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6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69화
169. 각오
"대체 무슨 일인가!"
병사의 외침에 핫산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묻자, 헐레벌떡 달려온 병사는 경례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대답했다.
"침입자입니다! 왕실 무사들이 막고 있으나 적이 너무 강력합니다! 어서 은신처로 가시지요!"
"알았네."
느닷없이 벌어진 사건에 핫산도 당황하긴 했으나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군말 없이 병사의 말을 따르기로 한 그는은 넋을 잃은 카린을 보며 호통쳤다.
"카린 경! 정신 차리게!"
"아, 죄송해요!"
핫신이 팔목을 끌어당기자, 너무 놀라서 얼어 있던 카린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이쪽이네! 접견실에 있는 은신처까지만 가면 안전할 걸세! 힘을 내게!"
카린과 핫산은 실내 정원의 후문으로 나와 궁전 복도를 정신없이 달렸다.
근데 너무 오랫동안 운동을 쉬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갑작스레 닥친 일에 몸이 떨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일까.
뜀박질하던 카린은 그만 발에 걸려 복도에 엎어지고 말았다. 핫산이 말했던 접견실에 막 도착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카린! 뒤를 조심하게!"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던 카린은 핫산의 외침을 듣고서야 바닥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졌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섬뜩한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카린 세이건 레이왈츠. 맞나?"
카린은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꺼먼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 누구시죠?"
카린의 얼굴을 세심히 살피던 복면을 쓴 사내의 입가가 씰룩였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뭘 어쩔 새도 없이 사내의 손이 잽싸게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의 손에 들린 단검에서 예리한 빛이 뿜어졌고, 카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목 언저리에서 전해지는 서늘함에 카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죽음을 예상했지만 어째선지 칼날은 목전에서 멈추었고, 자신은 아직 살아 있었다.
"하앗!"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 검을 빼든 핫산이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 핫산이 고맙기는 했지만 별 소용은 없는 행동이었다.
"커헉!"
복면 사내의 발길질에 당한 핫산이 벽에 틀어박히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핫산님!"
복면 사내가 소리를 지르는 카린의 입을 덥썩 막았다. 그리고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작게 읊조렸다.
"조용히 해라. 죽이진 않았으니까."
"읍읍!"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아둥바둥치는 카린이었으나, 복면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렇게 죽여달라고 애원할 것 없다. 신호가 오면 어련히 끝장을 내줄 테니."
복면 사내가 카린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푸핫! 대, 대체 뭐가 목적이기에 이러는 거예요?"
카린은 현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블라디미르에서 보낸 암살자라면, 어차피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작금에 이렇게 자신을 노릴 연유가 없었다.
게다가 신호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모두 영문을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복면 사내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킬게 있는 자는 약하지. 아르토르 님께서는 너를 그의 유일한 약점이라 판단하셨다."
짧고 본인 중심의 불친절한 설명이었으나, 카린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눈치챘다. 그들을 대적할 유일한 검, 안톤을 막아내기 위해 자신에게 암살자가 온 것이었다.
'아, 안 돼...'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있는 게 아니라, 어디 안전한 곳에 숨어서 보냈어야 됐는데.
뒤늦게 후회가 막심했으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가 발길을 돌린다면 너는 산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너는 죽는다. 그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군."
복면 사내가 검등으로 카린의 목을 쓸고 내려갔다.
그럼에도 사람의 감각이라는 것이 참으로 요상해서, 살이 찢기는 느낌과 함께 목 부근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살면서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까.
카린은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가 가끔씩 상상해 보았던 죽음과는 너무나 달랐다. 결코 조용하지도 않았고 아름답지도 않았다.
죽음이 몰고 온 공포에 잡아먹힌 걸까.
물 속에 들어온 것마냥 눈앞가 흐려졌고 팔과 다리가 덜덜 떨린다. 이성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살고 싶다는 갈망만이 가득 찼다.
허나 카린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녀에겐 죽음 보다도 두려운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의 짐이 될 순 없어.'
카린은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들었다.
"쓸모 없는 짓을 했네요. 그 아르토르란 사람도 정말 멍청하군요. 어차피 날 살린다 해도 세계가 멸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다고. 미리 말하지만, 안톤은 절대 이곳으로 오지 않을 거예요."
"글쎄. 과연 그럴까?"
"..."
까득.
이를 악 문 카린을 보며 복면 사내가 비웃음을 흘렸다.
"큭. 하나 알려줄까? 사실 우린 그가 오던 말던 상관없다.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은 일일 테니까."
말을 마친 사내는 주변에 아무 방에나 들어가 카린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머리채를 붙잡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차분히 기다려보자고. 그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 * *
"크큭. 그게 그렇게 결정하기 어렵나?"
쟈카론의 비아냥을 들으며 안톤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빌어먹을 갈림길에 선 이상, 안톤은 이제 좋으나 싫으나 이 세계와 카린 중에 무엇이 더 중한지를 저울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안톤에게 더 없이 어려운 선택이었다.
"거참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여자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냥 당장에 달려가면 될 것을... 쯧쯧."
번뇌에 빠져 고통스러워 하는 안톤을 보며 쟈카론이 혀를 찼다.
"...닥쳐라."
안톤이 복부를 꿰뚫은 검을 비틀자, 쟈카론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미친 사람처럼 웃어재꼈다.
"크핫! 흐하하하핫!"
'젠장.'
안톤도 알고 있었다.
카린에게 달려가는 것은 악수 중에서도 가장 악수라는 걸. 어차피 세계가 멸망하면 그녀 또한 죽는다. 게다가 카린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신은 괜찮다고,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해야하는 일을 하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안톤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고통을 맛보고 있을 카린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원래 평생을 이런 일과는 무관하게 잘 살았을 그녀였다.
설령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다 한들 이런 끔찍한 형태의 죽음은 분명 아니었겠지.
품을 뒤적인 안톤은 위스퍼 스톤을 꺼냈다.
안톤도 쟈카론이 되도 않는 거짓말로 자신을 현혹하고 있다곤 생각치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암살자 몇 명 보내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진데, 괜히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달까.
필시 카린이 위기에 빠졌다는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래도 일단 확인하는 것이 먼저겠지. 그쪽에서 어떻게 잘 막아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산을 덮는 파도."
푸른 빛을 뿜어낸 위스퍼 스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이잉. 지이잉.
한 번씩, 한 번씩. 손에서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안톤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만약 받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야속하게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위스퍼 스톤 너머로 카린의 음성이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너답지 않게 고민의 시간이 길군."
슬슬 안톤도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바위라도 얹은 듯 가슴이 무거웠다. 사실 안톤은 자신이 결정해야하는 답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쟈카론 또한 알고 있을 것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쟈카론이 이렇게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면서도 이토록 싱글벙글 웃지는 못했겠지.
희미하게 변한 안톤의 눈빛을 보며 쟈카론이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렸나 보군."
"너희들은... 내가 괴로워하는 게 그토록 즐겁나?"
안톤의 목소리는 울분에 가득차 떨리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상대는 오히려 기뻐할 뿐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그는 도무지 감정의 동요를 멈출 수 없었다.
안톤의 질문을 들은 쟈카론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찼다.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아! 근데 참고로 위로가 될련진 모르겠다만, 이는 네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
"으아아아아!"
안톤이 괴성을 지르며 쟈카론의 몸에 박혀있던 검을 거칠게 뽑아냈다.
그리고.
"키킥! 역시 그런 선택을 했나? 현명하군."
푸슉.
역수로 쥔 검이 그대로 쟈카론의 목에 틀어 박혔고, 더 이상 그의 입에서 낄낄 거리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정적이 찾아왔으나 겨우 그 뿐이었다. 처음 전투에 나간 신병처럼 떨리는 몸은 쉽사리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머리가 아팠고, 가슴이 아팠다.
피유우우웅!
그때 황궁에서부터 붉은색 신호탄이 쏘아졌다.
뭘 의미하는지 알려줄 자는 이곳에 없었지만, 안톤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자신에게 건네는 아르토르의 비웃음이라는 것을.
오늘 안톤은 한 가지를 잃었다. 어쩌면 이 세상보다도 소중한 것이었을지 모를 한 가지였다.
대신 안톤은 다른 한 가지를 얻었다.
바로 누군가를 향한 진득한 살의.
'반드시... 반드시 찢어 죽여주마.'
붉게 충혈된 안톤의 눈이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 * *
"실망하지 않는군?"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서운하긴 할 텐데?"
카린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았다.
그 어떤 대답을 해봤자 이 복면 사내에게는 유희거리 밖에는 되지 못한단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기도하듯 카린은 양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품 속에 간직한 위스퍼 스톤은 아직까지도 열렬히 울리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울림을 느끼고 있저니, 어째선지 멀리 떨어져 있을 안톤이 가까이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지이잉.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에서 안톤이 겪었을 괴로움과 고민, 아픔과 서러움이 전해져왔다. 그래서일까. 한 방울의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카린이 시동어를 외치는 일은 없었다.
"흐음. 여자의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이왕 결정된 운명, 마지막에 목소리라도 듣고 싶지 않은 건가?"
복면 사내도 위스퍼 스톤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위스퍼 스톤이 빛을 자아냈을 때, 그는 카린에게 연락을 받을 수 있게 기회를 주었다.
허나 카린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목소리를 들으면 살고 싶어 질 테니까. 그래서 혹여나 메달리게 된다면 그 사람이 어리석은 선택을 할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녀는 결코 시동어를 외치지 않았다.
"어서 끝내세요."
눈을 감은 채 카린은 확고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 모습에 복면 사내가 살짝 감탄했다.
"무가의 여인도 아닐진데 각오가 굉장하군. 너무 원망하진 마라. 고통없이 끝내 줄 테니까."
혹시 이런 게 무인들이 느끼는 감각인 걸까.
눈까지 감은 카린이지만, 그녀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칼날의 움직임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숨통을 끊기 위해 느릿하지만 망설임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푸슉.
살이 찢겨지며 터져나온 피분수가 바닥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