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24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24화
남은 제한시간은 평탄하게 흘렀다. 우리는 목숨을 위협받는 위기 없이 순탄하게 시간을 보냈다.
가장 큰 위기라고 해봐야 비가 온 정도였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전에 있었던 협곡의 동굴로 피신을 가야 했으니까. 다행히 그 인근에 수백 마리씩 진을 치고 있었던 레드 에이프는 모두 떠나고 없었다.
박고찬이 없어지니 그야말로 평화였다.
혜수는 준호와도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서 우리 셋은 허물없이 친해졌다. 폐쇄적인 강천성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혜수는 변했다. 뭐든지 열심히 했다.
내가 토끼를 잡아오자 그녀가 나에게 배워가며 손질할 정도였다. 발목을 자르고 가죽을 뒤집어 벗기는 일을 혜수는 눈 딱 감고 해냈다.
뿐만 아니라 요리도 도맡아 하고 땔감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산딸기를 발견해서 잔뜩 따오기도 했다.
탈 없이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자 강천성은 무술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준호는 운동을 시작했고, 혜수는 계속 과일 같은 먹을 것을 찾아 숲을 돌아다녔다.
나는 이번 시험에서 터득한 실프 이용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첫째, 원거리 대화.
실프로 하여금 말을 전달하게 하여 900미터 이내에서는 대화가 가능해졌다. 한 사람에게만 들리게 할 수도 있었다.
둘째, 소리차단.
소리를 차단하여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기술이었다. 이걸로 밤에 레드 에이프 무리 속에 침투해 우두머리를 암살할 수 있었다.
셋째, 냄새차단.
공기 중에 전달되는 내 체취를 없애는 방법이었다. 소리차단과 냄새차단을 함께 써서 산토끼를 맨손으로 잡는데 성공했을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넷째, 산소집중.
산소를 집중시켜서 불을 쉽게 지피는 방법인데, 이걸 응용하면 폭발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전투에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산소를 집중시킨 후에 횃불을 던진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다섯째, 바람의 칼날.
가까이 접근한 다수의 적을 처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격수단이었다. 이걸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겼다. 높은 살상력만큼 힘의 소모도 크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써먹어야 한다.
‘정말 실프 덕분에 내가 사는구나.’
실프의 엄청난 활용도!
난 메인스킬로 정령술을 택한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했다.
오러 컨트롤은 강천성처럼 무술에 능한 사람에게나 효과가 있지,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당장 큰 힘이 못 됐을 터였다.
그렇게 남은 제한시간을 모두 보내고 나니, 동굴 앞에 시험의 문이 나타났다.
“와, 드디어 끝났다.”
준호가 감격한 얼굴이었다.
“가면 목욕부터 할래.”
이건 혜수의 말.
하긴, 이곳에 있는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지. 속옷과 양말도 갈아입지 못했으니 여간 찜찜한 게 아닐 것이다.
“가자.”
내가 먼저 앞장서서 시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뿌우- 뿌우- 뿌우우-
“와우, 축하해요!”
또 시작이군.
이 번데기 자식이 나팔을 불어대며 이리저리 정신 사납게 날아다녔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장난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아기 천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개고생을 하고 돌아와 저 주접을 보면 자연히 화가 치미는 것이었다.
“다들 저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보시네요. 그렇게 제가 보고 싶었어요?”
아기 천사는 분노에 휘발유를 끼얹는 재주가 있었다.
“이 자식아, 그만하고 얼른 평가나 해.”
내 말에 아기 천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평가는 끝났는데요? 석판을 확인하세요.”
“석판 소환.”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5
-카르마(Karma): +900
-시험(Mission): 제한시간까지 생존하라(달성)
-제한시간(Time limit): -
5클래스, 900카르마.
이게 좋은 성적인가?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받았을까?
“좋은 성적이고말고요.”
아기 천사가 불쑥 눈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그 바람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친 나는 이를 갈았다.
“내 생각을 멋대로 읽고 불쑥불쑥 끼어들지 말래?”
그러나 아기 천사는 내 말을 깨끗이 씹고 말을 돌렸다.
“시험자 김현호는 또다시 기록을 세우셨네요. 두 번째 시험에서 역대 시험자 가운데 최고의 성적을 올리셨어요.”
“역대 최고 성적? 내가?”
“네, 두 번째 시험에서 900카르마나 획득한 시험자는 여태껏 없었어요.”
“900?!”
“우, 우와!”
다들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기 천사는 박수치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머지 세 분의 성적을 합친 것만큼의 카르마를 획득해 버리셨네요.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 제가 말씀드렸었죠? 시험자 김현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
“이번 시험에서 당신의 활약을 보세요. 야밤에 혼자 침투해서 레드 에이프 로드를 암살하고, 장기적으로 팀의 방해가 될 불순인자를 일찌감치 제거하셨잖아요.”
불순인자.
그게 박고찬을 일컫는 단어였다.
“매 순간순간의 판단과 실행이 아주 과감하고 냉정했어요. 어떤 평범한 사람이 시험자 김현호처럼 할 수 있을까요? 이제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셨나요?”
“…….”
나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확실히 나는 박고찬을 죽여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혜수를 강간하려 한 일이 좋은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살인이라는 문턱을 넘을 수 있는 확실한 계기…….
어쩌면 아기 천사의 말대로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닌지도 몰랐다. 나 스스로는 평범하고 나약하고 약간은 한심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말이다.
“자자, 그럼 다른 분들도 한 번 평가해 볼까요? 시험자 강천성, 시험자 이준호, 시험자 이혜수가 각각 400, 300, 200카르마를 획득하셨네요.”
정말 세 사람이 합쳐서 내 성적이로군. 그런데 생각 외로 강천성의 성적이 낮았다. 왜일까?
“자기가 가진 힘을 얼마나 활용했는가, 시험의 클리어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성적은 이 두 가지를 평가하죠. 그런 면에서 시험자 강천성.”
아기 천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강천성에게 다가갔다.
“성적이 생각보다 낮아서 의문이시죠?”
“그렇다.”
“확실히 당신의 활약상은 일행을 고비에서 넘기는 데 크게 일조했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시험을 클리어 하는 데 방해요인이 되기도 했어요.”
“방해?”
강천성의 미간이 꿈틀했다.
“당신은 어째서 시험자 박고찬의 행동을 가만히 내버려 뒀죠? 당신의 한 마디면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나요?”
“…….”
“물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감점 요인이 되진 않아요. 하지만 시험자 강천성은 확실하게 동료 간의 관계 정립에서 큰 방해가 되었어요.”
의아한 얼굴을 띠는 강천성에게 아기 천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당신은 시험자 박고찬을 제압했지만 그 뒤로 방관적인 태도로 서열 정립이 안 된 어정쩡한 관계를 야기해 시험자 박고찬이 지속적으로 갈등 요인이 되게 했어요.”
“무슨 뜻이냐?”
“당신이 없었다면 질서가 일찌감치 확립됐을 거란 뜻이에요. 시험자 김현호가 소총과 정령으로 목숨을 위협해 다시는 깐죽거리지 못하게 했을 테니까요. 그럼 죽여야 하는 상황까지 나오지도 않았겠죠.”
“…….”
“자, 더 궁금한 건 없나요? 없으면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잠깐만!”
손들고 나선 것은 혜수였다.
“뭐예요? 귀찮게.”
“귀, 귀찮다니…….”
혜수는 상처 받은 얼굴이 되었다.
“빨랑빨랑 끝낼게요. 왜 한 것도 없었는데 200카르마나 받았냐고요? 자기가 가진 힘을 얼마나 활용했는가가 평가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시험자 이혜수는 애당초 가진 힘이 쥐뿔도 없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노력을 많이 했거든요. 이제 됐나요?”
“아…….”
그럼 원래의 -50을 메꾸고도 150카르마가 남는구나. 정말 다행이다. 역시 노력한 보람이 있었어.
혜수의 일이 내 일처럼 기뻤다.
“자, 그럼 집에 가세요들.”
아기 천사는 가게 문 닫는 불량한 알바생처럼 우리를 쫓아내듯이 시험의 문을 만들었다.
모두들 나가려는 때에 내가 급히 소리쳤다.
“잠깐! 잠깐만요!”
세 사람은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가기 전에 연락처를 주고받아요. 아니, 내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 줄 테니 외워놓고 꼭 연락하세요. 휴식기간 동안 만나서 다음 시험에 대해 상의해야 하잖아요.”
“아, 그렇지.”
“미처 생각 못했어요.”
준호와 혜수가 수긍했다.
“아아, 깜빡한 줄 알고 속으로 낄낄댔는데 아쉽네요.”
저 자식이!
나는 아기 천사를 보며 이를 갈았다.
내 핸드폰 번호를 세 사람이 외우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현실세계로 돌아갔다.
***
“아들…….”
눈을 떠보니, 닭강정을 잘 볶을 것 같은 아줌마가 날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엄마.”
“지금이 11시인데 여태 자?”
“…원래 똑똑한 사람이 잠이 많잖아.”
“나폴레옹을 본받아 아들.”
“그 사람은 키가 루저잖아. 난 아인슈타인 타입이야. 하루에 10시간은 자야지.”
“아들. 아무리 이번 달은 쉬게 놔둔다고 했지만, 그래도 너무 백수의 향기가 풀풀 난다. 좀 열심히 살아, 응?”
“알았어, 엄마. 그렇지 않아도 내가 닭장사의 샛별이 되기 위해 매일 열심히 운동한다고?”
“으이그, 말은 잘해. 엄마 은행 들렀다가 가게 갈게.”
“네, 다녀오셈.”
그렇게 엄마가 나가니 집은 텅 비었다.
부엌에 가보니 냉장고에 물과 온갖 찬거리가 있었고, 선반에 라면도 쌓여 있었다. 계란도 있고 김치냉장고에 김치와 맥주가 한가득…….
“정말 돌아왔구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니.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감동이었다.
“아, 엄마 땡큐, 먹여주고 키워줘서 감사감사. 먹고산다는 게 알고 보니 굉장히 힘들더라고.”
라면에 계란을 풀어서 끓이고 밥까지 말아서 뚝딱 해치웠다.
배부르게 먹고 맥주까지 한 캔 해치울 무렵, 내 스마트폰이 윙윙대며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현호 오빠 맞죠? 저 혜수예요.^^]
혜수가 곧바로 연락을 해왔구나. 어쩜 웃는 이모티콘도 저렇게 귀여울까.
[일어났어? 난 지금 라면에 밥 말아 먹고 맥주 마시며 감동 중ㅠㅠ]
[ㅎㅎㅎ맛있겠다! 그럼 전 비빔밥! 고추장 팍팍 풀 거예요]
[맛있게 먹어^^ 아, 그리고 카르마는 쓰지 말고 일단 놔둬봐. 나중에 같이 상의해서 계획적으로 쓰자]
[네^^ 참 준호 연락처 알게 되면 가르쳐 주세요]
[ㅇㅇ]
나는 혜수의 연락처를 저장했다. 주소록에 ‘혜수♡’라고 저장한 뒤, 단축번호 1번으로 지정했다. 뭐 어때? 내 핸드폰을 누가 본다고.
식사를 마치고 나는 고물 노트북을 열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다음 시험에 대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아, 깜빡했네. 휴식시간이 며칠이지?’
나는 석판을 소환했다.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5
-카르마(Karma): +900
-시험(Mission): 다음 시험까지 휴식을 취하라.
-제한시간(Time limit): 15일
-카르마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보상을 받으려면 석판을 소환한 채 ‘카르마 보상’이라고 말씀하세요.
보름.
전보다 휴식시간이 더 길어졌다.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다소 든든해진다.
‘이 시간을 아주 잘 써야 해. 이것만 하고 등산하러 가야겠다.’
등산과 팔굽혀펴기는 매일 꾸준히 하기로 했다.
두 번째 시험 때도 전에 열흘간 운동한 게 큰 도움이 됐다. 등산 덕에 산 지형에 쉽게 적응했고, 몸이 힘든 것을 참는 데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인터넷에 접속한 나는 온갖 커뮤니티 사이트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