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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이계사냥기 19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0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9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실프를 소환했다가 소환해제했다가를 반복하면서 나는 헐레벌떡 달렸다.
강천성이나 보조스킬 체력보정을 습득한 준호, 박고찬보다 월등이 체력이 떨어지는 나였다. 하지만 나보다 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지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혜수였다.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극심한 피로와 공포로 질린 얼굴에는 일행들이 자신을 버리고 갈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나도 한계까지 쥐어짜고 있는 실정이었다.
“업혀라.”
뜻밖에도 강천성이 나섰다. 그는 이혜수를 업고서도 일행의 선두에서 달렸다.
그렇게 되자 가장 뒤처지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하악, 하악, 하아악……!”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대로 달리다가 죽는 게 아닐까 두려울 정도였다.
차라리 쓰러지고 싶다는 충돌이 들었다가 사라지기를 몇 차례나 반복되었을 때였다.
-냥!
이제 소환시간이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실프의 울음소리가 몽롱해져 가는 내 정신을 일깨웠다.
“아……!”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격했다.
흐르는 시냇물이 작은 폭포와 연결되어 있었다. 폭포 아래는 암벽으로 둘러싸인 협곡이었고, 그 안쪽에 폭포에 살짝 가려진 작은 동굴이 있었다.
“여… 여기서…….”
숨이 차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쉬자는 거죠?”
체력보정 초급 2레벨이라 나보다 사정이 나은 준호가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흐르는 폭포수 뒤에 뚫린 작은 동굴로 들어갔다. 다섯 사람이 들어가자 비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작은 동굴이었다.
하지만 커튼처럼 동굴 입구를 가리고 있는 폭포수 때문인지 안락함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여기라면 싸운다 해도 방어하기 유리하겠어.’
폭포수가 우리의 체취가 밖으로 퍼지지 않게 차단해 줄 것이다.
협곡의 통로가 좁아 놈들이 공격해 와도 맞서 싸우기가 용이해 보였다.
나는 실프를 소환해제하고서 일행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보내기로 하죠.”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전장식 마법소총과 탄알집 혁대를 사라지게 하고서 벌렁 엎드렸다.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눕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컴컴한 한밤이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행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동굴 내부의 풍경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굴 입구 쪽에 앉아 있는 강천성의 모습이었다.
“안 주무셨어요?”
날 힐끔 본 강천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탈진해서 잠든 동안 홀로 경계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시간 확인을 위해 석판을 소환했다.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3
-카르마(Karma): 0
-시험(Mission): 제한시간까지 생존하라.
-제한시간(Time limit): 5일 9시간 14분

“이제 그만 주무세요. 불침번은 우리끼리 할게요.”
그 말에 강천성은 곧장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실프.”
-냥.
“쉿, 조용히.”
실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에게 얼굴을 비벼왔다. 실프의 애교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찰 좀 해줘.”
실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굴 밖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돌아온 실프는 바닥에 숫자를 적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손바닥에 써볼래?”
그러자 실프는 내 오른손에 숫자를 썼다. 간지러운 느낌과 함께 나는 271이라는 숫자를 감지했다.
“271마리?”
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의 싸움에서 죽은 레드 에이프를 제외한 모든 개체가 이 인근에 모여 있다. 녀석들은 우리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상황이 너무 안 좋은데.’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은 사실 그리 좋은 거처가 아니었다.
떨어지는 폭포가 입구를 막고 있어 모닥불을 피울 수 없고, 춥고 습기 차서 잠자리가 불편했다. 이곳에서는 5일을 버텨낼 수 없다.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271마리의 포위망을 뚫는단 말인가?
‘우울해지니까 그만 생각하자.’
잠시 후, 강천성을 제외한 모두를 깨워서 불침번을 정했다. 넷이서 1시간 30분씩 맡기로 했다.

***

“일어나 인마.”
박고찬이 툭툭 발로 건드리는 바람에 나는 잠에서 깼다.
“에이, 씨발, 추워서 잠이나 제대로 자겠나.”
박고찬은 불침번을 마치고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그런 주제에 저 작자는 얼마 안 있어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나는 이윽고 졸음을 물리치고 실프를 소환했다.
“레드 에이프가 뭘 하는지 보고 와 줄래?”
-냥.
작게 대답한 실프가 밖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에 돌아온 실프에게 내가 물었다.
“놈들은 자고 있니?”
-냥.
고개를 끄덕이는 실프.
밤눈은 좋지만 야행성은 아니군. 그럼 어제의 야습은 역시 전술이었다는 뜻인데.
“전부 자? 아니면 몇 마리는 깨어 있어?”
실프는 내 손바닥 위에 숫자 9를 간지럽게 썼다.
‘겨우 9마리?’
수백 마리가 우글거리는데, 그중 잠을 자지 않고 감시하는 숫자가 고작 9마리? 생각보다 허술했다.
하지만 이내 이해할 수 있었다. 수백 마리나 되고 이 숲은 자신들의 영역이다. 두려워해야 할 적이 없으니 경계도 느슨한 것이다.
‘그 점을 파고들어 볼까?’
나는 놈들이 자고 있는 틈에 일행들과 함께 달아날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그건 무모했다.
아무리 허술해도 깨어 있는 9마리의 감시에 걸릴 우려가 있다. 또한 우리는 모두 지쳐 있었다. 포위망을 빠져나간 데도 놈들의 추격을 따돌리지는 못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숲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적이 레드 에이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야생에서 식수와 식량을 확보하는 데도 성공. 레드 에이프의 야습을 물리쳤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
그런데 결국 이렇게 좁은 협곡에 갇힌 신세라니.
‘레드 에이프의 조직력이 내 상상을 뛰어넘었어.’
야습을 시도한 21마리를 한 마리도 살려 보내지 않고 죽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수백 마리가 일제히 동원되어 이 일대를 통째로 수색했다.
수색망을 빠르게 좁히며 결국 우리의 위치를 알아냈다.
수색망을 강행돌파 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은 궁지에 몰린 상황.
‘완전히 몰이사냥이야.’
그렇듯 레드 에이프의 집단행동은 매우 조직적이고 유기적이었다.
우리에게 죽은 숫자가 40마리가 넘는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상당히 강력한 우두머리가 집단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것이 분명했다. 야습과 몰이사냥을 구사할 줄 아는 똑똑한 리더 말이다.
정리해 보자.
첫째, 똑똑하고 강력한 우두머리.
둘째, 그 우두머리가 수족처럼 다루는 271마리의 레드 에이프.
셋째, 놈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숲.
넷째, 일행 중 한 명은 분란을 조장하고 한 명은 무능력하다.
‘뭐 이딴 시험이 다 있어?’
화가 치밀었다. 그 번데기 천사 자식! 이렇게 고뇌하는 나를 보며 지금도 실실 쪼개고 있을지도 모르지.
“석판 소환.”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3
-카르마(Karma): 0
-시험(Mission): 제한시간까지 생존하라.
-제한시간(Time limit): 5일 3시간 45분

나는 석판에 쓰여 있는 글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석판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제한시간까지 생존하라.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에도 일주일간 도망치라고 되어 있지는 않았다. 생존하면 된다.
불가능한 시험은 주지 않는다. 첫 시험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시켰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가진 능력.
내 능력은…….
문득 무언가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난 실프를 다시 소환했다.
“실프! 물어볼 게 있는데.”
-냥?
동그란 눈을 말똥히 뜨며 날 바라보는 귀여운 실프.
“네 힘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 할 수 있니?”
-냥.
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냄새도 차단할 수 있고?”
-냥.
이번에도 끄덕끄덕.
“그럼 마지막으로, 레드 에이프 무리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가 어떤 녀석인지 알고 있니? 생김새가 두드러진다든가, 다른 녀석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그런 놈 말이야. 혹시 본 적 있니?”
-냥.
실프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바로 이거다. 정답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

나는 다음 불침번인 이혜수를 깨웠다.
“제 차례예요?”
“일이 생겨서 시간보다 일찍 깨웠어요.”
“일이요?”
“한 시간이 지나도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른 분들을 깨워서 달아나세요.”
“네?”
“다녀올게요.”
나는 동굴을 나섰다.
그런데 이혜수가 헐레벌떡 따라 나왔다.
“어디 가세요!”
“놈들의 우두머리를 죽일 거예요. 그것만 해내면 시험은 클리어예요.”
“그러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해요?”
“한 시간이 지나도 제가 오지 않으면 날이 밝기 전에 즉시 도망치세요. 아직은 놈들이 밤에 경계가 느슨해서 기회가 있지만, 제가 실패하면 녀석들도 경계심이 생겨서 밤에도 감시를 철저히 하게 돼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요!”
“……?”
“전 어떡하라고요…….”
이혜수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성추행 당할 때 도와주시고, 싸울 때 구해주시고,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현호 씨는 절 보호해 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현호 씨 없으면 전 어떡하라고요.”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가지 마세요. 그냥 같이 있어요. 왜 현호 씨가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요?”
나는 씁쓸히 웃었다.
“잠깐 같이 얘기나 할래요?”
우리는 함께 바위에 앉았다.
내가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일곱이요.”
“회사 다니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올해가 4년차였어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취업하신 거예요?”
“네.”
“어떤 회사인데요?”
“ST소프트 마케팅부서에서 일했어요.”
“우와, 대학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취직하셨네요. 좋은 대학 나오셨나 봐요.”
“학교도 나쁘지 않은데, 아버지가 ST소프트 이사이세요.”
“와, 진짜 부럽다. 얼굴도 예쁘신데 집도 잘살고, 완전 승리한 인생이시네요.”
“안 그래요. 지금은 이런 처지고…….”
“저보단 낫죠.”
내가 말했다.
“전 말해도 사람들이 모르는 그런 대학 나와서 지금까지 공무원 시험 친다면서 백수생활 했거든요.”
“…….”
“대학 친구들은 졸업하고서 이력서 수백 통씩 넣고, 그렇게 해서 간신히 들어간 직장 연봉은 2천도 안 되고. 그런 걸 보니까 무섭더라고요. 나도 그 고생을 할까 봐. 그래서 공무원이 되겠답시고 29살 먹도록 세월만 낭비하다가 죽었어요.”
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엇하나 잘한다고 칭찬 받은 적이 없었어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설렁설렁 살다가 인생이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거예요. 살고 싶어서요. 다시 기회를 얻게 된다면 제대로 살아보려고요. 저 참 한심하죠?”
“그, 그렇지 않아요. 현호 씨는 정말 대단해요. 현호 씨 아니었으면 다들 지금쯤 죽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드디어 살면서 칭찬 한 번 받아보네요.”
내가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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