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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이계사냥기 29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0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29화

 

“나 먼저 갈게.”
현지는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에이, 어디 가요. 더 놀다 가요.”
옆자리에 있던 금발로 염색한 남자가 대뜸 현지의 손목을 확 잡아끄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현지는 깔깔 웃으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안 돼요. 가봐야 해요.”
“아, 싫어. 가지 마요.”
남자는 애교를 부리듯이 장난을 치는데, 잡고 있는 현지의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장난인 줄 알고 함께 웃었던 현지의 얼굴에 서서히 당혹이 어렸다.
‘뭐야 이건 또?’
난 남자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분위기 깨서 죄송해요. 집안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네요.”
“에이, 뭔 사정이요.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여동생이 애도 아니고.”
“사정이 있어서요. 현지 데리고 가볼게요. 그 손 놔주세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금발 남자는 현지의 손목을 움켜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손이 안 떨어져요. 이상하네.”
“큭큭큭.”
“아, 병신.”
친구들이 웃긴다고 낄낄거린다. 재미있냐? 이걸 개그라고.
“노, 놓으세요.”
당황한 현지가 뿌리치려고 애썼지만 남자는 놓지 않았다.
분위기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
‘아, 정말인지…….’
박고찬도 그랬지만, 이쯤 되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생겼나?
왜 다들 내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를 거라고 확신하고 마음 놓고 시비를 거는 걸까?
“그러지 말고 형님도 우리랑 같이 한잔하고 놀죠? 짠?”
그러면서 금발 놈이 맥주를 들어 올린다. 그 순간,
콰악!
“컥!”
난 거침없이 손을 뻗어 놈의 모가지를 틀어쥐었다.
“이제 손이 떨어져?”
“컥! 커억!”
“여동생 옆에 앉혀놓고 같이 놀자고? 죽고 싶어?”
그래.
이 새끼가 아주 잘 봤다.
난 거리낌 없이 폭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레드 에이프를 수십 마리씩 죽이고 박고찬의 시체를 매장한 후로, 과거의 나는 이제 없었다.

‘이제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셨나요?’

몰라, 씨발.
그게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이대로 정말 목을 분질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오, 오빠!”
“현지, 너는 나가.”
“으, 응.”
그제야 손이 풀린 현지는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나도 갈래.”
“같이 가.”
현지의 두 친구도 허겁지겁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 손 안 놔!”
금발 놈의 친구 하나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현지와 친구들이 모두 나가자 그제야 나는 녀석의 목을 놓아주었다. 켁켁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금발 놈. 그 두 친구가 험악한 눈길로 날 노려본다.
내가 말했다.
“죄송하게 됐는데, 친구분도 좀 장난이 과하셨어요. 다시 한 번 사과드리고, 재미있게 노세요.”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서 재빨리 룸에서 나왔다.
뭐, 이해는 한다. 비싼 돈 들여서 룸 잡고 노는데, 내가 쳐들어와서 좋은 분위기 파토 냈으니까. 누가 기분이 좋을까.
가뜩이나 오늘 클럽 꼴을 보니 순 남탕이던데. 가끔 보이는 여자들 면면을 봐도 현지와 친구들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래도 여자 친오빠를 앞에 두고 싱글싱글 쪼개며 장난치면 안 되잖아.
현지와 친구들이 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응…….”
나는 풀 죽은 현지를 데리고 클럽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딜 가, 새끼야!”
‘응?’
뒤를 돌아보니 그 금발 놈은 뛰쳐나와 씩씩대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 정말 진상이구나 하고 무시하고 싶은데, 놈의 손에 빈 술병이 들려 있다.
“어딜 그냥 가냐고!”
금발 놈이 술병을 든 채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오, 오빠!”
“어떡해!”
현지와 친구들이 겁에 질렸다.
주위 사람들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이러다 경찰서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금발 놈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다.
내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손끝으로 찔러 놈이 들고 있던 술병을 후려쳤다.
파삭!
놀랍게도 술병이 놈이 쥐고 있던 주둥이만 남겨놓고 모두 깨져 버렸다.
“……?!!”
금발 놈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나, 나도 놀랐다!’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넘쳐서 나도 모르게 시도해 봤다. 왠지 가능할 것 같았는데, 정말 해낸 것이다!
‘특수부대 정예 수준의 육체라더니!’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난 체력보정 초급 4레벨의 힘에 내심 경탄했다.
“왜? 더 볼일 있어?”
내 물음에 금발 놈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싸워서 될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눈치였다.
결국 싸움은 그렇게 일단락되고 우리는 클럽에서 나왔다.
“오빠, 미안해…….”
현지는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소매를 꼭 잡고 있는 행동을 보면 애교는 타고났다.
화낼 기력도 없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됐어. 그놈 말처럼 네가 애도 아니고. 누구랑 뭘 하고 놀든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아니야, 오빠, 진짜 오해하지 마. 여기서 놀면서 한 번도 이런 일 없었단 말이야.”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는 현지에게 친구들도 한마디씩 동조했다.
“맞아요. 원래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다들 매너 좋아요.”
“하도 끈질겨서 한 번 얘기만 나눠본 것뿐인데…….”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건 됐고, 전화는 왜 꺼놨냐.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하잖아. 좀 늦는다고 말이라도 해주든가.”
“히잉, 놀다가 들어간다고 하면 언니가 허락 안 해준단 말이야.”
“누나 허락이 왜 필요해? 네가 언제부터 말 잘 들었다고.”
“나 요즘 언니한테 용돈 받아 써…….”
“엥?”
“엄마는 이제 노후 대비해야 한다고 언니가 내 뒷바라지 책임지겠대. 내가 들고 다니는 신용카드 언니 꺼야.”
“아…….”
대충 알 것 같다.
우리 고삐 풀린 망아지 현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누나였다. 그래서 누나가 엄마한테서 고삐를 건네받아 직접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휴, 이 사백아.”
“사백이가 뭐야?”
“네 토익 점수다, 이것아.”
현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친구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씨, 뭐야! 쪽팔리게!”
“쪽팔린 걸 알긴 아니?”
“그러는 지는 토익 점수 얼마나 나왔다고!”
“…650.”
“하이고, 높기도 해라! 존경스럽다! 비결이 뭐예요? 대기업 스펙이네!”
“400보단 낫지! 말이 토익 400이지, 인사담당자한테 시비 거냐? 면접관 어그로 끌려고 작정했어?”
현지와 나의 투덕거리는 다툼에 친구들은 연신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싸움으로 인한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분위기가 전환되자 친구들 중 긴 생머리에 쌍까풀이 인상적인 귀여운 여자가 물었다.
“그런데 오빠, 무술 하셨어요?”
“아, 맞아! 나도 대박 놀랐는데. 오빠, 그거 술병 깬 거 어떻게 한 거야?”
현지도 손뼉을 치며 물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무술은 아니고 그냥 운동 좀 했어. 알잖아. 요즘 운동 진짜 열심히 한 거.”
“만날 등산 다니고 한 건 봤는데, 그러고 보니 몸도 묘하게 확 좋아졌네?”
현지는 내 어깨와 가슴을 툭툭 치며 신기해했다.
“얼마 전까진 안 이랬잖아. 원래 운동이 이렇게 빨리 효과가 나타나나?”
“달리 할 일이 없었잖아. 종일 운동만 했지 뭐. 술병 깬 건 나도 놀랬다. 그냥 우연이야.”
“운동 정말 많이 하셨나 봐. 오빠, 복근 보여주세요, 복근!”
커헉.
긴 생머리 쌍꺼풀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아, 안 돼요. 복근 그런 거 없어요.”
“응? 아닌데. 복근 있는데? 언제부터 이랬어?”
현지가 내 배를 툭툭 친다. 육식녀들 사이에 둘러싸인 한 마리 양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얘들 무서워!
“히히, 아무튼 오빠 다시 봤다.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 알고 보니까 되게 용감하네.”
현지는 나에게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그런 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야, 그렇게 아부 떨어도 넌 오늘 끝장이야. 누나가 잔뜩 벼르고 있어.”
내가 네 속을 모르겠니?
“히이잉! 오빠, 그러지 말고 비밀로 해줘. 나 그냥 친구들이랑 카페에서 얘기하고 놀고 있었다고 말해줘, 응?”
“술 냄새 풀풀 풍기며 그런 말이 잘도 통하겠다.”
“민정! 향수!”
현지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민정이라 불린 쌍꺼풀녀가 가방에서 신속하게 향수를 꺼내 칙칙 뿌려주었다. 재스민 향이 코를 강하게 자극한다.
향수 앞에서 빙글빙글 돈 현지가 쨘하고 양팔을 벌렸다.
“어때? 이제 안 나지?”
“향수냄새가 더 수상하다.”
“아, 뭐야!”
“그냥 포기하렴. 누나한텐 아무것도 안 통해. 그러게 누가 폰 꺼놓으래?”
“바쁜데 자꾸 전화하잖아. 음악 때문에 들킬까 봐 그냥 배터리 나갔다고 뻥치려 했는데. 힝, 난 죽었다.”
그런데 그때, 쌍꺼풀녀가 대뜸 나에게 얼굴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오빠, 그럼 저랑 폰 번호 교환해요.”
“예?”
이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다음에 또 현지가 폰 꺼놓고 잠수타면 저한테 연락하시면 되잖아요. 우리 항상 같이 놀거든요.”
“아, 그럴까요? 그럼 감사하죠.”
난 스마트폰을 쌍꺼풀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내 스마트폰을 빠르게 터치하며 자기 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를 빤히 지켜보던 현지가 인상을 쓰는 것이었다.
“어이! 거기 요망한 년, 스톱.”
“왜?”
“엇다 대고 작업질이야 작업질은. 쉿, 쉿! 울 오빠한테서 안 떨어져?”
“치, 내가 뭘?”
쌍꺼풀녀는 전화까지 걸어서 자기 폰에 내 번호가 입력되게 했다. 현지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정말 꿋꿋하다.
다시 스마트폰을 건네받아 확인해 보니, 친구 이름은 ‘유민정^^*’이라고 등록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이모티콘까지, 엄청난 손놀림이다. 내공이 대단하구나.
근데 나 작업 걸린 건가?
묘한 상황이 만들어질 때였다.
“근데 집에 어떻게 가지? 차 다 끊겼는데.”
다른 친구 하나가 의문을 제기했다.
“아, 맞다. 우린 걸어가면 되는데 너희는 어떡해?”
현지도 걱정했다.
민정은 한숨을 쉬었다.
“원래 클럽에서 날밤 까고 첫차로 돌아가려 했는데.”
“난 가볼게. 너희끼리 더 놀든가.”
이에 친구들은 질색을 했다.
“싫어. 이제 클럽은 가고 싶지도 않아.”
“그 사람들 또 만나면 어떡해. 그냥 택시 타고 가야지 뭐.”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잘 놀고 있었을 테니까. 물론 여동생이 그 싸가지 없는 금발 새끼한테 픽업당하는 꼴은 절대 못 보지만!
“제 탓이니까 제가 택시비를 드릴게요.”
“어? 아니에요.”
“괜찮은데…….”
그런데 지갑을 꺼내 열어본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디로 간 거냐? 만 원짜리 지폐 네 장.
‘헉! 맞다! 강천성!’
그제야 나는 가지고 있던 현금을 어제 강천성에게 전부 털어준 것을 떠올렸다.
당황해서 석상처럼 굳어버린 나에게 현지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은근히 묻는다.
“이보세요?”
“…….”
“혹시 막상 지갑 열어보니 돈이 없으신 건 아니죠, 백수 오빠?”
“…….”
“아, 대박 쪽팔려!”
현지가 자지러져라 웃었다. 친구들도 입을 가리고 따라 웃는다.
요절복통 난리도 아닌 세 육식녀 사이에서 나는 화끈거려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게 아닌데. 이런 게 아닌데! 좀 더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결국 친구들은 자기 돈으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나는 계속 깔깔대며 놀리는 현지와 함께 귀가했다.
하지만 현지는 누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음 달부터 카드 한도 30만 원으로 낮출 거야.”
“히잉!”
“토익 800 이상 맞을 때까지야.”
그건 현지 머리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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