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49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49화
“뭡니까?”
내가 먼저 말했다.
내가 위축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나갔고, 실제로도 두렵지 않았다.
사내들은 나에게 가까이 접근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증거 없이 전부 죽일 수단이 나에게 있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길거리 한복판에서 대놓고 범죄를 저지를 리도 없었다.
사내들 중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와 대표로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경우 없이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연구소에서 나왔어요?”
“아닙니다.”
중년 사내는 나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진성전자 제3비서과 실장 이정식.
나는 깜짝 놀랐다.
진성전자는 국내 기업 중 최대 매출을 올리는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대기업의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내게 용건이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오셨나 보죠?”
“그렇습니다.”
“제 신상 정보는 연구소에서 유출한 거예요? 좀 불쾌하네요.”
“그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김현호 씨에게 좋지 않은 용건은 아니니 모쪼록 불쾌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해할지 안 할지는 제가 판단할 거고, 일단 용건을 말씀해 보세요.”
“일단은 함께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먼저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
“그건 회장님을 직접 뵈셔서 말씀을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설마 진성그룹의 박진성 회장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뭐라고 이 나라 최고 갑부가 용건을 가질까?
아무리 내가 시험자라고는 하지만, 이 나라에 시험자가 한둘도 아닌데 말이지. 시험자들 중에서 나는 이제 3회차를 넘긴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나는 도리어 이 사내들에 대한 의심이 더욱 강해졌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생긴 것이다.
“이런 늦은 시간에 어딘지 모른 곳으로 끌려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네요. 그럼 그쪽이 너무 일방적이니까요.”
“하지만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진성그룹 박진성 회장님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분이 맞습니다.”
“…….”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정말 그런 사람이 날 부른다고?’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난 이제 이 사내들의 꿍꿍이가 의심스러워졌다. 어쩌면 음험한 조직이 시험자인 나를 이용하기 위해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납치한 뒤에 목숨을 위협해가며 아레나에서 마정 따위를 구해오라고 협박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아레나로 소환당해 시험을 볼 때, 내 몸은 현실에서 잠들어 있다.
현실에서 목숨을 위협당한 상태라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이건 좀 경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날 밝은 때에 제가 잘 아는 장소에서 봤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당신들이 진성그룹에서 나왔는지도 의심스럽고, 박진성 회장이 저를 찾는다는 말도 솔직히 믿기 힘들어서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일단 가보면 아십니다. 저희도 회장님의 지시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죄송하게 됐네요. 그건 여러분 입장일 뿐이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비서실장 유정식의 목소리에 약간 고압적으로 변했다.
그에 따라 나도 눈빛을 사납게 치켜떴다.
“그래서? 납치라도 하게요?”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근데? 왜 누가 부르면 난 순순히 가야 합니까?”
“…….”
“내가 누군지 못 들었어요? 시험자가 뭔지 몰라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뭘 믿고 태도가 그따위신가요? 소리 소문 없이 살해당하고 싶으세요?”
“불쾌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유정식의 태도가 저자세로 변했다.
“그럼 정중하게 꺼져주세요. 그럼 이만.”
난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사내들이 내 앞을 가로막는 게 아닌가. 직업상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본능적으로 주먹이 뻗어 나갔다.
퍼억!
“컥!”
한 사내가 턱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이어서 그 옆의 사내의 정강이를 걷어차서 쓰러뜨렸다.
“큭!”
걷어차인 사내 역시 균형을 잃고 주저앉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주먹과 발이 자연스럽게 뻗어 나갔다. 공격해서 두 사람을 쓰러뜨리는 동작에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운동신경의 효과다!’
스킬합성으로 얻은 운동신경의 효능이 입증된 것이었다.
이에 다른 사내들이 놀라 주춤주춤 양옆으로 길을 텄다.
나는 유유히 그들 사이로 지나쳤다.
그러자 등 뒤에서 유정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럼 언제 모시러 오면 되겠습니까?”
“그 새끼가 찾아오라 해!”
나는 사납게 소리치고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부러 이렇게 거칠게 대응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상대도 날 압박하려 했으니까.’
내가 신상을 알아냈다면 연락처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미리 연락하지 않고 이렇게 불쑥 예고 없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러면서 꼭 따라가야 한다는 듯이 말한다. 일부러 고자세로 날 당혹시켜서 쉽게 다루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난 거칠게 거절 의사를 밝혔고, 사내들이 막아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들겨 패서 제압했다. 이걸로 충분히 날 쉽게 다룰 수 없다는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
유민정은 길 어귀에 숨어서 배꼼이 얼굴만 내밀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정은 한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는데, 112가 찍혀 있는 화면의 통화 버튼을 언제든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절친한 단짝 친구의 친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혼자 달아날 정도로 의리 없는 민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몰래 지켜보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까닭에 민정의 얼굴은 멍해져 버렸다.
‘진성그룹? 회장?’
진성전자에서 나왔다는 사람들.
정말로 옷이나 구두나 깔끔한 헤어스타일이나, 사내들은 어딘가의 엘리트들이지 껄렁껄렁한 자들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김현호를 정중하게 모시려고 한다.
회장이 부른다면서 말이다. 그 회장이란 박진성 회장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어지는 더 놀라운 상황.
김현호는 전광석화처럼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천하의 박진성 회장을 ‘그 새끼’라고 부르며 떠나는데도 사내들은 붙잡지 못했다.
‘현호 오빠는 대체 어떤 사람이지?’
민정은 의문이 들었다.
현지에게 듣기로는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다가 뒤늦게 돌아온 안쓰러운 남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클럽에서 실제로 봤을 때는 상상했던 이미지와 달리 배짱 있고 당당해 보여서 신선했다.
그런데 지금 본 현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진성그룹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며, 박진성 회장이 부르는 걸까?
‘뭐야? 대체 현호 오빠는 누구야?’
민정의 머릿속이 김현호로 가득 찼다.
진성그룹에서 찾는 중요한 남자.
두려움 없는 당당한 태도.
튼튼한 몸과 남자 둘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하는 힘까지.
민정은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자기 입으로 나 잘났네 하는 남자를 한두 명 본 게 아니었지만, 김현호 같은 남자는 처음이었다.
민정은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112가 찍힌 다이얼 화면을 종료시키고, 대신 메신저를 열었다.
***
“왜 이렇게 늦게 와?”
집에 돌아오니 현지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노려보았다.
“왜겠어?”
“이익! 뭐야? 뭐 하다 온 거야?”
“이 오라버니에게도 봄이 왔구나!”
“정말 죽을래? 내가 민정이는 안 된다고 했다?!”
“랄랄라~ 즐거운 인생~”
“꺄악! 내가 못살아 정말! 걔가 어떤 년인데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그렇게 현지를 실컷 약 올린 뒤에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위잉.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아마 민정에게서 온 문자겠지.
아니나 다를까.
[유민정^^*: 오빠, 잘 들어가셨어요?]
[나: 응^^ 걱정했어?]
[유민정^^*: 당연하죠. 경찰에 신고할까 말까 얼마나 고민했다고요 ㅠㅠ]
날 걱정했다는 민정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예쁜 여자가 걱정해 주는데 흐뭇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나: ㅋㅋㅋ 별일 아닐 거라고 했잖아.]
[유민정^^*: 그 사람들 대체 뭐래요?]
[나: 몰라. 사람 잘못 찾아왔나 보더라. 별일 없이 헤어졌어.]
[유민정^^*: 정말 다행이에요ㅠㅠ 오빠 걱정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였다고요]
[나: 걱정해 줘서 고마워^^]
잠시 후 민정의 문자가 다시 도착했다.
[유민정^^*: 오빠, 그런데 내일은 뭐해요?]
[나: 내일은 친구랑 약속이 있지. 왜?]
혹시 그 사람들이 내일 다시 찾아올지도 몰라서 그렇게 대답했다.
[유민정^^*: 제가 밥 산다고 했잖아요. 금요일 저녁에는 시간 되세요?]
‘어라?’
이건 아무리 봐도 데이트 신청이었다.
반쯤 장난처럼 찔러보는 게 아니라 직접 만나자고 신청해올 줄은 몰랐다.
‘어떡하지?’
[나: 금요일 저녁?]
[유민정^^*: 네]
나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나: 미안. 그날은 어찌 될지 모르겠어.]
[유민정^^*: 아……]
[나: 내가 시간 날 때 연락할게]
[유민정^^*: 네^^]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민정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진지한 마음은 아니었다. 현지의 단짝 친구인데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기는 껄끄러웠다.
무엇보다도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말이다.
준호, 혜수, 강천성…….
세 사람을 희생시키고 혼자 살아 돌아왔다.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여자를 만나 달콤한 인생을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들겠느냔 말이다.
지금쯤 준호와 혜수의 일가족이 날벼락 같은 비극에 오열하고 있을 텐데?
그대로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밤에 산에서 오늘 습득한 스킬들을 테스트하기로 했지만, 의욕이 나지 않는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대충 씻고 나와 등산을 했다. 가장 긴 등반코스를 조깅하듯이 빠른 속도로 올랐다.
체력보정 초급 5레벨로 인체의 한계 수준의 육체를 가진 현재, 이런 운동은 사실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나태해지는 걸 막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정상에 도달하자마자 잠깐 숨을 돌린 뒤 다시 산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등산코스 초입으로 되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멀찍이 주차된 검정색 벤츠 차량에 어제 봤던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뉴스에서 많이 본 낯익은 노인이 나에게 천천히 걸어온다.
노인은 사람 좋은 얼굴로 내게 웃음을 띤다.
“허허, 안녕하신가?”
“…안녕하세요.”
나는 떨떠름하게 화답했다. 너무나 놀란 까닭이었다.
‘정말로 박진성 회장이라니?!’
확실히 어젯밤에 ‘그 새끼가 찾아오라고 해!’라고 외치긴 했지.
그런다고 정말 찾아왔냐?!
박진성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군. 본의는 아니었네.”
“괜찮습니다. 제 태도도 좋지는 않았죠. 워낙 믿을 수 없는 얘기라…….”
“이제는 믿겠나?”
“예.”
박진성 회장 본인이 왔는데 믿지 않을 수가 있나.
“아침 식사는 어떻게 했나?”
“아직…….”
“잘됐군. 같이 가세.”
“예.”
나는 박진성 회장과 함께 벤츠 뒷좌석에 탔다.
부드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차량이 출발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유로운 표정의 박진성 회장을 보며 나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되는 경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