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2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2화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텅 빈 세상에 서 있었다.
무슨 헛소리냐고?
말 그대로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세상이었다.
풀도, 나무도, 색깔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과 땅이 온통 새하얬다. 끝없는 지평선이 공백으로 가득한 것이다.
섬뜩한 풍경이었다.
내 정신마저 하얗게 질릴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뭐, 뭔 지랄이야 여긴?”
어떻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가 있지? 마치 온 세상이 탈색된 것처럼!
당황하여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둘러볼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다.
‘꿈이다.’
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꿈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니까.
‘자각몽은 오랜만이네. 근데 왜 꿈도 지랄 같으냐.’
그리 좋은 꿈이 아니니 어서 깨기로 마음먹었다.
꿈은 다 깨는 방법이 있지.
나는 하얀 땅바닥에 양손을 짚고 엎드렸다. 그리고는,
“지랄!”
쿵!
“아악!”
맨땅에 헤딩을 한 나는 이마를 붙잡고 정신없이 뒹굴었다. 아파서 두개골이 쪼개질 것 같았다.
“에이 씨, 뭐 이리 딱딱해.”
하얀 땅바닥은 대리석처럼 단단했다. 적어도 내 머리보다 더 단단한 건 확실했다.
그때였다.
“반가워요, 시험자 김현호.”
“우왓?!”
불쑥 울려 퍼지는 어린아이의 활기찬 목소리.
난 화들짝 놀랐다.
사방을 둘러봐도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귀신?’
혹시 귀신에게 가위 눌린 건가 싶어서 오싹해졌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두려움에 나는 버럭 소리쳤다.
“어디야! 나와!”
“여긴데요.”
목소리는 위에서 들렸다. 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신이 멍해진다.
“천사?”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기 천사였다.
아무것도 입지 않아서 덜렁거리는 다리 사이의 번데기가 내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한다.
“진짜 천사야?”
“그런데요.”
번데기 달린 아기 천사 놈은 참새처럼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려왔다.
아…….
기가 찬다. 꿈에서 천사가 나오다니?
난 혹시나 싶어서 말했다.
“로또 번호 가르쳐 줘.”
“싫어요.”
번데기 천사는 딱 잘라 말했다.
명색이 천사이고 나이도 어린 자식이 참 건방지다.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려줄까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그럼 꿈에서 깨게 해줘.”
“꿈 아닌데요.”
“뭐?”
“방금 이마로 땅에 키스하면서 확인하셨잖아요.”
그 말에 난 움찔했다.
“…봤냐?”
“네.”
아기 천사는 작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푸히히 웃었다.
“꿈이 아니라는 걸 두개골로 느끼시던데요.”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 놔, 쪽팔려. 그런 추태를 보이다니!
“시험자 김현호가 자기 머리를 학대하셨을 때 꿈이라면 깨어날 수밖에 없는 통증을 느끼셨을 텐데요?”
히죽거리는 번데기 녀석의 표정은 정말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아기 천사가 말했다.
“아니면 한 번 더 시험해 보시겠어요?”
“어떻게?”
“음, 아까 로또 얘기 꺼내셨죠?”
“어. 알려주게?”
“아뇨.”
또 나를 울컥하게 하는 번데기 자식.
“대신 로또 당첨 확률에 버금가는 일을 체험하게 해드릴게요.”
“뭔데 그게? 연금복권?”
“아, 정말, 본인의 재정 상태가 묻어나는 말투를 구사하시네요.”
부글부글.
“……그럼 뭔데?”
“벼락 맞아보실래요?”
멍…….
난 황당함을 느꼈다.
이 번데기 자식이 지금 나한테 뭐래? 로또 번호는 알려주지 못할망정, 지금 날벼락 맞아보겠냐고?
“죽을 정도는 아니고 약간 따끔할 거예요. 그럼 갈게요~!”
“자, 잠깐?! 난 아직……!”
파지지직!
“끄아아악!”
하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나는 온몸이 기름에 튀겨지는 듯한 충격에 요동쳤다. 엄마한테 튀겨지는 닭강정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 어떠세요?”
어떠냐고?!
“죽을 정도는 아니라면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나는 버럭 화를 냈다. 포경 수술 때 마취주사보다 100배는 더 아프잖아!
“진짜 벼락 맞으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어요.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아픈 거예요.”
개소리를 지껄이며, 아기 천사 새끼는 날개를 파닥파닥 열심히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가까이 얄미운 면상을 들이대며 이어서 말한다.
“꿈이라면 이렇게 아플 수 있을까요?”
“……!”
가슴 깊숙이 꽂혀드는 한마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요동쳤다. 꿈이 아니면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시험자 김현호.”
가만…….
아까부터 저 자식, 날 시험자라고 불렀지? 시험자가 대체 무슨 뜻이야?
“시험자 김현호는 ‘율법’에 의해 시험자로 선택받으셨어요.”
“율법?”
“신(神), 불(佛), 도(道), 진리(眞理). 인간은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죠. 하지만 그건 명명(命名)도 형언(形言)도 인격화(人格化)도 숭배(崇拜)도 불가능한 전 차원 우주 만물의 절대성이에요.”
뭐라고 씨부렁대는 거지?
이해를 못하는 나에게 아기 천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느님 같은 거라고요.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율법’이라 부르는 거예요.”
“한마디로 신, 절대자 뭐 그런 뜻이지?”
“네.”
“그래, 아무튼 그 율법? 그 사람, 아니, 존재가 내게 무슨 볼일이래? 시험자? 나한테 무슨 시험이라도 내릴 거래?”
“네.”
“무슨 시험?”
“시험은 매우 힘들고 가혹한 싸움이에요.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사명이죠.”
“무지 위험해서 죽을 수도 있어?”
“네.”
“싫어, 안 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들이 미쳤나? 신? 천사? 뭐 그런 거면 다야?
잘 살고 있는 사람한테 대뜸 힘들고 가혹한 일을 시키면 내가 할 것 같아?
아기 천사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셔야 하는데…….”
“왜 나한테 그런 걸 시켜? 신? 그 율법더러 하라 그래. 신 같은 거니까 전지전능하겠네.”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못 가르쳐 줘요. 아무튼 시험자 김현호가 해야 해요.”
“아무튼 난 싫어.”
당사자가 싫다는데 어쩔 테냐? 난 그런 마음가짐으로 똥배짱을 부렸다.
아기 천사는 그런 날 뚱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 저 자식 덜렁거리는 번데기가 계속 눈에 거슬려.
“정말 싫어요?”
“그래, 이 번데기 자식아.”
“정말로?”
“정말로.”
“차라리 벼락을 맞을 정도로?”
벼락이란 말에 나는 움찔했다. 지금 협박하는 거야? 나도 오기가 치민다.
“그, 그래 자식아. 내 소중한 것이 네 번데기만큼 작아진데도 싫다!”
“헐… 그건 정말 죽어도 싫다는 말씀이시네요.”
“드디어 네가 내 진심을 알아주는구나.”
나는 기특하다는 듯이 아기 천사를 바라보았다. 아기 천사는 근심 어린 얼굴이 되었다.
“저희는 강요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드리는 건데……. 선택은 시험자 김현호의 자유지만요.”
“그래, 가혹하게 싸우다 죽을 찬스를 줘서 고맙다. 노 땡큐란다, 얘야.”
“휴우, 하는 수 없네요. 그럼 저승으로 보내드리는 걸로…….”
“저승?”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얌마, 뭐야!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강요하는 게 아니라면서!”
“물론 협박도 강요도 아니에요. 시험이 싫다고 하시니까 예정대로 저승에 보내드리는 것뿐인데요.”
“저승에 보내지 마! 이승으로 돌려보내줘야지!”
아기 천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시험자 김현호…….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뭘?”
“당신 죽었어요. 저희는 죽은 사람만 이곳에 데려온단 말이에요.”
“……엥?”
“설마 저희가 멀쩡한 생사람 잡아다놓고 협박하겠어요? 저 보시다시피 천사라고요. 악마가 아니라.”
밀려오는 황당함.
역시 이건 개꿈인가 하는 의심이 다시금 치밀었다.
“시험자 김현호의 사인(死因)은 심장질환이에요. 수면 도중 발작해서 골로 가셨어요.”
말도 참 천사처럼 예쁘게 하는구나.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물론 본인은 깊이 잠들어 있어서 자각을 못하셨겠죠.”
“너한테 벼락 맞은 것 말고는 내 평생 죽을 만한 일이 없었어요. 아무런 징후도 없이 대뜸 자다가 골로 가는 게 말이 되냐? 내 나이에 무슨 심장질환이야?”
“잠들기 전에 가슴 언저리가 답답하고 통증을 느끼셨을 텐데…….”
“……?!”
나는 깜짝 놀랐다.
기억난다.
확실히 심장 어림이 답답했었지.
“유전이에요. 시험자 김현호의 부친께서도 심장질환으로 돌아가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