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6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66화
166. 초심
솨아아아.
펭 제국의 수도 그리딘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아트렌 평원. 그 위를 시원한 가을 바람이 갈대를 쓸며 지나갔다.
평원에는 광활한 대지가 비좁게 느껴질 만큼의 양측 대군이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어쩌면 무성한 갈대보다 사람 수가 더 많을지도 몰랐다.
평생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장엄함에 케이혼이 고양감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엄청난 숫자로군. 만일 오늘 이후로도 역사가 이어진다면 필시 이번 전투는 길이 길이 남게 되겠지."
안톤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다.
이 평원에서 앞으로 흩뿌려질 피의 무게가 벌써부터 그를 옭아메고 있던 것이다.
그런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털어내기 위해 안톤은 케이혼에게 말을 걸었다.
"케이혼. 당신은 이번 일이 모두 끝난다면 어쩔 작정이오?"
"글쎄. 교황이나 되서 여생을 미녀들이랑 놀면서 살지 않을까 싶은데."
성자의 포부라기엔 지나치게 한심한 포부.
전투 직전에 긴장을 풀기 위한 농이란 걸 알지만, 안톤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안톤을 보며 피식 웃은 케이혼이 되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떤가? 역시 카린인가?"
"그게 무슨 말이오?"
앞뒤를 통째로 잘라낸 물음에 안톤이 고개를 갸웃하자, 케이혼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알면서 모른 척 하기는. 암만 자네라도 남은 인생을 홀아비로 지낼 건 아니잖은가."
이제야 케이혼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깨달은 안톤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소."
"잘 생각해보게. 린디아스 공녀나 용의 현자도 좋지만 역시 카린만한 여자는 어딜 가도 찾을 수 없으니까. 그녀에게 임자가 있단 걸 몰랐다면, 아마 나 또한 열렬히 들이댔었을 걸세."
"당신이 들이대지 않은 여인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할련지가 궁금하군. 근데... 카린에게 임자라니 그건 또 갑자기 웬말이오?"
케이혼이 안톤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그녀에게 임자란 말을 쓸만한 자가 자네 말고 다른 누가 또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 반응을 보니 자네는 카린을 선택하기로 했나 보군."
"..."
말문이 턱 막힌 안톤을 두고 케이혼이 낄낄대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이 끝나고 결혼을 하든 뭘하든 좋으니, 적어도 여기서는 말을 아끼고 있게나. 전장에서 그런 걸 언급 했다간 살아 돌아오기가 어렵다는 미신이 있으니 말일세."
안톤은 기가찼다. 미신이라니, 암만 들어도 성자의 입에서 나올 단어는 아니었다. 게다가 오랜 시절 전장을 뒹군 안톤은 그런 미신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에 대해 뭔가 핀잔을 주려는 사이, 케이혼이 어딘가를 보며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누군가 오는군. 흰색 깃을 휘날리는 걸 보니 전령인 것 같네."
양층 대군 사이의 공터를 가로지른 기병은 얼마 간의 거리를 두고서 멈춘 뒤,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천년제국의 영토에 감히 무단으로 침입한 무뢰배들은 들어라!"
어찌나 목청이 큰지, 딱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이 멀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전령은 엄포를 놓는 듯한 태도로 일장연설을 벌였다. 황제의 자비로운 마음이니 뭐니, 서두는 길었지만 전언의 요지는 이랬다.
양측의 대표가 나와 일전을 벌여 승패를 겨누자는 것.
사실 기사전의 결과로 승패를 나눈다는 건 다 허울 뿐인 개소리였다. 기사전은 그저 초반부에 기세 싸움일 뿐이지, 어느 전쟁에서도 기사전에서 졌다고 꼬리를 내리고 군을 물리는 경우는 없었다.
근데 이렇게 백 만 명이 아득이 넘는 규모의 전쟁에서, 그 따위의 것으로 승패를 받아들일리가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기사전을 청한 이유는 명백했다.
"기사전이라... 일고의 여지조차 없는 제안이군. 당장에 거절하세. 시간을 끌려는 목적이 빤히 보이는데 굳이 응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안톤이라고 그 의도를 모를 리가 만무했다. 허나 안톤은 곧장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런 안톤을 보며 케이혼이 채근했다.
"대체 뭘 그리 고민하는 겐가?"
"난 저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는 이 전장에서 하나라도 많은 아군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소."
기사전에서 대승을 거뒀을 때 아군의 사기는 올라간다. 이는 분명 앞으로 이어질 격전에서 병사들의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잠시 말을 멈췄던 안톤이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내가 나선다면 누가 나오든 긴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오."
"만약에 자네를 노린 함정이라면 어찌하려고 그러는가? 자네가 위기에 처한다면 그게 더욱 손해란 말일세."
"걱정은 고맙지만 괜찮소. 함정이야 익숙하오. 그리고 근래 들어 느낀 것인데, 함정이란 것은 정면으로 돌파 했을 때 항상 얻는 것이 많았소. 아마 이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오."
안톤의 확고한 눈빛을 본 케이혼이 설득하려던 의지를 꺾었다.
"...알겠네. 그럼 자네의 의사는 내가 대신 전하고 오지. 자넨 일전을 치룰 준비나 하고 있게."
"고맙소."
케이혼이 부랴부랴 떠나고, 안톤은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런 역사적인 전투의 기사전이라고는 하나 딱히 준비할 건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올 때 그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한 자루의 대검과 회색 장포, 이것이면 그에겐 충분했다.
"누가 날 상대하겠느냐!"
평원 중심부에 선 흑발의 남자가 오만하게 포효했다. 방금 전 전령의 외침과는 달리 조용했으나, 거대한 기가 실린 음성은 평원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귀에 똑똑히 틀어박혔다.
그의 등장에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피어났다.
"벼락 검 이안 프라빈이라... 시작부터 거물이 나왔군."
제국의 두 번째 명인.
푸른 귀신 카를로스에 필적하는 검의 천재.
평민 출신으로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 제국을 받치는 기둥으로 거듭난 불세출의 무인.
그를 보는 안톤의 눈이 반짝였다.
'단지 시간 끌기로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패로군. 뭔가 노림수가 있나?'
이내 아군의 전열을 벗어나 평원 중심부로 다가선 안톤은 근접에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전신 갑옷을 입은 그는 노란빛의 광채가 흘러나오는 장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버림패라기엔 최선의 준비를 다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갑옷을 입었다는 건... 역시 아티팩트라는 거겠지.'
굳이 신안을 열어 이를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마스터 이상의 무인들에겐 아티팩트가 아닌 이상 갑옷이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내 이름은 이안 프라빈. 날 상대할 당신의 이름은?"
"어차피 알고 있지 않은가?"
"살아오며 수도 없이 생과 사의 경계를 들락날락 했지만, 아마 이번 전투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비일 터. 그러니 직접 당신의 입으로 듣고 싶다. 이름을 말해라."
"안톤. 성은 없다. 이제 됐나?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시작하지."
"통성명을 끝낸 검사끼리 뭔 대화가 더 필요할까. 좋다. 슬슬 시작하지."
마주보고 있던 흑발의 기사가 곧게 선 자세에서 안톤을 향해 수직으로 검을 뻗었다.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안톤으로서도 처음보는 독특한 기수식이었다.
안톤도 검을 고쳐잡고 자세를 취했다. 서로의 시선이 서로에게 고정됐고, 이내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정적 속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안톤이었다.
과거 안톤은 명인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사막의 도시에서 조우한 광전사 가롱 센데벨과의 대련 당시, 안톤은 수 백이나 되는 합을 그와 나누고서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허나 그때는 몇 년 전의 이야기다. 안톤은 그때보다도 더 강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하며 상대를 얕보는 건 아니었다.
'한 수에 끝낸다.'
스스로 목 뒤에 혈도를 짚어 초집중 상태에 들어선 안톤의 검이 상대방의 심장을 향해 뻗어나갔다. 바람의 결을 찢으며 찔러가는 안톤의 검은 마치 무의 공간에서 행한 일검처럼 거침 없었다.
문득 귓가로 들려오던 바람의 소리가 쪼개져 들려온다.
범인의 감각으로는 쫓지도 못할 초인들의 시간.
그 속에서도 이안은 안톤의 검을 차분히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엔 반응을 하지 못한 건가 싶지만, 맹수처럼 빛을 내는 눈을 보면 그건 아니었다.
번뜩!
안톤의 검이 상대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이안의 눈에서 안광이 터져나왔다.
그럼과 함께 그의 검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벼락 검이라더니... 과연 그 명성에 걸맞는 쾌검이군.'
파지직.
뇌기를 담은 검이 직선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안톤을 향해 다가왔다. 목표지는 목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쾌검의 달인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안톤이 그에 비해 속도가 밀리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미 안톤의 검은 그의 몸 지척까지 다가서 있었다.
상대의 검이 닿기 전에 안톤의 검이 먼저 닿는다.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던 그때였다.
찰나의 간극 속에서 이안이 몸을 휙 돌렸다. 그 탓에 안톤의 대검은 그의 심장이 아닌 오른쪽 어깨에 틀어박혔다. 사실 박혔단 묘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워낙 무식한 크기의 검인지라 찌른 것만으로도 그의 어깨죽지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안톤의 본능이 경고를 보내왔다.
'젠장! 한 수로 끝내겠다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나!'
한쪽 팔이 홀라당 날아가버렸음에도, 이안의 검은 뱀처럼 위협적으로 목을 노려오고 있었다.
안톤도 이안처럼 재빨리 몸을 틀었고, 그 순간 목 부분에서 화끈한 감각이 전해졌다.
'다행히 깊진 않다.'
재빨리 몸을 틀은 덕에 이안의 검은 피부 살갗만을 가르며 빗겨갔다.
출혈이 있긴 했지만 이는 경상에도 속하지 못할 자잘한 부상이었다. 그러나 안톤은 등골이 오싹했다. 어떻게 잘 피해내긴 했지만 자칫하면 목에 구멍이 났을 수 있는 상황임을 깨달은 것이다.
설마 저만큼의 명성을 지닌 무인이 시작도 전부터 패배를 직감하고, 초장부터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겠단 전략을 쓸 줄은 예상치 못한 안톤의 실착이었다.
만약 상대가 더 독한 마음을 품고 완전히 동귀어진을 노렸다면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과정이야 어떻든 안톤이 그의 공격을 무사히 피해낸 것은 사실.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안의 팔뚝을 찌르고 지나가 허공을 가르던 안톤의 검이 도중에 멈췄다. 대검의 무게와 속도를 생각하면, 범인들의 물리 법칙은 아득히 초월한 팔뚝 힘이었다.
물론 중간에 검을 멈춰세운 것으로 끝을 낼 생각은 아니었다.
"좋은 수였소."
"참으로 아쉽도다."
제자리에 일시적으로 멈췄던 대검이 위에서 아래로 사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촤아아앗!
이안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두 조각으로 분리되며 피분수가 튀었다.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좌중에서 함성 혹은 경악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와아아아! 검신이 단칼에 적장을 베어냈다!"
"검신은 무적이다!"
그들은 안톤이 아주 손쉽게 이안을 꺾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기사 결과적으로 고작 검을 두어번 휘두르며 양단해버렸으니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뿌우우우.
짧지만 치열했던 한 차례의 승부가 끝나고, 함성이 잦아들기도 전에 적군의 뿔피리 소리가 평원을 가득 메웠다. 적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군하기 시작하자, 아군 진영 또한 전열을 가다듬고 앞으로 뻗어나갔다.
쿵쿵!
최후의 전쟁이 마침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