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23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23화
“형!”
준호가 나를 보더니 매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강천성도 깨어 있었다. 아마도 총성 때문에 자다가 깬 모양이었다.
내 뒤를 따라온 이혜수를 보자 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도 비로소 이혜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닥불의 불빛으로 볼 수 있었다.
‘이런 제기랄.’
안타까울 정도로 퉁퉁 부어 있는 얼굴. 박고찬에게 가차 없이 두들겨 맞은 것이었다. 그 개자식 같으니!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내가 말했다.
“오는 길에 레드 에이프의 습격이 있었어. 다행히 처치하긴 했는데, 박고찬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어.”
“…….”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형편없이 얻어맞은 이혜수, 총성, 박고찬의 죽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준호도 강천성도 모르지 않았다.
“그보다 좀 쉬자. 식사는 했고?”
“아, 아뇨. 아, 아직 못했어요.”
준호는 어색하게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나는 반쯤 먹다가 조각내서 주머니에 넣어둔 토끼구이를 꺼냈다.
“일단 이거 먹어. 내일 제대로 사냥해서 식사하자.”
“우와, 감사합니다.”
“혜수 씨도 이리 앉아서 드세요.”
“네…….”
이혜수는 내 곁에 앉아서 토끼구이 한 조각을 받아 들었다.
“받아요.”
난 강천성에게도 한 조각을 던졌다. 그것을 건네받은 강천성이 나에게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우두머리를 죽이는 데 성공했어요. 그 후로 오늘 하루 동안 쫓아오는 놈들이 없는 걸 보니, 이제 레드 에이프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강천성은 묵묵히 토끼구이를 먹기 시작했다.
“우와, 형 진짜 대단해요!”
“내가 뭐 대단하냐. 실프 덕분이지.”
“그래도요. 어떻게 혼자 쳐들어가서 두목을 죽이고 나올 생각을 해요? 진짜 대단해요. 시험 끝나면 형 카르마 진짜 많이 받겠네요.”
“그래, 고맙다. 아무튼 내일 날 밝으면 안전한 곳을 찾아서 남은 시간 동안 마음 편히 지내자.”
“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잠을 자게 되었다.
“제가 불침번 볼게요. 잠이 안 와서요. 다들 주무세요.”
“형이 제일 피곤하실 텐데.”
“괜찮아. 잠이 안 와서 그래.”
“그럼 먼저 잘게요. 졸리시면 언제든 깨워주세요.”
“오냐.”
모두들 잠을 청하고, 나는 홀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죽었겠지.’
죽은 것은 확실하다. 목에서 피를 뿜으며 고꾸라지는 모습을 봤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고찬이 아직도 살아서 피를 꾸역꾸역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박고찬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혜수를 데리고 빙 돌아와 이곳에 돌아왔을 뿐이다.
…내가 사람은 죽인 것이다.
내가 죽인 사람의 시체는 아직 저곳에 있을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저렇게 방치될 테지. 그러다가 레드 에이프나 다른 산짐승이 먹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박고찬이라는 한 사람의 생애는 끝나버렸다. 이 손에 의하여.
나는 내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겼던 검지의 감촉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그 감촉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졌다.
난 잘못하지 않았는데.
죽어 마땅한 놈이었는데. 살려뒀으면 나중에 내가 방심한 틈에 보복을 할지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공사구분이 뚜렷한 인간이었으면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시험에서 동료를 강간하려 들지도 않았겠지.
그놈은 평생 그랬듯 자기 멋대로 생각 없이 사는 인간이다. 앞으로의 시험을 위해서라도 그를 살려두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래, 난 잘못이 없어.’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은 그렇지 않았다.
내 위협에 두려워하는 박고찬의 떨리는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랬다.
그런 인간쓰레기라도, 죽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살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을 나는 가차 없이 숨통을 끊은 것이다. 이 검지로 방아쇠를 당겨서…….
꽉 주먹을 쥐었다.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다.
“괜찮아요?”
이혜수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잡념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
모닥불의 불빛으로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비춰졌다. 가슴이 아팠다. 여자를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리다니. 그놈은 사람 새끼가 아니다. 죽이길 잘했어. 난 이 여자를 살려준 거야.
“정말 고마워요.”
“뭘요.”
“그리고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저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러지 못했을 뿐이죠. 혜수 씨 덕분에 용기를 낸 거예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으니 이상하게 떨림이 멎어들었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손을 잡은 채로. 손을 통해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는 그 조용한 시간이 이상할 정도로 기분 좋았다. 얼어붙었던 눈이 녹는 것처럼, 가슴이 따스해진다.
“우리, 가볼래요?”
“어디를요?”
“그 사람한테요.”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시체… 를 봐서 좋을 것 없잖아요.”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그 시체를 보지 못하고 이대로 넘어가는 게 더 안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정말 죽은 걸까, 시체는 어떻게 된 걸까, 혹시 살아서 우리를 노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아요. 현호 씨도 그렇죠?”
“…네.”
“그러니까 같이 가 봐요. 죽은 것을 확인하고 제대로 매장도 해줘요. 혼자서는 무서운데, 현호 씨랑 같이 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대로라면 평생 박고찬을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좋을 듯싶었다.
“네, 가요. 근데 뭐로 땅을 파야 할까요?”
“글쎄요. 이, 이걸로는 안 될까요?”
그녀는 장검을 보여주었다. 박고찬의 장검이었다.
“주인이 죽었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네요.”
“그러게요.”
“한번 무장해제라고 말씀해 보실래요?”
“무장해제?”
그러자,
팟!
하고 장검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도 나도 깜짝 놀랐다.
“사, 사라졌네요?”
“이번에는 ‘무장’이라고 말해보세요.”
“무장.”
그러자 장검은 그녀의 오른손에 나타났다. 이혜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이게 왜 제 말을 따르는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체…….”
순간,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차렸다.
‘무기를 혜수 씨에게 넘기고 물러나.’
바로 그거다! 그때 박고찬이 이혜수에게 장검을 건넸고, 그게 소유권 이전으로 적용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혜수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그럼 이건 이제 제 것이에요?”
“예, 무기가 아무것도 없으셨는데 잘됐네요.”
“제가 이걸 쓸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너무 무거워서요. 그냥 현호 씨나 준호 씨가 쓰는 편이…….”
“그래도 일단 갖고 계세요. 지금은 무거워서 다루기 힘들어도, 나중에 체력보정을 익히면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박고찬이 죽은 곳으로 갔다.
죽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피가 흠뻑 물든 땅 위에 힘없이 쓰러진 모습. 놀란 얼굴 표정과 목에 뚫려 있는 붉은 구멍.
시체를 볼 자신이 없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생각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혜수 씨 제안대로 오길 잘했어.’
보지 않고 피했으면, 더 무서운 기억으로 평생 남았을 지도 모른다.
“시작하죠. 제가 먼저 할게요.”
“네.”
나는 그녀에게 장검을 건네받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푹푹 땅에 박아 넣고 흙을 퍼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혜수와 교대로 번갈아가며 일하니, 조금씩 해가 떠오르려는 이른 아침이 되어서 큰 구덩이가 파여졌다. 그 안에 박고찬을 밀어 넣고 매장을 했다.
실프를 시켜서 굵직한 나뭇가지를 깎아 목패를 만들었다. 음각으로 ‘박고찬’이라고 새겨서 무덤 위에 꽂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음 생은 착하게 사세요.”
난 그렇게 말하며 간단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좀 건방졌을까? 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자업자득 아닌가.
이혜수도 가만히 눈을 감고 묵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묵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이제 됐어요.”
눈을 뜬 그녀가 빙긋 웃었다. 퍼렇게 부어 있는 얼굴인데도, 그녀의 미소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모닥불로 돌아갔다. 옆에 붙어 앉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역시나 그녀는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평탄하게 자란 모범생 아가씨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우리 가족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어 했다. 시집 못간 독설가 누나와 놀기 좋아하는 말썽쟁이 여동생, 애교와 아들에 대한 집착이 지대한 엄마까지. 이야깃거리가 계속 나왔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가 말했다.
“저기, 실은 고백할 게 있어요.”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그게, 제가 거짓말을 한 게 있어요.”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체력보정 초급 1레벨이라고 했던 것 말이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놀란 그녀에게 내가 답했다.
“저보다도 체력이 약하신데 당연히 알 수밖에 없죠.”
“죄, 죄송해요. 혼자만 아무 힘도 없다고 하면 쓸모없는 짐이라고 여길까 봐… 이미 그렇게 됐지만요. 모두에게 폐만 끼치고요.”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제가 도와드린 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투자요?”
“네, 지금은 약해도 카르마 보상을 받아서 스킬을 익혀나가면 제몫을 하실 수 있게 될 거예요. 음, 그러니까 지금은 수습사원이라고 생각하세요.”
“고마워요.”
“그런데 첫 시험에서 몇 카르마를 받으신 거예요? 스킬은커녕 무기도 없이 오셨으니까 좀 이상하더라고요.”
“실은…….”
우물쭈물하다가 이혜수가 말했다.
“-50이요.”
“…네?”
“-50이요.”
“마이너스라면…….”
“전 첫 시험을 성공하지 못했어요.”
경악한 나에게 이혜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간단히 설명해서, 그녀는 레드 에이프를 처치하지 못했지만 살해당하지도 않았다. 저항하고 달아나고 몸부림치다가 간신히 30분이 초과된 후에 생긴 시험의 문을 열고 달아났다고 한다.
“시험에 실패한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었군요.”
“네, 하지만 이 마이너스가 어떻게 작용할지 몰라서 내내 두려웠어요.”
“염려 마세요. 이번 시험에서 마이너스를 메꿀 수 있을 거예요.”
“전 이번에도 한 게 없는걸요. 이대로 계속 강해지지 못하고 짐이 되면 어쩌죠?”
나는 불안해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보기에 시험은 싸움이 전부가 아니에요. 다른 부분에서 혜수 씨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분명히 있어요. 그 부분을 찾아내서 어떻게든 스킬을 익힐 만큼의 카르마를 확보하면 되요. 그때까지는 제가 지켜드릴게요.”
“현호 씨…….”
그녀는 감격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저 어떡해요. 내내 현호 씨한테 도움만 받고…….”
“그럼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네, 뭐든지요.”
‘뭐든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야한 생각이 스쳤다. 나란 놈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오빠라고 불러주세요. 계속 현호 씨, 현호 씨 하시니까 좀 오글거리네요.”
이혜수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요. 대신 현호 씨, 아니, 현호 오빠도 말씀을 편히 해주세요.”
“그래요. 아니, 그러자.”
우리는 서로를 보며 쑥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