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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61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0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61화

161. 후대

 

 

"이곳은 여전하군."

 

중앙의 연병장에서 노예들이 열띤 함성과 함께 구슬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른다.

 

너무도 눈에 익은 그 모습에 묘한 감흥이 일었다.

 

과거 콜로세움에서 탈출할 당시, 벨토스의 죽음으로 인해 당연히 와해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건재할 줄이야.

 

'그러고보니 모든 게 여기서 시작됐군.'

 

지난 번 삶에서도 그랬고, 이번 삶에서도 그랬다.

 

여기 벨토스 노예 검투사 양성소에서 안톤의 삶은 변했다.

 

여기서 처음 검을 쥐었고, 그후 지금까지 검의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

 

오로지 가진 게 검 뿐이었던 노예는 영주의 마음에 들어 기사가 되었고, 이윽고 과거로 돌아와 여러 인연들을 맺으며 명인으로까지 성장했다.

 

그렇게 선택받은 자들만의 경지라 여겼던 마스터들을 아래로 내려보게 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륙의 명운을 손에 쥔 책무를 떠맡았다.

 

마치 이야기 속에나 나올 듯한 삶.

 

저기 양성소 안에서 열렬히 검을 휘두르는 노예들을 보며, 어쩌면 그런 삶의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을지 모른다고 안톤은 생각했다.

 

그런 안톤의 감상을 멋대로 읽은 검령이 퉁명스레 말했다.

 

[쓰잘데기 없는 동정심이군. 저 노예들은 관리자가 직접 운명을 부여한 너와 다르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보니 그게 운명의 늪에서 헤어난 네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군.]

 

검령의 말을 듣고서야 그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톤이 팔찌에서부터 대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노예들이라도 풀어줄 작정이냐? 그만둬라.]

 

"걱정마라. 별로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다. 왜 이리도 미련한 거냐?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그저 방관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네겐 저들을 책임질 시간이 없다.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세계를 구하는 것 말인가?"

 

[그래. 결과적으로 너는 네 일에 집중하는 것이 저들을 돕는 거나 마찬가지다. 정 저들이 눈에 걸린다면 나중에 모든 게 끝나고 다시 오면 되는 것 아니냐?]

 

당장에라도 뛰어내릴 것 같던 안톤의 몸이 멈췄다.

 

검령의 말은 계산적이고 합리적이었지만 구구절절 옳았다.

 

현실적으로 지금 안톤이 그들을 구해내 끝까지 책임지는 일은 무리였다.

 

대책없이 풀어만 주고 끝낸다면, 기껏 구해낸 이들 중 상당수가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될 것이 분명했다.

 

노예 신분을 탈피 한들, 그 정신을 고쳐먹지 않으면 결국 노예로서 세상이란 괴물에 잡아먹힐 뿐이니까.

 

[안톤. 모두가 네 놈처럼 강한 게 아니다. 인정해라.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직접 그들의 운명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내일 하루를 더 살아갈 수 있게 해 한낱 가능성을 쥐어주는 것 뿐이라는 걸.]

 

"...알겠다."

 

검령의 설득에 안톤이 뜻을 꺾고 도로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필시 근시일 내에 돌아오리라 결심하며 막 위스퍼 스톤을 꺼냈다.

 

일단은 카린과 연락을 한 후 향후 행보를 결정할 생각이었고, 만약 여건이 된다면 여기 노예 검투사 양성소에 대한 것도 그녀에게 대신 신경 써달라 할 요량이었다.

 

그때였다.

 

[피해라!]

 

안톤이 서 있던 지면 아래에서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입을 벌리며 모든 걸 집어 삼켰다.

 

만약 검령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당해버렸을지도 몰랐을 정도로 불시에 치러진 기습이었다.

 

[이 기운은 켈바브군. 어떻게 알고 벌써 찾아온 거지?]

 

위로 도약해 단숨에 상공으로 뛰어오른 안톤의 머릿속에 검령의 말이 또다시 울렸다.

 

[다른 놈도 있다. 조심해라!]

 

콰아아앙!

 

거대한 화염구가 안톤의 몸체를 향해 날아들었다.

 

안톤은 검으로 이를 양분한 뒤, 잽싸게 천근추의 묘리를 발휘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불멸자라고 했던가.

 

화염의 깃털을 휘날리는 초월체 위에는 아르토르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이것도 썩 나쁘진 않군요."

 

어찌저찌 바깥으로 나왔으나 결국 전장만 바뀐 격.

 

안톤이 침성을 삼켜냈다.

 

아무리 그들의 권능이 약해지고, 그에 반해 자신은 상대적으로 강해졌다고 한들.

 

오히려 검령이 그의 속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 외의 유일한 아군이었던 아넨은 옆에 없다.

 

"당신 하나 잡겠다고 다 제쳐두고 왔으니, 이만 죽어주시죠."

 

백호가 예리한 발톱이 달린 앞발을 휘둘러왔다.

 

근원에서 봤던 것보단 훨씬 몸체가 작아져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 대만 맞아도 목숨이 위험하다고.

 

휘이익!

 

피하는 즉시 불길이 날아들고, 거신이 쏘아낸 광선이 안톤을 노려왔다.

 

안톤은 즉시 목 뒤의 혈도를 짚어 각성 상태로 들어섰다.

 

시간이 느려진 것만 같은 착각.

 

지금껏 그 시간 속에서는 늘 안톤만이 자유롭게 움직였으나, 이번엔 아니었다.

 

콰쾅!

 

휘이이이잇!

 

범인의 눈으로는 잔상조차 보는 것이 힘에 겨운 공방이 이어진다.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적들 중 하나라도 해치워야 한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만한 틈은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제대로된 반격은 할 기회도 없이 안톤은 그들의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기 여념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길 얼마나 지났을까.

 

안톤은 천검술을 대성한 후, 처음으로 무한한 줄 알았던 정신력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공격하는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그 공격들을 막고 피하면서 빠르게 정신력이 소모되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이로써 안톤은 장기전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뭐, 애초부터 그것은 불가능하긴 했다만.

 

스르릇!

 

안톤의 행동을 지켜보며 분석하던 아르토르가 미소 지었다.

 

"자꾸 비슷한 경로의 공격들만 막아내는 게 의아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나요? "

 

아르토르가 벨토스 노예 검투사 양성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보니 저긴 당신의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죠. 분명 좋았던 기억은 없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이를 지키겠다고 하다니, 아! 혹시 저기 있는 노예들이 걱정이라도 된 걸까요?"

 

씨익.

 

아르토르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고, 이와 동시에 불멸자가 뿜어낸 불덩이가 아르토르가 가리킨 지점을 향해 쏘아졌다.

 

안톤은 서둘러 몸을 틀어 도약해 이를 공중에서 분해시켰다.

 

자신이 지시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셈이지만, 아르토르는 기쁜 듯 몸을 떨었다.

 

"당신은 정말 영웅 그 자체군요! 덕분에 쉽겠습니다!"

 

"망할 새끼."

 

간만에 안톤의 입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충분히 눈에 그려진 덕분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초월체들의 공격은 이제 안톤을 향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지점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안톤을 상대함에 있어 효과적이었다.

 

어떻게든 공격들을 피하며 정신력 소모를 줄이던 안톤이, 그들이 쏟아내는 모든 공격들을 피하지 않고 막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고집 부리지 마라 안톤. 어차피 네가 당하면 저들도 끝이다.]

 

검령의 충고에 속에서 울분이 치솟았다.

 

대체 얼마나 더 강해져야 모든 걸 지킬 수 있는 것일까.

 

과거의 세계에서 아르토르를 상대하며 친부를 버려야했던 경험이 떠올라 그 감정은 더욱 격해졌다.

 

[모든 걸 지킬 순 없다. 그때 네가 했던대로 우선순위를 정해라. 이 세계 모든 것과 저기 있을 노예들의 목숨들 중 뭐가 더 중요하지? 난 네 녀석을 강제할 수 없다. 자, 네가 선택해라.]

 

검령의 말대로 우선 순위를 생각하던 중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뭐라고 그들의 목숨을 저울에 올린단 말인가.

 

안톤은 새삼 자신에게 주어진 막대한 책임을 실감했다.

 

안 그래도 빠르게 지쳐가는 육신에, 무형의 중압감마저 더해졌다.

 

[길게 생각할 시간은 없다.]

 

결국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모두 비겁하다.

 

모든 선택을 남의 손에 맡겨버리면, 그게 노예랑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젠장!"

 

마냥 눈이라도 감아버리면 속이 좀 편할까 싶지만, 이 와중에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결국 안톤은 두눈을 똑바로 뜬 채로 공격이 날아드는 경로에서 벗어났다.

 

이제 곧 저기 검투사 양성소의 부지가 처참하게 파괴되고,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은 고통조차 느낄 새 없이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런데 뜻밖의 이변이 나타났다.

 

그것은 정말 말그대로 구원의 빛이었다.

 

"아넨!"

 

어디선가 나타난 빛의 장막이 양성소를 향해 날아드는 모든 공격을 상쇄시켰다.

 

[여긴 제가 막을 테니 당신은 전투에 집중해요!]

 

그리고 이러한 이변은 아넨의 등장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막 검을 쥐고 다시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하려는 찰나.

 

쿠구궁!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균열이 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으로 초록색의 기호들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할 어느 존재를 향해, 아르토르가 입을 열었다.

 

"기록자... 지켜보고 기록만 할 뿐인 당신이 여길 왜!"

 

자신만만하던 아르토르의 얼굴이 굳어진다.

 

아마 그로서도 이 등장은 상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인간들의 말로는 자업자득이라고 하던가. 네놈으로 인해 모든 미래의 역사는 엉망진창이 되어 붕괴했다. 이제 앞으로의 기록은 저 인간의 손에... 아니 모든 존재에 의해 새롭게 쓰인다. 때문에 나 역시 이제 지켜보기만 할 필요가 없어졌다.]

 

기록자의 말이 끝나자 아르토르가 소리쳤다.

 

"왜 그렇게 이 세계에 미련이 많은 겁니까. 당신들은! 정말 멍청하게 관리자에게만 이용당할 뿐이란 걸 모르는 겁니까?"

 

[어찌하여 틀림을 논하는가. 그저 각기의 입장이 다를 뿐인 것을...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네놈이 갈구하던 자유로운 세계이지 않은가?]

 

안톤은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일단 확실한 건 열세에 몰려있던 자신의 상황이 반전했다는 것 뿐.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는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이미 우릴 구속하던 관리자는 없어진지 오래이다.]

 

"관리자가 없다고...?"

 

[그렇다. 그저 완벽한 안배를 해두고 간 덕에 지금껏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렇다면 더더욱 당신들이 이 세계를 지킬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어째서! 대체 어째서 날 방해하려는 것이냐!"

 

[누구도 널 지배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대체 네 녀석이 원망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

 

옆에서 듣기엔 동문서답 같았으나, 누군가에겐 아니었던 모양.

 

모든 걸 궤뚫는 듯한 기록자의 말에 아르토르가 입을 다물었다.

 

저 녀석이 말로 누군가에게 지는 광경을 보다니, 일단 세상은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넋을 잃은 아르토르를 보던 어둠이 일렁인다.

 

[이봐, 기록자 미안하지만 계속 지켜보진 않으마. 내겐 나의 입장이 있는 것이니 말이야.]

 

[미안해 하지 않아도 좋다. 서로의 입장이 다른 것 뿐이니까. 그러니 나도 미안해 하지 않겠다.]

 

찌지지직.

 

충격이 가해진 유리처럼 공간의 실금이 퍼져 나간다.

 

[구도자! 내게 힘을 보태라.]

 

[알았어요.]

 

양성소 주변을 보호하던 반구 형태의 빛 장벽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는 균열이 시작된 중심부로 스며들어갔다.

 

[뭔 짓을 하려는 거냐!]

 

[우리 같은 세계의 망령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방해할 뿐이니, 나와 모두 같이 가자꾸나.]

 

기록자의 중얼거림이 끝나는 순간.

 

공간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실금으로부터 빛이 터져나왔다.

 

부정한 모든 것들을 태워버릴 듯한 찬란한 빛이었다.

 

[드디어 해방인가.]

 

아르토르에게 힘을 보태겠다던 거신과 백호, 그리고 불멸자 역시 아무런 항거 없이 빛을 받아들였다.

 

관리자가 없다는 기록자의 말이 그들의 심경을 변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빛을 상대로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것이 있었다.

 

[이런 개자식이!]

 

[파멸자. 순순히 영면에 들려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다른 꿍꿍이가 있었나보군.]

 

[내가 이렇게 갈 것 같으냐!]

 

어둠이 터져나오며 쏟아지는 빛무리를 막아섰다.

 

그리고.

 

[혼자서 무슨 계획을 세웠던 건진 모르겠지만, 그만 해라. 켈바브.]

 

[우리가 돕지. 기록자.]

 

거신과 백호의 존재가 무로 돌아가며,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욱 강렬하게 변했다.

 

그리고

 

번뜩!

 

한 차례의 섬광이 모든 것을 뒤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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