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7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7화
고시생 생활을 청산하기로 했다.
휴식기간은 고작 11일.
앞으로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따위 지하 단칸방에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집주인에게 전화해 당장 방을 빼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보증금은 새 입주자가 구해지면 돌려받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 사장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오토바이에 치여 다리가 골절됐다고 뻥을 쳤다.
사장은 노발대발했지만, 뭐 어쩔 텐가? 내가 다쳤다는데.
알바를 그만둔 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게는 오후 2시부터 오픈하니 아직 집에서 놀고 있겠지?
예상대로 엄마는 전화를 걸자마자 냉큼 받았다.
-어머 아들. 웬일로 먼저 전화야?
겨우 하루만인데도 엄마 목소리가 너무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호호, 아들 낮술 했어?
“아냐.”
-아하, 용돈 필요하구나?
“지난주가 알바 월급날이었거든?”
-원래 월급은 통장을 잠시 스치는 신기루잖니.
“그렇긴 하지만 아직 여유만만이야.”
-그럼 왜 전화했을까? 아하, 공무원 시험 때문이지? 이번에도 안 될 것 같으니까 내년까지 더 기회 달라고 하려고?
“…엄마,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돌머리 아들로 보지.
“어휴, 됐고. 나 집에 돌아갈게.”
-뭐라고?
엄마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답했다.
“공무원 시험 관두고 내일 당장 돌아간다고. 닭강정을 지지고 볶든 엄마 하자는 대로 할게.”
-아들, 무슨 일 있었어?
예, 한 번 죽었었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이렇게 허송세월로 보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 싶어서. 이제 그만 엄마한테 효도도 하고 싶고.”
-정말?
“속고만 살았어?”
-어머머, 아들! 엄마 완전 감격. 막 눈물 나려고 그래. 어떡해!
“훗, 마음껏 감동해. 이 아들 효심이 이 정도야.”
그러자 스마트폰 너머로 대화가 들렸다.
-얘, 현지야! 네 오빠 드디어 포기하고 돌아온대!
-진짜? 어휴, 다행이다. 서른 넘어서도 그러고 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인간들이…….
난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아무튼 내일 돌아갈 테니까 내 방 비워둬.”
-응, 그래그래. 엄마가 맛있는…….
“닭강정 말고 보쌈.”
-그래, 보쌈 만들어 놓을게.
엄마는 내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말에 반가웠는지 잔뜩 들떠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걸어 용달차 한 대를 불렀다.
신변 정리에 30분도 안 걸렸다.
‘이제 1분 1초도 헛되이 살지 않겠어.’
나는 굳게 다짐했다.
***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은 천안 서북구의 주상복합아파트다.
바로 근처에 천안역과 버스터미널이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고, 50평에 방 네 개라 엄마와 삼남매가 살기 넉넉했다.
이삿짐센터 용달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기사 아저씨와 함께 짐을 날랐다. 짐이 별로 없어서 금방 끝났다.
“수고하셨어요. 여기 가다가 식사라도 하세요.”
“어이쿠, 감사합니다.”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주니 아저씨는 좋아하며 용달차를 몰고 떠났다.
나는 아무도 없는 집 거실을 둘러보았다.
지하 단칸방에 몇 년을 웅크려 살다가 넓은 거실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와, 진즉에 집에 올걸.”
왜 그 비좁은 던전에서 시간 낭비를 했을까.
29세에 심장발작으로 죽을 팔자였을 줄을 알았더라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았을 터였다.
이삿짐 정리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할 일이 없었다.
‘뭐라도 해야지. 가만히 시간 낭비 하기는 싫으니까.’
내게 주어진 휴식은 11일. 1분 1초가 아깝다.
부엌에 가보니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꼴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엄마와 누나는 일하느라 바빠서 집안일은 여동생 현지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현지도 올해 대학 4학년 취업준비생. 게다가 원채 성실한 성격도 아니라서 집 안 꼴은 엉망이었다.
‘이제 백수가 된 내가 좀 해줘야지.’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했다. 후딱 해치운 후에 청소기를 꺼냈다.
‘가만? 정령술이 있잖아?’
“실프.”
-냐앙.
실프가 나타나 내 머리 위에 사뿐히 올라선다. 살랑살랑 꼬리로 내 머리를 툭툭 치는 게 귀여워 죽겠다.
“실프, 네 바람의 힘으로 집 안 먼지를 전부 한 곳에 모아줄 수 있어?”
-냐아앙.
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한줄기의 미풍이 불어 집 안을 휘젓고 돌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소파 밑, TV 뒤편, 침대 밑, 옷장 위 등등. 집 안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훑은 바람이 내 앞에서 멈췄다.
“으엑, 먼지 봐라.”
거의 내 머리통만 한 먼지 덩어리가 뭉쳐져 있었다. 집 안에 존재하는 모든 먼지를 모은 결과였다.
누가 여자 셋 사는 집 아니랄까 봐 머리카락이 장난 아니었다. 아, 징그러.
-냥.
먼지덩어리 위에서 실프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잘했냐고 묻는 듯한 반짝이는 눈동자로 날 올려다본다.
“고마워, 실프. 정말 잘했어.”
-냐앙.
실프가 내 뺨에 얼굴을 부볐다. 아, 정말 사람들이 왜 고양이를 키우는지 알 것 같다.
실프의 활약으로 집 안 청소는 너무 일찍 끝났다. 이제 뭘 한다?
‘일단 두 번째 시험 대비해서 운동이라도 할까?’
고작 11일 운동한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마침 요 근처에 태조산 등산 코스가 있으니 운동으로 적당할 듯했다.
첫 번째 시험 장소도 산을 낀 숲이었다. 앞으로도 숲이나 산을 낀 지형에서 싸울 일이 많아질지도 몰랐다.
주어진 시간이 11일 뿐이지만, 그래도 매일 등산을 하면 산지에 익숙해지고 체력도 약간이나마 오를 것이다.
추리닝에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태조산 초입에 도착한 나는 과감하게 가장 오래 걸리는 1시간 50분짜리 코스로 나아갔다. 앞으로 매일 이 코스를 완주하기로 결심했다.
산길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이 차고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처음인데 쉬운 코스로 갈 걸 그랬나?’
잠깐 약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징징대지 말자. 목숨이 걸린 문제야. 힘들어도 참아야 돼.’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살아왔던 나에게 처음으로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시험, 아레나, 생존!
그것은 놀라운 원동력이었다.
본격적으로 태조산 정상 코스에 이르자 숨이 차서 연신 헐떡거리는 바람에 등산길의 어르신들이 쳐다볼 정도.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꿋꿋이 걸음을 옮겼다.
현기증이 나고 토할 것 같아도 끈질기게 걸음을 내딛었다.
아직 팔팔한 20대다. 이만한 코스도 쉬지 않고 오르지 못하면 남자로서 글러먹은 거다.
‘아무도 날 살려주지 않아. 내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야 돼.’
기진맥진한 끝에 정상에 도착했다.
천안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속이 후련해진다. 찬바람이 기분 좋게 땀을 식힌다.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그래서 더 개운했다. 지금껏 나는 한 번도 내 모든 걸 쏟아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심한 자식.’
지난 내 삶에 반성이 들었다.
산 한 번 오를 정도의 노력도 하지 않고 살았던 자신이 미웠다.
‘한 번은 용서하마.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말자, 김현호.’
다시금 다짐을 한 뒤, 나는 왔던 길로 내려가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