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9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9화
“아들!”
애교 섞인 이 간드러진 목소리…….
눈을 떠 보니 엄마와 누나가 집에 돌아와 있었다. 누나가 퇴근하면서 엄마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엄마 왔슈?”
“응, 아들 왔대서 일찍 문 닫고 왔지.”
시계를 보니 밤 12시.
엄마가 운영하는 닭강정집은 술도 함께 파는 호프가 아니라서 늦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난 문득 누나를 바라보았다.
김현주.
나이는 33세. 기업 분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변호사. 대형 로펌에서 활약 중.
뿔테 안경을 낀 갸름한 얼굴은 예쁜 편이지만, 눈빛이 차갑고 무표정이라 인상이 무섭다.
그런데 누나는 웬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있었다.
“웬 와인이야?”
“너 인생낭비 그만둔 기념.”
“…….”
저, 저 한 점 거리낌 없는 독설! 저러니까 남자가 없지.
“베란다에서 맥주 가져와.”
“어.”
베란다의 김치냉장고에 캔 맥주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술 좋아하는 누나의 소행이었다.
와인과 맥주, 그리고 엄마가 싸온 팔다 남은 닭강정으로 한바탕 술판이 벌어졌다.
방에서 공부하던 현지도 슬그머니 기어 나와 한 자리 끼었다. 얘도 술이면 눈 돌아가는 애거든.
술기운이 오른 엄마는 내 등을 탕탕 치며 위로했다.
“아들! 아들은 공부 할 머리가 아니었던 거야!”
전혀 위로가 안 된다.
“고시를 쳐도 현주는 1년 만에 척 붙었는데 아들은 그게 뭐야? 현주처럼 사법고시도 아니고 공무원 시험인데.”
“인생과 돈을 낭비해서 죄송하게 됐수다.”
“그보다 결혼 좀 해. 아들도 현주도 얼른 결혼해. 누가 나 손자 좀 달란 말이야.”
결혼 얘기가 나오자 누나의 술 마시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서너 캔을 비우더니 좀 쓸 만한 남자는 없냐고 투정부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맥주를 퍼마신 현지도 취직 안 하고 놀면 안 되냐고 징징거린다. 몇 년 놀다가 취집을 가겠다나? 하여간 생각하는 꼬라지하고는…….
척 봐도 뒷수습은 내가 해야 할 분위기였지만, 나는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왜 몰랐을까.
이렇게 가족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첫 시험으로 받은 가장 큰 보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
다음 날 아침.
집 안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빈 맥주 캔과 닭강정 뼈 쪼가리는 그대로고, 가족들은 비몽사몽간을 헤맸다.
술에 강한 현지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누나를 흔들었다.
“언니, 출근해야지. 일어나!”
“으윽, 출근 안 할래…….”
누나는 귀찮다는 듯이 돌아누웠다.
“그럼 잘려!”
“잘리게 놔둬…….”
“안 돼! 남자도 없고 일자리까지 잃으면 언니는 완전 추락이란 말이야!”
현지의 돌직구에 누나가 움찔하고 반응을 보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누나를 현지가 낑낑대며 화장실까지 부축했다. 눈물겨운 광경이다.
이제 막 일어난 나 역시 쪼개질 것처럼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결국 어제는 그냥 자버렸구나.’
에이, 지랄.
정령술과 사격 훈련이 가장 중요했는데 깜빡하다니. 역시 술이 원수다.
누나는 초췌한 안색으로 출근했고, 현지도 오전 강의가 있다며 학교로 가버렸다. 엄마야 때 되면 알아서 일어나 가게에 나가겠지.
아무튼 오늘은 기필코 사격과 정령술 훈련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말고 있다 새벽에.
일단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등산과 팔굽혀펴기를 해야 한다.
어제 갑자기 무리해서 그런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숙취까지 겹쳐서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간단히 씻고 밖으로 나섰다.
복날 개처럼 헐떡거리며 산을 올랐다. 파들파들 떨리는 팔 근육으로 팔굽혀펴기 50회를 간신히 채웠다.
아, 진짜 한심해라. 군대 있을 땐 그래도 체력이 괜찮았는데.
집에 돌아와 씻고 때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나니 벌써 오후 2시였다.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반신욕을 했다. 피로가 풀리고 어느 정도 나른해진 팔다리에 근육통 치료제를 발랐다.
그리고 이불을 깔고 낮잠을 청했다. 1분 1초가 귀중한 이때에 웬 낮잠이냐고?
사격과 정령술 훈련은 사람이 안 다니는 새벽에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스케줄을 짠 결과, 잠은 오후에 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한숨 자고서 일어나니 시간은 저녁 8시였다.
“히히, 백수 오빠 일어났어?”
학교에서 돌아온 현지가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난 나를 놀렸다.
그러고 보니 얘 눈엔 내가 할 일 없어서 낮잠이나 자는 백수 오빠로밖에 안 보이겠구나.
“낮에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래.”
“운동?”
“등산. 앞으로 매일 할 거야.”
“으엑, 대낮부터 등산? 오빠 완전 실업자 포스.”
“나의 여동생아. 어째 너랑 얘기만 하면 울컥 치미는구나. 오빠한테 한 대 맞아보련?”
“푸히히, 근데 갑자기 웬 운동이야? 몸도 많이 말랐으면서 다이어트 할 것도 아니고.”
“치열한 닭 장사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체력부터 길러야지.”
내 말에 현지는 또 빵 터졌는지 깔깔거린다.
어제 먹다 남은 미역국과 반찬을 꺼내 저녁식사를 대충 했다. 상 치우고 설거지하고 집 안 청소도 마쳤다.
그러고 나서도 자정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노트북을 꺼냈다.
웹서핑으로 숲이나 산 등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기술을 검색해 보았다.
소총 사격 자세와 총격전 전술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았다. 바로 써먹을 만한 지식이 나오면 노트에 옮겨 적어가며 공부를 했다.
‘이런 멍청이. 진작 이렇게 열심히 공부할걸.’
번데기 달린 얼라 천사 자식이 한 말이 딱 맞았다. 진즉에 이렇게 필사적으로 공부했으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것이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후회만 하는 인생이라니, 잘못 살았다는 증거다. 뭐, 후회는 이미 실컷 했으니까 그만두자.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자정이 되었다.
‘이 시간에 산에 있을 사람은 없겠지?’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훈련 장소는 매일 등산하는 태조산으로 정했다.
밤에 인적도 없을뿐더러, 낮에 등산하면서 봐둔 공터가 있었다.
***
서른이 다 된 성인으로서 조금 쪽팔린 소리지만, 야밤에 혼자 산길을 걷고 있으니까 정말 으스스하다.
태조산 공원 같은 곳은 텐트 쳐놓고 캠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향하는 산길은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아, 진짜 귀신이라도 나올까 겁나네.’
다 큰 어른이 무슨 귀신이냐 싶지?
나도 원래 그런 거 안 믿었는데, 한 번 죽다 살아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아기 천사도 존재하는데 귀신이라고 없을까?
‘아, 실프가 있었지?’
나는 즉시 실프를 불렀다.
-냐앙.
소환된 실프가 나에게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귀여운 실프를 보니까 두려움이 싹 사라졌다.
가만, 실프 소환 시간이 2시간이었던가?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스킬확인.”
-정령술(메인스킬): 현재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를 소환 중입니다.
*초급 1레벨: 2시간 소환 가능.(남은 시간 1시간 59분) 소환 시간이 만료되면 10시간 뒤에 재소환 가능합니다.
2시간 맞구나.
실프의 힘을 사용하면 시간이 더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시간제한 때문에 정령술 훈련은 많이 못할 수도 있겠어.’
아무래도 소환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할 듯했다.
나는 실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프, 조금 있다가 다시 부를게 돌아갈래?”
-냥.
실프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휙 하니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다시 야밤 산길에 홀로 남겨졌다.
지랄, 무섭긴 뭐가 무서워! 열흘 뒤에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놈이!
그렇게 생각하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니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내 목숨이 걸린 시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10분쯤 더 걸어서 낮에 봐뒀던 공터에 도착했다. 나무들이 병풍처럼 빽빽하게 둘러져 있는 작은 공터였다.
‘시작해 보자.’
일단은 사격이다.
“무장, 착용.”
오른손에 마법소총이, 허리에 탄알집 혁대가 나타났다.
탄알집에 들어 있는 납구슬탄의 숫자는 총 100발. 사격 훈련은 충분히…….
‘어라?’
나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런 미친, 충분하긴 개뿔이! 전혀 충분하지 않잖아!’
납구슬탄은 소모품이었다. 훈련으로 소모하면 재활용이 불가능했다.
사격을 한 뒤에 다시 주워서 쓰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쏜 납구슬탄은 실프를 시켜서 주워오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납구슬탄의 재질은 납이었다. 목표물에 명중되면 강한 충격을 받고 형태가 찌그러질 게 뻔하다!
“석판 소환!”
석판이 허공에 나타났다.
“납구슬탄이 얼마야?”
석판의 글씨가 변했다.
-납구슬탄 100발: 소총에 쓰이는 납 재질의 탄환. (-2)
-잔여 카르마: 0
다행히 납구슬탄은 100발에 2카르마로 가격이 저렴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게 남은 카르마가 0이라는 점.
제기랄, 첫 시험의 보상 500카르마를 조금도 남김없이 알뜰하게 쓴 결과였다.
…알뜰은 개뿔. 총알의 소모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병신, 이제 어쩔 거야!”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래서는 사격훈련은 무리였다. 야밤에 훈련하러 나온 보람이 전혀 없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100발은 두 번째 시험에서 써야 돼.’
두 번째 시험이 어떤 싸움이 될지 모른다. 첫 번째 시험처럼 레드 에이프 같은 녀석 한 마리만 나오면 다행이지만, 어쩌면 수십 마리가 우글거릴지도 모르는 노릇.
소모품인 납구슬탄은 최대한 아껴야 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군인 한 명당 총알을 평균 5만 발이나 소모했다고 하지 않은가.
‘아니지. 어차피 내 총은 전장식이라 그렇게 마구 갈겨댈 수도 없어.’
즉, 자동소총처럼 마구 쏘는 것보다는 한 발 한 발을 신중하게 쏘는 저격수가 되어야 한다.
‘근데 그러려면 사격훈련으로 명중률을 높여야 할 거 아냐!’
어떻게든 사격훈련은 해야 한다. 한 발도 못 쏴보고 시험에 임할 수는 없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총알을 검색했다. 납구슬탄과 똑같은 규격의 구슬 총알을 구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있다!”
기뻐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새총에 쓰는 새총알탄을 판매하고 있었다. 쇠로 만든 동그란 구슬인데 크기도 7㎜, 8㎜, 9㎜ 등 다양했다.
스마트폰에서 길이 측정 어플을 실행시킨 후에 납구슬탄의 크기를 쟀다. 전장식 마법소총에 쓰이는 납구슬탄의 크기는 정확히 10㎜. 쇼핑몰에 10㎜ 새총알탄도 판매 중이었다.
바로 500발을 주문했다. 제발 빨리 배송됐으면 좋겠군. 난 열흘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사격훈련에 쓸 총알 문제를 해결하니 비로소 안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