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21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21화
우두머리를 잃었으니 레드 에이프는 아마도 물러나지 않을까 싶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무리를 지으면 권력을 다투는데,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새로운 지배자를 우선 뽑을 거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방심할 수 없었다.
‘무리 중에 2인자가 있었다면 혼란을 빨리 수습할 수도 있어. 곧장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어서 우리를 추격할 수도 있지.’
서열 다툼이 아니라 얼떨결에 우두머리가 된 2인자는 자신의 힘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냥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이제 일행과 합류할 일만 남았다.
‘아참. 그러고 보니 지금쯤 다들 도망쳤겠네?’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달아나라고 일러뒀다.
그때는 여자 앞이라서 그런지 다이하드 주인공 같은 영웅적인 심정으로 당부한 허세였지만 말이지. 이제 와서는 후회막급이다. 그냥 기다려 달라고 할걸!
휴식을 마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움직였다.
5분마다 한 번씩 실프를 소환해서 길잡이와 정찰을 맡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신중하게 움직인 끝에 폭포가 흐르는 협곡에 도착했다.
“실프, 사람들은?”
-냥.
실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디로 갔는지 발자국 같은 걸 찾아보자.”
내 지시에 빠르게 날아간 실프는 곧장 되돌아와 앙증맞은 앞발로 떡하니 왼쪽 방면을 가리켰다.
“오케이.”
이쪽은 실프가 있으니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들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다시 날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내심 우두머리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 내 업적을 자랑하고픈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이걸 계기로 잘만 하면 이혜수와 썸을 탈 수도 있고 말이지. 간밤의 분위기도 괜찮았잖아? 헤헤.
나는 유쾌 상쾌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혜수의 불길한 예감은 옳았다.
리더가 된 양 앞장선 박고찬은 슬슬 제멋대로인 성질을 대놓고 부리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좀 쫓아오지 못해! 소풍 가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계집년들은!”
난폭한 욕설에 이혜수는 한 마디 대꾸도 못해보고 열심히 걸음만 옮겼다.
어제 무리한 후유증으로 발에 물집이 잡혔다. 시험에 대비해서 챙겨 신은 러닝화는 숲이나 산처럼 험한 지형에서는 도리어 발이 더 불편했다.
‘현호 씨는 트레킹화를 신고 있었지. 이래서였구나.’
철두철미한 남자였다. 꼼꼼하고 세심하기까지 했다.
그는 박고찬처럼 제멋대로 성큼성큼 걷지 않았다. 뒤따르는 그녀의 걸음걸이를 고려하여 속도를 잘 조절해 주었다. 그녀가 지쳤을 때쯤, 쉬었다 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땐 몰랐다.
이제야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고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의 안위만 걱정했던 그녀였다. 김현호가 죽으면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없다고, 그것만을 걱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김현호라는 남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취업전선에서 도망친 채 서른이 다 되도록 백수로 살았다며, 그런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남자였다.
이혜수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남자였다. 그 또한 처음부터 강인한 남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폭력에도 익숙하지 않고, 겁이 많은 평범한 사람이었으리라.
매 순간 순간마다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도 참고 이겨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날 배려해 준 거였어.’
정말 좋은 남자였다.
그 사실을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었다.
“악!”
물집이 터져 이물감과 함께 따끔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혜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뭐야?”
박고찬의 짜증 섞인 음성. 이혜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흐흑……!”
“저, 괜찮으세요?”
준호가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이혜수는 러닝화를 벗었다. 준호가 기함을 했다. 양말이 피로 흠뻑 물들어 있었다.
“아 씨발년, 진짜 가지가지 하네.”
순간 이혜수는 울컥했다.
그녀는 그런 욕설을 들어 마땅할 정도로 잘못을 한 적이 없었다. 왜 자신이 저런 인간에게 폭언을 듣는 게 당연한 것처럼 되었는지,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겁나는 거 알아요. 저도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래도 조금만 더 힘내서 그 선을 넘으세요.’
순간 떠오르는 김현호의 한 마디.
‘너 같은 놈은 내게 그럴 자격 없어! 마치 자기 덕분에 내가 살아 있다는 듯이 말하지 말란 말이야!’
부글부글 끓는 분노가 그녀를 용기로 이끌었다.
“…그냥 가세요.”
“뭐?”
“저 놔두고 그냥 가시라고요. 그럼 되잖아요.”
“진짜 버리고 갈까? 원숭이 밥 되고 싶냐, 앙?!”
“살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가라고!!”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악에 찬 그녀의 고함. 그 바람에 움찔 놀란 박고찬은 얼굴에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혜수는 도끼눈을 치켜뜨고 박고찬을 노려봤다.
“현호 씨 같은 좋은 사람도 죽었어! 내가 왜 굳이 이런 꼴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착하고, 살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도 죽었는데 왜 내가!”
“이, 이게 지금 뭐래?”
말을 더듬거리는 박고찬.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은 이상, 그녀는 박고찬에게 약자일 이유가 없었다.
쌓이고 쌓였던 분노는 계속해서 표출되었다.
“그리고 너! 내가 그 뻔한 속내를 모를 줄 알았어? 그렇게 계속 욕하고 겁박하면서 괴롭히다가, 나중에 좋은 말로 살살 구슬리면 내가 넘어갈 줄 알았나 보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넌 아냐, 개새끼야!”
“이, 이 씨발년이 근데!”
박고찬이 장검을 소환해 오른손에 무장했다. 그럼에도 한 번 폭발한 이혜수는 전혀 겁내지 않았다.
“어, 죽여 봐. 나 강간하고 죽이고 싶지? 대가리에 든 게 그거뿐이잖아! 근데 그거 알아? 같은 시험자한테 그딴 짓 하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뭐, 뭐?”
의외의 지적에 박고찬은 당황했다.
“넌 주둥이만 사납지 나만큼이나 보탬이 안 되는 놈이야. 오히려 방해만 했지! 내 생각에 넌 보상은커녕 패널티를 받을 것 같거든? 한 번 죽여 봐! 그러고도 네가 무사하나 보자고! 죽여 봐!”
“이, 이 씨발!”
짜악!
“악!”
박고찬이 뺨을 후려치자 그녀는 털썩 넘어졌다.
하지만 얼굴색이 좋지 않은 쪽은 박고찬이었다.
‘페널티?’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사실 김현호와 강천성 외에는 별반 도움 된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이준호는 협조성이라도 있었다. 박고찬 자신은 문제만 일으켰다. 그건 스스로가 알았다.
싸울 때도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 큰 역할을 못했다. 종합적으로는 이혜수보다도 보탬이 안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요리와 잡일이라도 했으니 말이다.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천사가 시험을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뺨을 맞고 쓰러진 이혜수는 실성한 듯 킥킥거렸다.
“천사도 있는데, 천국과 지옥도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어디로 갈지는 뻔하니까.”
‘지옥’이란 말이 더욱 박고찬을 심장을 떨리게 했다.
“난 안 가. 여기서 지옥 같은 꼴을 보느니, 죽어서 천국에 갈래. 적어도 난 착하게 살았으니까!”
모든 감정을 토해낸 이혜수는 나무에 등을 기댔다.
박고찬도 어찌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고, 이준호 역시 두 사람의 눈치만 보았다.
그런데 그때,
“여기서 쉬지.”
입을 연 것은 강천성이었다.
여전히 아무 감흥도 없는 무표정을 띤 채 그가 계속 말했다.
“안 쫓아오는군.”
“어, 그러고 보니…….”
준호도 그제야 아까부터 레드 에이프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숲에서는 레드 에이프 쪽이 그들보다 훨씬 빠른데 말이다.
강천성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이준호도 눈치를 보다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쉬었다.
결국 그날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죠?”
이준호가 제기한 의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글이글.
나의 토끼구이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지고 있었다.
소금이라도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이걸 나 혼자 먹으려니까 이런 호사가 없다.
‘지금쯤 다들 쫄쫄 굶고 있으려나?’
설마. 그래도 과일이라도 찾았거나, 하다못해 시냇물에서 물고기라도 잡아서 먹었겠지. 넷씩이나 있는데 나 없다고 쫄쫄 굶겠나?
본래는 저녁이 되기 전에는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두머리를 암살하고 도주하느라 체력을 많이 허비한 탓에 내 걸음걸이는 많이 느려졌고, 결국은 혼자 야영을 해야 했다.
‘이혜수는 괜찮을까?’
내가 없으니 아마 일행은 박고찬이 앞장서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준호는 원채 소극적이고, 강천성은 이상할 정도로 폐쇄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대장이라도 된 양 앞장서서 걸으면서 이혜수를 구박하는 박고찬의 태도가 쉽게 상상된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테니 더욱 기가 살았을 텐데.’
간밤에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 후로 이혜수에 대한 내 감정은 단순한 호감에서 좀 더 발전한 상태였다.
혼자 있어서 외로운 걸까?
홀로 모닥불에 앉아 있으려니 자꾸만 그녀가 생각났다.
지금 내 옆에 그녀가 앉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둘이 불을 쬐며 함께 힘을 합쳐 살아남자고 약속하는, 그런 망상이 떠오른다.
‘안 되겠다.’
나는 반쯤 먹고 남은 토끼구이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닥불을 꺼버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식사는 고사하고 모닥불도 간신히 피웠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몇 시간째 매달린 끝에 간신히 불을 피운 것이다.
지친 일행은 불침번을 정하고 일찍 잠이 들었다.
이준호의 첫 불침번이 끝나고 이혜수가 교대하였다.
“발은 좀 괜찮으세요?”
“네…….”
“수고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깨우시고요.”
이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호가 잠들고서 그녀는 홀로 모닥불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낮의 일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거칠게 분노를 표출한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그 순간은 속이 후련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마음이 불편했다.
죄책감이 아니었다. 박고찬 같은 인간쓰레기에게 그간 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 독설은 독설도 아니었다.
다만 그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것.
그 일로 앙심을 품은 박고찬이 어떤 식으로 보복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해야 해…….’
스스로의 처지에 눈물이 났다.
교통사고였다.
야근을 하고 퇴근하던 길에 폭주하는 승용차에 들이받혔다. 그리고 정신이 들어보니,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세계에서 아기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험자가 된 것이다.
첫 시험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가니 병원이었다. 기적적으로 다친 데 하나 없이 무사하다는 의사의 소견이었다.
차라리 시험을 포기하고 저승길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오늘 들어 자주 하게 된 그녀였다.
우울한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이혜수는 볼일을 보기 위해 잠깐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만 여자인지라 생리현상을 해결하려면 일행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볼일은 참았다가 밤에 해결하는 편이었다.
이혜수는 잠시 모두가 잠든 모닥불을 떠나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박고찬은 눈을 떴다.
‘씨발 년이. 드디어 가네.’
히죽히죽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박고찬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살금살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