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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6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6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63화

163. 족적

 

 

볼-메이르 왕국의 수도 에르넨.

 

그 목적지를 향하며 안톤은 평범한 여행객을 연기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총 일곱 개의 도시와 마을을 지나치며 총 보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고, 이윽고 오늘이 되어서 안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페르트를 찾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수상하단 말이지. 대체 펠샤인은 여기서 뭘 하려는 거지?'

 

목적지에 가까워질 수록 도시들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하게 변했다.

 

삼험한 기세의 병사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위압감을 준달까.

 

게다가 안 그래도 무뚝뚝한 병사들은 여행객 신분인 안톤에겐 훨씬 배타적이고 경계적이었다.

 

"지금은 여행객의 출입이 불가하니, 돌아가시오."

 

이는 에르넨에 막 도착했을 때 성문 경비가 한 말이었다.

 

안톤은 그의 꼿꼿한 태도에 소란이 벌어지지 않게끔 별 말 없이 등을 돌렸다. 물론 경비가 그렇게 말을 했다고, 안톤이 도시로 들어갈 생각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물러가는 척 했던 안톤은 성과 멀찍이 떨어진 숲가에서 밤이 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밤이 되자 아무도 보지 못하게 재빨리 성벽을 뛰어넘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변한 그의 몸은 착지할 때, 큰 소음조차 일지 않았다.

 

솨아.

 

도시에 들어서자 스산한 밤 공기가 안톤의 볼을 훑고 지나갔다.

 

'암만 한밤중이라도 일국의 수도인데 이리도 사람이 없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횃불로 어둠을 거둬내며 대로를 배회하는 병사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이런 야간 근무면 잡담이라도 나눌만도 한데, 그들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묵묵히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이쪽으로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만 들렸다.

 

처벅. 처벅.

 

안톤은 얼른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 후, 병사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은밀하게 그들을 관찰했다.

 

그저 탁하고 멍할 뿐, 병사들의 눈에는 이지가 없었다.

 

이를 확인한 안톤은 당초의 계획을 모두 무르기로 결정했다.

 

원래는 일단 도시로 진입한 후, 병사들을 제압해서 자초지종을 들을 셈이었다.

 

근데 이미 펠샤인의 정신 지배에 이미 당한 모양인데, 저 상태로는 암만 열성적으로 심문을 한들 원하는 답을 듣기는 힘드리라.

 

그렇게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던 안톤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살짝 열려진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어린 소녀의 눈이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창문 너머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는 누구야? 거기서 뭐해?"

 

안톤은 검지로 입을 가렸다. 조용히 해주기를 부탁하는 제스쳐였다.

 

다행히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춰주었다.

 

"밤에 거리에 있으면 혼난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아저씨는 혼나고 싶은 거야?"

 

당돌하면서도 순수한 질문에 안톤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도 어쩌면 이 소녀를 통해 간략적인 정보 수집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잽싸게 입을 열었다.

 

"꼬마야. 너는 왜 밤에 거리에 있으면 혼나는지 알고 있니?"

 

"응. 아저씨는 그것도 몰라?"

 

"...한 번 말해 줄 수 있을까?"

 

"어른들이 밤에 돌아다니면 첩자로 의심받는다고 그랬어. 아! 혹시 아저씨는 첩자야?"

 

"...그렇지 않단다."

 

딱히 소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안톤은 어린 아이를 속인단 생각에 살짝 치미는 죄책감을 잠재우고 다시 물었다.

 

"왜 첩자를 경계하는지 그 이유도 아니? 볼-메이르는 전쟁도 하고 있지 않은데 말이야."

 

"전쟁? 그건 잘 모르겠고. 할아버지는 이게 다 왕이 미쳐서 그런 거라던데? 엄마는 항상 괜한 말하지 말라고 그러고."

 

왕이 미쳤다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안톤의 추측이 맞다면 이 또한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안톤은 소녀를 향해 마지막으로 질문을 날렸다.

 

"첩자는 아니고, 그냥 평범한 여행객이란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데 여기서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이 있는지 알 수 있겠니? 이 아저씨도 괜한 일로 어른들에게 혼나는 일은 피하고 싶구나."

 

안톤의 질문에 소녀가 곰곰히 생각하다 말했다.

 

"광장 옆에 있는 훈련소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그랬어. 아들을 보려던 아저씨도 몰래 거기에 들어가다 잡혀서 죽었는 걸."

 

죽음을 말하는 것 치고는 소녀의 모습은 너무 명랑했다.

 

위화감을 느낀 안톤이 입술을 질겅 씹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죽음이 뭘 뜻하는지도 알고 있니?"

 

"아저씨는 자꾸 이상한 걸 묻네. 당연히 알지. 우리 아빠도 군인들한테 죽었는 걸? 이제 못보는 건 슬프지만... 아빠는 하늘 나라에 가서 행복하게 지낼 거라고 엄마가 그랬어."

 

"...그랬구나."

 

소녀의 몇 마디 말만으로도 안톤은 대략 소녀의 가정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딱히 내색은 못하고 속으로만 참담함을 금치 못하던 때, 소녀가 재차 안톤을 보며 물었다.

 

"근데 조금 이상한 건 내가 따라가겠다고 하면 항상 엄마는 화를 내더라고. 아저씨는 어른이니까 왜 그런지도 알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

 

순수하게 눈을 빛내는 소녀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 안톤은 대충 둘러댔다.

 

비록 점점 커가며 자연스레 진실을 마주하게 되겠지만, 결코 지금은 아니었다.

 

"...아마 엄마는 오랫동안 너를 옆에서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구나."

 

"아! 그런 거였구나. 근데 그럼 엄마도 같이 가면 될 텐데..."

 

말꼬리를 흐리는 소녀를 보며, 안톤은 슬슬 이곳을 벗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서부터 병사들의 육중한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튼 내 질문에 대답해주어서 고맙구나. 그럼 오늘 날 만났던 건 어머니에게도 비밀로 해줄 수 있겠니?"

 

"알았어. 근데 이거 하나만 더 알려주고 가. 아저씨는 진짜로 첩자야?"

 

소녀는 마지막까지 그 사실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던 안톤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자아내며 말했다.

 

"그래, 첩자다."

 

안톤의 대답에 소녀가 작게 환성을 내질렀다.

 

"와아! 알았어. 오늘 일은 꼭 비밀로 할게!"

 

소녀의 세계에선 첩자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아무래도 긍정적인 의미일 것이라고 추정만 할 뿐이다.

 

소녀로부터 등을 돌린 안톤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안톤이 아무리 노력한들 소녀가 잃어야만 했던 것을 돌려놓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 무언가 잃는 일은 막아야 했다.

 

그것이 안톤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번 일에는 안톤의 책임이 결코 없다 할 수 없었으니까.

 

"후우!"

 

입술이 썼다.

 

소녀가 부친을 잃게 된 것에는 안톤의 잘못도 있었다.

 

물론 그가 펠샤인의 행동을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안톤은 펠샤인이 어떤 짓을 벌일지 알면서도 방관했다.

 

해린에서의 연회 중에 펠샤인이 볼-메이르 왕국을 장악했다고 자랑하듯 말했을 때, 안톤은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아니, 솔직히 전력이 더 늘어났다는 것에 내심 기뻐했다.

 

그때 안톤은 펠샤인에게 지배당한 왕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전쟁터로 내몰릴 인간들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나도 추하군. 그저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을...'

 

어쩌면 이는 전생에서 그가 오랜 전쟁을 겪온 탓일지도 몰랐다.

 

과거의 그는 거대한 전쟁에 휩쓸린 일개 말, 아니 그조차도 안 되는 조무래기였다.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참상들과 희생들이 개인으로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때와 나는 완전히 다른데 말이지.'

 

전생과 달리 이제 안톤에겐 힘이 있고 권력도 있다.

 

비록 어엿한 감투를 쓴 건 아니지만, 안톤의 말에 따라 오개 국가의 연합군인 위그드라실의 행보가 바뀐다.

 

만약 그때 안톤이 펠샤인에게 볼-메이르를 자유롭게 놓아주라고, 그렇게 확실히 말했다면 저 소녀는 부친을 잃지 않아도 됐을지 몰랐다.

 

'어쩌면 대륙 여기저기에 내가 매듭지어야 할 일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어.'

 

예전의 안톤은 시대의 거인들을 동경했다. 그래서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허나 막상 그 자리에 오르니 상상 이상으로 거추장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인의 일보는 한 걸음을 뻗을 때마다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누군가 그 걸음걸이에 집을 잃고 소중한 걸 빼앗겨도, 그러한 거인들은 대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본인의 목적을 향해서만 꿋꿋히 나아간다.

 

허나 안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그가 만들어낸 참상을 마주하며 괴로워하곤 했다.

 

'만약 이 거짓된 세상에도 업이란 것이 있다면, 이는 오로지 내가 속죄해야할 업이겠지.'

 

나중에 이 모든 것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땐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되돌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허나 이는 선결 과제를 이루고 난 뒤의 있을 일.

 

안톤은 눈앞에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소녀와 헤어지고서 무작정 도시를 배회한 안톤은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옆에 있는 훈련소이니 어찌되든 일단 광장만 찾으면 되리란 생각이었고, 그 판단은 옳았다.

 

'저기가 그 훈련소인가.'

 

밖에선 결코 안을 엿보지 못할 정도로 견고하며 높게 쌓아올려진 담장.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그 주변에는 병사들이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쓱 주변을 둘러보던 중 그나마 경계가 허술한 지점을 찾은 안톤이 단숨에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눈으로 쫓기 어려울만큼 신속했고 은밀했다.

 

착.

 

훈련소 내부에 착지한 안톤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마치 밤이 이곳만을 빗겨가기라도 하듯, 훈련소 안은 아주 밝았다.

 

그리고 어디선가로부터 열띤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하압! 하압!"

 

안톤은 그 소리를 따라 훈련소 내부 깊숙이 들어갔고, 그럴 수록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이윽고 도착한 넓은 공터.

 

건물 벽 옆에 진 그림자에 몸을 숨긴 안톤이 그곳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한밤중에도 훈련을 한다고?'

 

공터에선 병사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적어도 수백 명은 족히 되어 보였고, 들려오는 기합 소리를 제외하면 대화라곤 전무했다.

 

조금 신기한 것은 그런 장소에 교관이 없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한계에 이르러서도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른다는 것이었다.

 

"흐읏."

 

육신의 기력을 지나치게 쥐어짠 탓일까.

 

검을 휘두르던 한 병사가 쓰러졌다. 허나 그럼에도 주변의 병사들은 관심하나 주지 않고 제 훈련을 하기 바빴다.

 

쓰러진 병사는 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일어나 다시 검을 휘둘렀다.

 

안톤은 그들이 이런 비이상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 원인이, 펠샤인의 세뇌 때문임을 즉각 눈치챘다.

 

'이런 미친 훈련을 했으니 전생에서도 그렇게 단시간에 정예병을 만들어낸 거겠지.'

 

그래도 암만 그렇지, 이러다간 훈련 도중에 죽는 병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병사들은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혹 누군가의 부모이리라.

 

어서 펠샤인을 찾아내 이 미친 짓을 멈춰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하던 때였다.

 

"그만!"

 

훈련장에 등장한 어느 장교의 외침에, 병사들이 일제히 하던 동작을 멈춰세웠다.

 

안톤은 그 장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옮겼다.

 

'생각보다 쉽게 찾았군. 페르트 키아트레스.'

 

어둠 속에 숨어 좌중을 지켜보던 안톤의 눈이 서슬퍼런 빛을 자아냈다.

 

마침내 찾던 목표를 발견한 것이긴 하나, 안톤은 당장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봤다.

 

"이제 막사로 복귀해 쉬어라."

 

어느 군대라도 지휘관이 말을 하면 병사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기 마련인데, 이곳에선 그럴 일이 없었다.

 

병사들은 그저 아무런 말없이 해산하여 잠자리로 향했고, 페르트 또한 그게 당연하다는 듯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병사들이 모두 막사로 돌아가고, 이제 혼자 남은 페르트도 이곳을 막 등지던 때.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안톤의 신형이 그를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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