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7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70화
170. 대면
고통스럽다.
한 번씩 검을 주고 받을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겨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현재 그녀의 뼈는 수도 없이 부러지고 조각나는 중이었다.
콰쾅!
오러와 오러가 격돌하며 터져나온, 도무지 검끼리 맞부딪친 소리라곤 보기 힘든 커다란 굉음.
"끄앗!"
린디아스가 비명을 뱉으며 뒤로 밀려났다.
검을 쥔 어깨의 관절이 어긋나 근육이 뒤틀렸다. 비록 즉각적으로 케이혼의 신성력이 몸에 깃들며 부상은 금방 치유가 됐지만, 겨우 그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피어난 끔찍한 고통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고, 이는 차차 그녀의 정신을 갉아 먹고 있었다.
"정신 차리시오!"
케이혼의 다급한 외침에 린디아스가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렇게 넋을 잃고 있을 시간은 없다.
상대는 자신보다 한 수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다. 찰나라도 틈을 보였다간 아차하는 사이에 당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곳에 모든 병사들은 개죽음을 면치 못하겠지.
"으읏...!"
휘익!
린디아스가 뒤로 크게 도약하는 순간, 7황자 테피로스의 검이 린디아스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케이혼이 신성 마법을 사용해 방어막을 펼친 것이 아니었으면, 필시 큰 부상으로 이어졌을 아찔한 상황이었다.
"젠장!"
망신창이가 되어서도 끝내 검을 휘두르는 린디아스를 보며, 케이혼이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아직까진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전투가 길어질 수록 그녀의 집중력 또한 흐릿해질 터.
아무리 케이혼이 막강한 신성력을 갖고 있다고 한들, 즉사에 가까운 부상을 입어버리면 그로써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상대가 제정신이 아니기에 망정이지, 멀쩡했다면 이렇게 버티지도 못했겠군.'
정신 지배의 부작용 때문인지, 테피로스는 뒤에서 엄호하는 케이혼은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눈앞의 린디아스에게만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나마 잘 된 일이었다.
만약 테피로스가 즉각 케이혼을 노려왔다면 그로서는 도망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런데도 저런 위력이라니... 역시 마스터는 인간이 아니야. 후! 그의 옆에 있을 땐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마스터의 신위에 감탄하며 새삼 안톤이 그리워진 케이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간절하다고 한들 지금 이 자리에 그는 없다.
안톤은 안톤만이 할 수 있는 임무를 하기 위해 떠났고, 그 역시 그의 자리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을 터.
그러니 자신들 역시 그래야 했다. 언제까지 그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린디아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 난관을 헤쳐가려 했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택한 방식은 케이혼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제가 시선을 끌테니 모두 피하세요!"
힘을 합쳐 역경을 이겨내기 보단 스스로를 희생하겠다는 선택지. 이는 어쩌면 그저 이 순간이 어서 끝나길 바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일지도 몰랐다.
"그럴 순 없소!"
가당치도 않다는 듯 케이혼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린디아스는 테피로스를 유인하며 차원 벽을 넘은 직후였다.
당장 그녀를 따라가려 했던 케이혼은 발길을 멈추었다. 이곳에 남은 수십 명의 병사, 그들을 누군가는 이끌어야만 했다.
"부디 그녀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 * *
피폐해진 육신.
흐린 눈앞 만큼 정신도 먹먹했다.
그래서일까. 생과 사의 경계에 섰지만 아찔함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집념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그녀는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아, 난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사실 그녀는 검이 싫었다.
결국 검의 본질이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것.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아픈 것도 다른 이가 다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는 이름난 무가에서 나고 자랐다고 변하지 않는 본성이었고, 그녀는 도무지 살고 죽이는 것에 목숨을 거는 무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검을 잡았다.
유독 자신만 냉대하는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아둥바둥 무인 흉내를 내며 돌아다니던 때, 안톤을 만났다. 그를 보며 알게 되었다.
암만 노력한다고 한들 자신은 그들이 말하는 참된 무인이 될 수 없고,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사실이라는 걸.
그래서 검을 버렸다.
앞으로는 무인이 아닌 평범한 아녀자로서 살아가고자 했다.
남은 인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이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게다가 그 사람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근데 왜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그녀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죽어가는 와중에도 기어코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 넣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까지 하게끔 만드는 걸까.
무심코 그 원인을 찾던 도중에 문득 자신이 검을 다시 잡은 그 계기가 떠올랐다.
'그래... 난 그냥 그 사람을 돕고 싶었어.'
등을 보는 게 싫었다. 떠나는 그와 함께 걷고 싶었다. 그래서 옆에서 마주보며 힘들었을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검을 다시 들었다.
확고한 목표 아래서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그녀는 오러 유저가 되었다. 자신감도 붙었다. 안톤을 찾기 위해 대륙을 떠돌았고, 그러다 그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마침내 그가 돌아왔다. 기뻤다. 그에게 가진 죄책감 조차 가려질 만큼 커다란 희열이었다.
이기적인 행태에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피어났지만, 린디아스는 살아가며 모두 갚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안일했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위에 새로 색칠한다고 잘못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겨우 이걸로는 그에게 힘이 될 수 조차 없었다.
7황자 테피로스 혼트 파이오니아.
그는 강했다. 그를 상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군의 희생이 조금이나마 줄도록 유인하며 도망치는 것 정도 뿐.
헌데 케이혼의 도움이 없으니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도중에 몇 번 어쩔 수 없이 검을 주고 받은 것만으로 이미 그녀의 몸은 곤죽이 나 버렸다.
'이젠 쉬고 싶어.'
그녀는 현재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예전에 조르디가 내전 당시처럼 스스로 몸을 내던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부유감이 느껴졌다.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해괴한 장소였다.
만약 이대로 죽으면 시체는 온전히 남기나 할까?
그런 걱정이 들던 때, 린디아스의 눈앞으로 보이는 광경이 변했다.
분명 절벽 아래를 떨어지고 있었는데, 또 차원 벽을 넘었는지 어느새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머지 않아 내장이 입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충격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커헉!"
한 움큼 게워낸 피의 혈향과 함께 맡아지는 싱긋한 풀 내음.
아무래도 주변의 이 무성한 풀더기들이 떨어지는 충격을 완화시켜준 덕에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고, 린디아스는 이제 움직일 기력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머지 않아 저기 위에서 나타난 테피로스가 육신을 조각내며 삶의 마침표를 찍는 끔찍한 미래였다.
린디아스는 눈을 감았다.
최후의 순간, 깨끗한 하늘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도 더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그것의 형체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상상 속의 남자는 여태껏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현실에서 있을 리 없는 미소.
이를 보며 린디아스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래, 차라리 이게 잘 된 걸지도...'
그녀는 자신의 삶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이제 그 마지막 막이 내려가고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빗나갔다. 삶은 결코 연극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야. 대체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
잔잔하면서도 속에 노기가 가득 깔린 음성.
린디아스는 차가운 수면에 잠기듯 얼얼해지던 정신을 깨웠다. 굉장히 목소리가 익숙했다.
눈을 떠 앞을 바라본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부님...?"
정확히 말해서 양조부가 맞다. 린디아스의 피에는 조르디가의 피가 한톨 만큼도 섞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남남이나 마찬가지, 아니 어쩌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다.
조르디가는 그녀의 일족을 참살한 원수의 가문이기도 했으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린디아스는 본가와 거리를 둔 채 온-누르의 별채에서만 지냈다.
그런데 왜, 걱정이 담긴 따뜻한 목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걸까.
"고생했다. 쉬고 있거라."
드디어 지붕을 찾은 길 잃은 아이처럼 마음의 평안이 찾아들었고, 이내 혈도를 짚인 린디아스는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평생 갈구했던 것은 그저 편안히 있을 수 있는 장소. 그것 뿐일지도 몰랐다.
* * *
푸슉.
살이 찢겨지며 터져나온 피분수가 바닥을 적셨다. 복부를 꿰뚫은 장검을 바라보며 카린은 실감나지 않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 떴다.
"어... 어떻게?"
그녀의 혼란스런 중얼거림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눈앞을 가득 메웠던 복면 남자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럼과 동시에 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붉은 눈의 기사가 보였다.
복면 사내의 배에 꽂아진 칼의 주인이었다. 그를 보며 카린이 말꼬리를 흐렸다.
"당신은..."
왠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낯이 익었다. 분명 어디서 봤던 것 같아 곰곰히 생각해보던 카린은 이윽고 깨달았다. 수 년 전, 저 사내를 여기 해린 왕궁에서 본 적이 있었다는 걸.
당시 저 남자는 펠샤인의 호위기사였었다.
그 사실을 막 깨달은 그때였다.
철컥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거칠게 열려졌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문가에선 몸이 성치 않은 핫산이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주검으로 변한 복면인을 보며 영문을 몰라하던 핫산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페르트... 키아트레스?"
아, 그런 이름이었지.
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트를 바라보았다. 한 손에 검을 쥔 그는, 나머지 한 손으로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블루 머챈트에서 개발한 위스퍼 스톤이었다.
'저걸 왜 저 사람이 갖고 있지?'
속으로 그런 의구심을 품는 것도 잠시, 페르트가 수정구 속 누군가에게 정중히 말을 걸었다.
"자리가 어수선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난 괜찮아요. 그나저나 괜히 저 때문에 그 멀리까지 가서 고생했어요. 페르트.
"자잘한 건 신경쓰지 마시지요."
-그럼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어째선지 들리는 건 음성 뿐임에도, 굉장히 고혹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이 가득한 목소리. 카린은 금세 수정구 속의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펠샤인... 당신이로군요?"
-맞아요. 반가워요. 카린. 꽤나 오랜만이죠?
페르트가 카린이 볼 수 있게 수정구를 돌려주었다. 수정구 속에는 태연자약하게 웃고 있는 펠샤인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린은 자기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을 대하는 태도라기엔 다소 무례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펠샤인 데 에르단.
앞으로 모든 일에서 물러나겠다던 그녀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그녀는 어째선지 너무나도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