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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이계사냥기 17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4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7화

 

싸움이 끝나고 나니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레드 에이드의 시체가 무더기로 널려 있는 광경은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첫 시험 때, 난 한 마리를 죽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간신히 넝쿨로 목을 졸라 죽여 놓고도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에 빠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11마리가 내 손에 죽었다. 첫 시험 때보다 훨씬 쉬웠다.

‘이 지랄 같은 기분에 익숙해지라고? 네 눈에는 내가 그럴 수 있는 인간으로 보이냐!’
‘네, 그렇게 보이는데요.’

결국은 아기 천사 녀석이 옳았다. 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우웩!”
이혜수는 헛구역질을 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보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괜찮으세요?”
“네…… 죄송해요…….”
그녀는 울음을 참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괜찮지 못할 건 또 뭐야? 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했는데.”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박고찬. 그 말이 서러웠는지 이혜수의 흐느낌이 더욱 커졌다.
‘댁도 딱히 대활약을 한 건 아니거든, 이 아저씨야?’
박고찬의 뻔한 속내 때문에 더욱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싸가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계속 저런 식으로 이혜수를 깔아뭉개며 압박감을 느끼게 만들려는 것이다. 지켜주는 대신 몸을 제공해라, 같은 거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큰일이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스스로가 용기를 내서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는데.’
이혜수가 생각보다 더 무기력해서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짐만 되는 일이 계속되면 이 팀에서 그녀가 설 곳이 없어진다. 방해만 되는 그녀를 보는 일행들의 시선도 점점 싸늘해지고, 결국은 박고찬이 원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형, 이걸로 끝난 걸까요?”
“그럴 리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 끝날 정도였으면 일주일간 생존하라는 시험을 내지도 않았겠지.”
“아무튼 형 말대로 정말 싸울 상대가 레드 에이프였네요.”
“그나마 모르는 상대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나는 시체가 널린 동굴 앞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여기에 더 머물지 못하겠네.”
“그냥 이곳에 있으면 안 돼요? 오늘처럼 싸우면서 일주일간 버티면 되잖아요.”
글쎄. 난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모두의 의견을 들어봐야지.
난 모두에게 물었다.
“놈들이 또 오기 전에 이곳을 떠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곳이 안전하다.”
강천성이 반대했다. 중요한 문제라 이 인간도 자기 의견을 내는군.
“숲에서 싸우면 장담 못한다.”
맞는 말이다. 이곳 동굴 앞은 넓은 공터가 있어서 싸우기 유리했다.
하지만 숲은 다르다.
놈들이 숨을 엄폐물이 너무 많고, 전후좌우뿐만이 아니라 나무 위에서 공격해 올 수도 있다. 그런 입체적인 싸움은 수적으로 유리한 놈들이 단연 유리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어도 위험한 건 똑같아요.”
“왜지?”
“먼저 레드 에이프의 지능 수준을 짚어볼게요. 녀석들은 매복 공격도 하고, 야습도 하죠. 그리고 가장 먼저 모닥불을 노리는 판단력도 있었고요.”
내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먼저 덤비지 않고 이곳을 포위했다가 우리가 물이나 식량을 얻으러 나올 때 공격하는 발상도 하지 않을까요?”
“……그렇군.”
강천성은 수긍했다.
내 의견에 다들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싸움 한 번 이겼다고 좋아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고 모두 죽였다는 점이에요. 녀석들이 다시 습격해 올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그 틈에 다른 근거지를 찾는 게 어떨까요?”
“좋다.”
“저도 좋아요, 형.”
“저도…….”
강천성, 준호, 이혜수가 모두 찬성했고, 마지막으로 박고찬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동굴을 떠나기로 했는데, 나는 출발 전에 세 겹씩 입었던 팬티와 양말을 하나씩 벗었다.
그것을 땔감으로 마련한 나무토막의 끝부분에 휘감고, 모닥불에 집어넣어 불을 붙였다.
화르륵-
‘얼추 되는구나.’
나는 임시방편으로 만든 횃불을 바라보며 흐뭇해졌다.
“형, 이것 때문에 속옷이랑 양말을…….”
“세 겹씩 입고 왔어.”
노팬티 취급하지 말아줄래?
“와, 형 진짜 준비성 끝내주네요.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직 날이 어두웠으므로, 나는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
“실프, 근처에 동굴이 또 있는지 알아봐 줄래?”
-냐앙.
실프가 쌩하니 날아갔다. 잠시 후에 반경 1.1킬로미터를 모두 살피고 온 실프는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동굴이 그렇게 흔할 리가 있겠냐.
다행히 레드 에이프는 이 일대에 없었다.
“일단 걸어야겠네요. 아까 녀석들이 저쪽으로 도망치려 했으니,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가보죠.”
내가 앞장서자 일행들도 순순히 따랐다. 11마리를 죽인 활약 덕분인지 박고찬도 딴지를 걸지 않고 고분고분해졌다.
근데 어쩐지 내가 일행의 리더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묘하게 됐다. 강천성은 원채 무관심하고 박고찬은 인심을 잃는 바람에 주도권이 자연히 나에게 굴러들어왔다.
걸음을 옳기다 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횃불을 버리고 계속 걸었다.
5분마다 실프를 소환해서 60초간 주변 정찰을 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프의 정찰에 따르면 이 숲에는 토끼나 사슴, 원숭이 같은 초식동물이 많이 살았다.
“아무래도 레드 에이프의 숫자가 상당히 많나 봐요.”
“놈들이 나타났어?”
박고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제부터 계속 숲을 다녔는데 초식동물밖에 발견하지 못했어요. 사냥할 먹이가 이렇게 풍부한 데 비해 뱀이나 올빼미 같은 걸 제외하면 육식동물은 레드 에이프뿐이에요.”
“이 숲이 놈들의 영역이군.”
강천성이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로 이 일대를 영역으로 삼고 있다면, 녀석들은 상당히 큰 집단일 거예요.”
그리고 그만한 집단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 우두머리 놈은 지금쯤 동굴 앞에 죽어 있는 21마리의 동료를 보고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

“키아아아악-!”
분노의 포효였다.
레드 에이프들이 일제히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
피처럼 시뻘건 털.
겉모습부터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무리의 지배자가 진노하고 있었다.
레드 에이프 로드라 불리는 종(種)이 있다. 한 세대마다 한두 마리씩 태어나는 이 돌연변이는 일반 종보다 두 배는 큰 덩치와 파워를 갖는다. 무리의 지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물론 그러기까지 시련을 겪어야 한다.
현재의 우두머리도 그러했다.
레드 에이프 로드는 태어났을 때는 일반 종과 다를 바 없었지만, 자라날수록 특별 종으로서의 특징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우두머리는 잠재적 경쟁자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였다. 때문에 싹이 짓밟히기 전에 달아나야 했다.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숲에서 살아남으며 혹독한 성장기를 보낸 로드.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우두머리만큼이나 크게 자랐음을 깨닫고는 무리로 돌아왔다. 다시 만난 우두머리는 어릴 적에 봤을 때처럼 두렵지 않았다.
도전했고, 승리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는 무소불위의 통치!
또 다른 특별종이 태어나고 자라 도전했지만 이겨냈다. 두 차례나 도전을 물리치고 우두머리 자리를 이겨냈을 때, 로드는 사상 최강의 지배자로 등극해 있었다.
그런 로드가 분노하고 있었다.
“키아아아악!!”
수백 마리의 레드 에이프가 공포에 떨었다.
풍요로운 이 숲에 흘러 들어온 맹수나 몬스터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마다 로드는 격퇴했다. 무리를 이끌며, 때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우두머리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레드 에이프는 전례 없이 번식하여 무리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
그런데 이 숲에서 동족이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영역을 침범한 적이 있음을 알고 부하들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직접 와 보니, 부하들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권위를 무시한 놈들을 응징해야 한다.
“키에에엑!”
로드가 호령했다.
“키에엑!”
“끼엑!”
“키에에엑!”
수백 마리의 레드 에이프가 너도 나도 울부짖으며 호응했다.
피의 복수!
그리고 무리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혈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우리는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걸었다. 수통이 없는 탓에 되도록 물에서 가까이 있는 게 좋다고 여겼다. 시냇물에는 큼직한 물고기도 많아 식량도 구하기 편했다. 실프를 시키면 토끼 사냥도 쉽지만, 생선이 손질이나 요리가 더 편하니까.
나무토막을 날카롭게 깎아서 간단한 칼을 만들었는데, 이혜수가 이걸로 생선을 손질해서 요리했다. 내 조언대로 사소한 잡일을 도맡으려고 하는 태도였다.
간밤의 싸움에서는 짐만 됐으니 그녀도 경각심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거라도 해서 도움이 되지 않으면 카르마를 얻을 수 없고, 계속 이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어제 오늘 이틀간 지켜본 결과, 내 느낌상 그녀의 체력은 일반적인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걷다가 지치고 발 아픈 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꾹 참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말이다.
‘체력보정 초급 1레벨을 습득했다고 하지 않았나?’
체력보정 초급 1레벨은 건강한 성인 남성 수준의 체력이라고 들었다. 내 저질 체력보다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나보다 체력이 약해 보였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프와 함께 불을 피우자 그녀는 생선을 구워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요리가 끝나자마자 불을 재빨리 껐다. 피어오르는 연기로 위치가 노출될 수 있으니까.
“다 먹었으면 가죠. 몸에 베인 냄새를 없애야 하니까 씻는 것도 잊지 말아주세요.”
“에이 귀찮게.”
궁시렁거리며 시냇물에서 손을 씻는 박고찬. 다른 일행도 순순히 내 말에 따라주었다.
시냇물을 따라 걷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흐르는 물을 따라 이동하면 우리의 체취가 덜 베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보통 육식동물은 후각이 예민한데, 레드 에이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도구도 쓰고 지능도 있지만, 그래도 인간보단 짐승에 더 가까워 보였으니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실프를 소환해 정찰을 했다.
말 그대로 바람처럼 날아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실프는 웬일인지 나한테 애교도 부리지 않고 소리쳤다.
-냐아앙!
“무슨 일 있니?”
실프는 땅에 숫자를 썼다.
293.
“293미터?”
-냐앙!
실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설마…….
“293마리?”
-냥!
고개를 끄덕이는 실프였다.
“뭐라는 거야? 300마리라고?!”
박고찬이 기겁을 했다.
“다, 다른 거 말하는 건 아닌가요? 개미나 쥐 떼 같은…….”
준호도 믿기 어렵다는 듯이 물었지만 실프의 의견을 확고했다.
“레드 에이프 293마리 맞니?”
-냥!
“놈들이 어디에 있어?”
실프는 빙글빙글 돌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실프가 우리의 주위를 빙빙 돌자 그제야 이해가 됐다.
“사방에 있다고?”
-냥!
“우릴 포위한 거야?”
고개를 젓는 실프.
“그럼 흩어져서 우리를 찾아 숲을 뒤지고 있는 거구나?”
-냥!
간밤에 전투를 치르고서 곧바로 도피했다. 그런데 벌써 사방에 놈들이 있다니!
“야, 이 새끼야, 어떻게 된 거야! 놈들이 다시 올 때까지 시간이 있을 거라며!”
박고찬이 나한테 화를 냈다.
그걸 왜 나한테 따져?
답은 간단하잖아! 놈들이 우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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