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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71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9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71화

171. 미래

 

 

검성 가우스트 조르디.

 

안톤의 황궁 침입까지의 여정을 돕기 위해 창설된 특임대에 속했던 그는, 보라색 안개가 내려앉은 후 신중치 못하게 움직인 탓에 그만 일행과 떨어지고 말았다.

 

근데 어쩌면 그게 지금을 위해서였나 보다.

 

혼잡하기 짝이 없는 전장을 마구잡이로 휩쓸고 다니던 중, 그는 그의 손녀를 만났다. 다만 손녀의 상태가 위중했다. 얼른 치유하지 않으면 당할 수도 있을 중한 상처를 입은 채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손녀를 들쳐 멘 검성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감정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신호였다.

 

만약 손녀를 이꼴로 만든 범인이 눈앞에 있다면, 그는 당장에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지도 몰랐다.

 

허나 이 괴기하고 요상한 공간에서, 범인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범인이 제발로 나타나주기라도 하지 않는한은 말이다.

 

쿠웅!

 

머리 위에서 피어난 인기척에 검성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괴인은 검성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어깨에 들린 린디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찾으러 갈 필요도 없이 알아서 나타나 주는구나!"

 

역수로 쥔 검에서 일렁이는 오러를 보자마자 알았다. 저 괴인이 바로 손녀를 이꼴로 만든 녀석이라는 걸.

 

검성의 분노가 담긴 칼끝이 괴인을 향했다.

 

 

* * *

 

"펠! 정말 펠이더냐!"

 

펠샤인이 본인의 정체를 순순히 인정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핫산이 소리치며 다가왔다.

 

-오라버니. 카린과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어요? 끝나면 오라버니를 부를게요. 마침 오라버니랑도 할 얘기가 있었으니까요.

 

"하, 하지만..."

 

유독 펠샤인에게 약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핫산이 쑥맥처럼 카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페르트와 카린을 한 공간에 내버려두는 것이 염려스러운 듯 했다.

 

"저는 괜찮아요."

 

"알겠네. 그럼 문 뒤에 있을 테니 끝나면 알려 주게나."

 

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핫산이 병사를 이끌고 방을 나섰다. 수정구 속의 여인을 지그시 노려보던 카린은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목적이 뭐죠?"

 

-목소리에 날이 서 있네요. 혹시 제가 맘이 바뀌어 페르트에게 당신을 해치라고 명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펠샤인의 장난스런 경고에 카린이 분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비통하게도 현재 펠샤인이 하는 말은 사실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카린은 괜히 기 죽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당신이 날 살린 것엔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요?"

 

-흐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저는 그저...

 

"오해는 무슨 오해요? 그럼 안톤한텐 은거해서 살겠다고 해놓고 왜 이곳에 온 거죠? 그에게 한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요?"

 

카린이 펠샤인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예상보다 훨씬 까칠한 카린의 반응에 수정구 속에서 진득한 펠샤인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전 단지 당신과 한 번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페르트를 그리로 보냈죠. 그러고 보면 당신도 참 운이 좋네요. 저도 여기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정말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 사실일까?

 

카린은 알 수 없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펠샤인은 특히나 변덕스럽고 속내를 비추지 않는 여자였다. 그럼에도 이번엔 그녀의 말이 나름 진솔하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펠샤인을 대하는 카린의 태도 또한 살짝 누그러졌다.

 

"...아무튼 도와준 건 고마워요."

 

못내 어쩔 수 없이 하는 티가 팍팍나는 감사 인사.

 

허나 펠샤인은 딱히 흠을 잡진 않았다. 그저 이렇게 의미심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뭐, 너무 고마워 하진 말아요. 나도 엄청 고민했으니까.

 

"고민요...?"

 

-그냥 죽게 내버려 둘지, 아니면 살릴지.

 

이럴 땐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되는 걸까. 화를 내야 되나? 아니면 그래도 살려줬으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거라고 해야 하나? 너무나도 단도직입적인 카린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펠샤인은 그런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봐요. 그거 알아요?

 

두서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한 카린이 귀를 기울였고, 펠샤인은 감정을 알수없게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난 당신이 미워요. 이 세상도 밉죠. 그래서 약속을 어겼어요.

 

"약속이라면..."

 

-은거하겠다는 거요.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그땐 정말로 그러려고 했는데...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자니 너무 갑갑하더군요. 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마지막까지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요? 뭔가 일을 저지를 생각이라도 든 건가요?"

 

속에 깔린 의심이 진득하게 느껴지는 카린의 말에도 펠샤인은 미소지을 뿐이었다.

 

-걱정마요. 그 사람이 하려는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단지 전 이 세계가 어떻게 끝을 맞는지는 직접 두눈으로 봐야겠다 그 뿐이에요.

 

뭔가 말하는 투에서 묘한 낌새를 눈치 챈 카린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 떴다.

 

"당신 설마... 지금 그리딘에 있나요?"

 

-네. 정확히는 그 위의 상공에요. 아래는 온통 보라색 안개로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지만... 직접 들어가보면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있겠죠.

 

"위험할 수도 있는데 두렵진 않나요?"

 

카린의 질문에 펠샤인이 아주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가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워 하고 있었다.

 

-아하하하!

 

마치 놀림을 당하는 듯한 느낌에 카린의 얼굴이 붉어졌고, 이내 웃음을 멈춘 펠샤인이 목을 가다듬고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너무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아무튼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글쎄요.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두려울 게 없는 법이에요. 게다가 굳이 저만이 아니더라도... 당신도 알듯이 현 상황이 목숨 하나 아깝다고 뭘 가릴 상황은 아니잖아요? 곧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

 

카린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그 모습을 다르게 해석한 것일까. 펠샤인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걱정이라도 하는 거예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자신이 내겐 있으니까.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사실 카린은 그녀가 걱정되지 않았다.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그녀의 실행력과 용기, 그리고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속내를 드러낼 생각이 카린에겐 없었다. 어째선지 그것을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카린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대체 당신은 왜 그를 배신했던 거예요?"

 

어쩌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 지금이 아니라면 평생 풀리지 않을 궁금증.

 

카린의 질문에 펠샤인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일단 이것부터 묻겠는데, 이 질문은 날 놀리려는 건가요? 질투심에 눈이 먼 여자라고?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아무튼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는데, 정말 그 이유 때문이었군요."

 

-당신은 몰라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당신의 삶을 모르듯이요. 아무것도 아닌 돌맹이가 누군가에겐 진귀한 보석보다도 아주 커다란 의미를 가질 수도 있죠. 부탁할게요. 날 이해하려 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럼 이제 오라버니를 불러주시겠어요?

 

카린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급한 일이 카린에겐 남아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계속해서 쉬지 않고 울리는 위스퍼 스톤은 아직도 안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서둘러 그에게 자신의 무사함을 알려야 했다.

 

사실 단순히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말이다.

 

 

* * *

 

전장에서 누군가를 잃는 일은 흔하다. 안톤도 전생에서 수도 없이 겪었다. 그러니 이제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으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궁을 바라보며 몸을 떨던 안톤이 검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미어지더라도, 이대로 망연자실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떨어진 곳에서 오르메넨은 한창 탈티온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블러드 샤롯을 갖고 있다고 해도, 마스터의 경지인 탈티온과 1:1로 대적하는 것은 버거운 일, 얼른 자신이 그녀를 도와야만 했다.

 

그렇게 막 검을 들고 전투에 끼어들려는 때였다.

 

오르메넨이 날선 외침으로 이를 만류했다.

 

"그만 둬요!"

 

잠시 멈칫한 안톤에게로 오르메넨이 그녀가 다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해야 되요. 그러니까 그냥 가세요!"

 

아무래도 그녀는 탈티온 만큼은 다른 이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했던 안톤이었지만, 그녀의 확고한 눈빛을 보며 그 생각을 접었다.

 

"...알았소."

 

오르메넨에겐 그녀만의 사정이 있다.

 

부디 형편없이 잃기만 했던 자신과 달리, 좋은 마무리로 끝나길 빌며 안톤은 발을 움직였다.

 

아직까지도 그의 품 속에서는 위스퍼 스톤이 진동하고 있었다. 연락이 닿을 리 없단 걸 알지만, 그는 도무지 연결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미련임을 안톤도 잘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의 끝이 다가올 때까지, 그저 이렇게 여지를 남긴 채 내버려두고 싶었다.

 

근데 그때였다.

 

품 속에서 일정 주기로 계속 느껴지던 진동이 멎었다. 안톤은 다급하게 위스퍼 스톤을 꺼냈다. 근데 이상했다. 진동을 멈춘 위스퍼 스톤이 하늘색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던 것이다.

 

이는 상대방과 연락이 닿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톤이 양손에 조심스레 위스퍼 스톤을 쥐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린?"

 

-안톤...

 

수정구 너머에서 들리운 정겨운 목소리. 안톤은 순간 몸에서 모든 힘이 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이 순간 만큼은 존재치도 않는 신의 이름을 부르짖은 기분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가 됐건 감사하다는 마음 뿐이 들지 않았다.

 

혹시 쟈카론에게 완전히 속은 건가 싶던 안톤이 얼른 그녀에게 질문했다.

 

"괜찮소? 혹시 암살자가 가지 않았소?"

 

-왔었어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솔직히 위험하긴 했지만... 어떻게 잘 해결 됐거든요.

 

"잘 해결됐다니...?"

 

-그녀가 도와줬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보낸 페르트라는 이름의 기사가요."

 

"...설마 그녀라면 펠샤인을 말하는 것이오?"

 

안톤의 물음에 카린이 긍정했다.

 

-네. 맞아요. 마지막으로 제게 할 말이 있어서 사람을 보냈는데, 때마침 제가 위험하던 상황이었다더군요.

 

"...그랬군."

 

터무니 없는 우연. 설마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추호도 예상치 못했다. 운명의 기묘함에 안톤은 감탄했다.

 

어쩌면 한치의 앞도 예측할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이 보다 가치 있는 것일 지도 몰랐다.

 

안톤은 다시금 자신의 사명을 떠올리며 각오를 되짚었다. 그의 사명은 아르토르를 막아 모든 이들이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일이었다.

 

-바쁠 텐데 어서 가보세요. 그저 무사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할 일을 끝내러 떠나라는 카린의 말에도, 안톤은 머뭇머뭇 거리다 어렵사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린."

 

-네?

 

"...날 원망하진 않소?"

 

무뚝뚝한 듯한 목소리지만, 어째선지 그가 잔뜩 긴장했음이 느껴진다. 카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게다가 잘 풀렸으니 더는 생각하지 말아요.

 

하지만 안톤의 마음은 편해지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버렸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어서 가보세요. 저도 이제 핫산님이 불러서 가봐야겠어요. 나중에 얘기해요.

 

"나중이라니..."

 

안톤이 말꼬리를 흐렸다.

 

죽었을 거라 여겼던 카린이 살아났듯, 앞으로의 일은 단정지을 수 없다. 만약에 일이 잘못된다면 더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어진다. 그리고 카린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는데, 지금 그에게 나중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안톤의 말에, 카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앞으로 많은 날이 남아 있잖아요? 급할 거 없어요. 어서 당신은 해야할 일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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