 걸 보니 딴 데로 샌 듯했다.
‘미리 준비해 둘까?’
아직 10시간이나 남았다.
하지만 달리 할 일이 없으니 미리부터 시험 준비를 하기로 했다.
한국 아레나 연구소에서 건진 배틀 슈트를 꺼내놓고, 카고팬츠와 트레킹화 등 야생에서 활동하기 좋은 옷을 골라놓았다.
벽장 구석에 숨겨놓은 7.62㎜ 탄 박스를 꺼냈다.
아이템백을 소환해 탄 클립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생수를 채워놓은 물병과 스위스 군용 다용도나이프도 챙겨 넣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위잉― 윙―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민정이었다.
‘무슨 일이지?’
고독에 젖어 있던 나는 민정의 전화가 반가웠다.
“여보세요?”
-오빠!
“어, 민정아.”
-약속 취소했어요.
“뭐?”
-오늘 오빠 볼래요.
“왜? 내일 봐도 되는데.”
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민정이 말했다.
-오빠 목소리가 왠지 쓸쓸하게 들렸어요, 오빠 별일 없는 거죠? 걱정 되니까 오늘 볼래요.
왈칵, 가슴에 따스한 감정이 올라왔다.
별 생각 없이 즐기자는 생각으로 사귀게 된 민정이었다.
4회차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오늘로 끝나게 될 사이였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가벼운 마음가짐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민정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곧 죽음과 싸우러 가야 할 나의 외로움을 알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
“내일은?”
-내일도 보고요, 히히.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보자. 지금 어디야?”
-요리학원이요.
며칠 전에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내가 갈게.”
-진짜요?
“응, 기다려.”
나는 꺼내둔 짐을 대충 침대 밑에 밀어 넣고 밖으로 나섰다.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속도를 많이 냈다.
요리학원 앞에 도착해서 나오라고 메신저를 보냈다.
“오빠!”
민정이 잔뜩 들뜬 표정으로 달려 나온다.
나는 운전석에서 나와 민정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 오빠! 누가 봐요.”
“보긴 누가.”
“아까 말한 친구들이요.”
“응?”
그제야 민정의 뒤를 따라 나온 친구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민정과 비슷한 나의 두 여자는 우리의 애정행각에 놀란 얼굴들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는 친구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늘 민정이 뺏어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되게 보고 싶으셨나 봐요. 어쩔 수 없죠, 호호.”
키득거리며 우리를 놀리는 친구들.
나는 민망해졌지만, 내공이 강한 민정은 뻔뻔스럽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럼 먼저 갈게. 오늘 우리 오빠가 너무 급해 보인다.”
친구들이 깔깔 웃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참고 민정을 조수석에 태웠다.
차를 타고 향한 곳은 자연스럽게 민정의 집이었다.
민정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날 쏘아본다.
“정말 급했나 보죠?”
“미, 미안.”
“흥, 남자들은 하나같이 하고 싶을 땐 외로워하더라.”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어. 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같이 있자. 그거면 돼.”
“으이그, 그런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게요?”
“으잉?”
“남자가 뻔뻔하게 밝힐 줄도 알아야죠.”
그만 멍해진 나를 뒤로 하고 민정은 차에서 내렸다.
“얼른 올라가요. 밥해줄게요.”
“으, 응, 그래.”
어째 민정은 벌써부터 날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오피스텔로 올라가 그녀가 해준 밥을 먹었다.
따스하고 찰 지게 잘 된 쌀밥을 한 그릇 푸고, 두부를 넣은 된장찌개와 김치, 김, 계란프라이로 반찬을 했다.
잘 배운 건지 원래 재능이 있었던 건지 하나같이 맛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침대로 갔다.
벗고 안고 입 맞추고…….
구멍이 난 가슴을 계속 채우려는 것처럼, 나는 끊임없이 그녀를 탐했다.
그런 나에게 보조를 능숙하게 맞춰주며, 그녀는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거칠게 그녀를 탐닉하는데, 도리어 그녀에게 보살핌을 받는 아늑한 느낌.
모든 욕망을 쏟아내고, 우리는 서로를 가만히 끌어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민정이 물었다.
“오빠,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근데 오늘 왜 그래요? 평소랑 달라요.”
나는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원래 남자는 하고 싶을 땐 외롭잖아.”
“86만 원짜리 선물로 맞아볼래요?”
86만 원짜리 선물이란, 내가 덴마크에서 사다준 일본제 명품 식칼 세트였다.
나는 킥킥 웃으며 그녀를 더 강하게 안았다.
“아이 참, 숨 막혀요.”
핀잔을 하면서도 그녀는 빈틈없이 찰싹 밀착해 왔다.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우리는 포옹을 했다.
“큰일이다.”
“뭐가요?”
“네 말대로 되는 것 같아.”
“……?”
“너한테 점점 미쳐 가는 것 같아.”
그런 내 말이 기분 좋았는지, 민정은 배시시 웃었다.
“말했죠? 그렇게 된다고.”
“그러게. 이를 어쩌지.”
“지금부터 미리미리 저한테 잘해야 할 걸요. 안 그러면 나중이 저한테 목매게 됐을 때 복수할 거니까.”
민정의 귀여운 협박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잘할게. 그때 되면 나 좀 봐줘.”
“흥, 쥐고 흔들고 들었다 놨다 할 거야. 비싼 선물 펑펑 바치게 하고.”
“에이, 그러지 말고.”
“나이트클럽 간다고 뻥치면서 애간장 타게 해야지.”
“그건 정말 너무하잖아. 스토킹한다?”
우리는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웃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덧 10시였다.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
진즉에 돌아가서 준비해야 했는데, 민정이 계속 더 있으라고 붙잡는 바람에 여태 못 갔다.
실은 나도 민정과 함께 있고 싶었고 말이다.
1분 1초가 너무 아깝고 안타까웠다.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
“그냥 내일까지 계속 같이 있어요. 네?”
이제는 민정이 날 붙잡는 형국이 되었다.
나는 욕망을 해소하니 태도가 바뀐 놈이 된 것 같아 몹시도 미안했다.
“민정아, 오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정말 미안. 나도 정말 같이 있고 싶은데.”
“치, 이러기예요?”
“미안해. 내일 일 끝나고 곧바로 달려올게. 응?”
“흥, 나중에 두고 보라지. 놀아달라고 애걸하게 만들어줄 거야.”
다행히 삐친 건 아닌 듯 농담을 하는 민정이었다.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입맞춤을 해주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집에 돌아와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시간이 되자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
“잘 쉬셨나요?”
아기 천사가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나를 반겼다.
“오냐.”
“오늘부터는 혼자서 시험을 보셔야 하는데, 생각보다 표정은 밝아 보이네요?”
“불만이냐?”
“네,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진 것처럼 우중충한 얼굴을 기대했는데.”
“확 그냥.”
내가 훅을 날렸지만 놈은 잽싸게 피한다. 똥파리 같은 놈.
“천사더러 똥파리라뇨? 신성 모독죄로 벼락 맞을래요?”
“…….”
남의 생각 멋대로 읽지 말란 말이야. 남 약 올리는 걸 좋아하는 주제에.
“시험은?”
“석판을 확인하시면 돼요.”
나는 석판을 소환했다.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7
-카르마(Karma): 0
-시험(Mission): 제한시간 동안 갈색산맥의 엘프를 도와라.
-제한시간(Time limit): 30일
‘엘프?’
차지혜에게서 받은 자료에서 본 종족이었다. 엘프를 도우라니, 정말 밑도 끝도 없다.
“힌트 좀 줘.”
“힌트는 이미 받지 않았던가요?”
“뭐?”
“자자, 얼른얼른 출발하세요.”
아기 천사는 시험의 문을 생성시켰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밝은 백색 빛 무리가 눈앞을 하얗게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