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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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59화
159. 신화
부르르르.
타닷. 타닷.
땅이 흔들리고 천장이 흔들린다.
벽과 지면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며 파생된 균열에서 흙 부스러기가 후두두 쏟아져 내렸다.
촤앗!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결계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허나 물이라도 베고 지나간 것마냥 검의 궤적만이 표면에 남을 뿐.
결계는 안톤의 천검술로도 베어낼 수 없었다.
또한 안톤의 능력이나 소유한 아티팩트를 아르토르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트릭씰도 이 구역 내에선 먹통이었다.
'당장의 회피는 무린가.'
안톤은 검을 꽉 쥐고 아르토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당장 달려나가 그의 목을 쳐 버리기엔 뭔가 걸리는 점들이 있어서 지켜보자는 판단을 내린 것인데,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
지면에 생겨있던 실금들이 거미줄처럼 퍼지며, 바닥이 무너졌다.
콰아아아앙!
전신에 가득한 부유감.
허공에 뜬 안톤은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어둠이 그곳에 있었다.
마치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안톤의 추락은 상당 시간 계속됐다.
그동안에도 마냥 떨어지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안톤은 낙하 중인 와중에도 옆에서 평행선을 그리며 어둠을 향해가는 아르토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딱히 소용은 없었다.
아무런 지지대도 없는 안톤과 다르게, 그는 어둠 속에서 아주 자유롭게 운신을 하고 있었으니까.
"쓰잘데기 없이 이런데다 힘을 쓰지 말고 슬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르토르의 중얼거림과 함께 어둠의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다.
안톤은 그제서야 검에 집중하던 천검술의 묘리를 거두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거대한 충격이 오리란 예상과 달리.
어둠은 아주 포근하게 그를 반겨주었다.
수우웅!
바다. 아니 늪에 빠진 것만 같은 감각.
분명히 무언가를 밟고 서 있었지만, 동시에 어딘가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근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안톤. 아마 당신은 이곳에 온 최초의 인간이 되겠군요. 아, 물론 마지막도 되겠지만요."
아르토르는 안톤의 검이 닿는 영역의 가장 끝 부분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원이라고...?"
안톤의 중얼거림에 아르토르가 광대처럼 웃었다.
"세계의 축이 모인 중심지. 모든 신화 속 존재와 고대의 역사가 함께 숨을 쉬는 곳. 이곳은 어디라도 될 수 있습니다."
탁.
아르토르가 손뼉을 치자, 주위의 공간이 변했다.
바닥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났고, 안톤이 본 어떤 천년거목보다도 우람한 나무들이 수 십, 수 백 개가 자라났다. 알프도니아의 미궁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괴물들이 지면은 물론 하늘에 가득했다.
끄오오오오!
허나 이곳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그 어느것도 안톤이나 아르토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마치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대체 뭔 짓을 벌이려는 것이냐.]
그것은 안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마치 전음처럼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내리꽂히는 듯한 음성에 안톤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금방 그 음성이 어디서 전해졌는지 깨달았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과장없이 산만큼이나 거대한 짐승이 조용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르토르가 하얀 갈기의 짐승을 보며 중얼거렸다.
"반 테일."
안톤이 화들짝 놀랐다.
반 테일이라는 이름 정도는 안톤도 들어본 적 있었다.
유일신 아넨이 대륙에 나타나기 전, 고대의 대륙을 지배했던 마수들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대의 존재여."
"베놀라의 자식이 이곳에 무슨 일이지?"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모두가 모이면 그때 얘기해드리겠습니다. 아, 벌써 한 분 더 오셨군요."
지지지직.
천공에 가득하던 먹구름이 갈라지며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진다.
그것은 무언가의 발이었다.
"거신 자이안."
[왜 혼란을 벌이려는가.]
마찬가지로 백호 반 테일과 같이 고대 시절의 정점으로 군림했다는 신화 속 존재.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온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흔들렸다.
쿠우우웅!
고대의 존재의 등장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안톤의 뒤편에 위치한 공간에 균열이 생기더니, 하늘을 뒤덮는 크기의 해일이 그곳으로부터 발생했다.
솨사사사사!
압도적인 광경에 몸이 굳은 것도 잠시.
다행히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갈 기세였던 해일은 어느 정도 그들과 떨어진 지점에서 멈추었다.
"백경 모비딕."
그저 그림자처럼 거대한 생명체의 윤곽만이 얼핏 보일 뿐.
안톤은 그 존재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검푸른 해일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붉은빛의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고대의 존재들은 계속해서 요란하게 등장했다.
새파란 낮에 어둠이 찾아왔고,
또한 어둠을 헤치며 빛이 찾아왔다.
"파멸자와 구도자가 함께 오셨군요."
[재미난 일을 벌이고 있구나. 아이야.]
[당장 멈추세요. 이렇게 우리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관리자도 잠자코 지켜보지 않을 겁니다.]
이제 안톤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불려나온 이들이 안톤과 같은 세계의 사도들이라는 것을.
파멸자와 구도자.
대체 무슨 임무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행자인 자신과 마찬가지로 관리자에게 부여된 운명을 지니고 있을 터.
그런 아득한 초월체의 경고에도 아르토르는 그저 미소지었다.
"놀랍지 않나요 안톤? 당신은 인간이지만 저들과 동등합니다. 아니, 오히려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죠. 당신에 안에는 또다른 초월체가 존재하니까. 그럼 슬슬 나오시겠습니까? 심판자."
안톤의 손을 타고 반투명한 상태의 꼬마가 나타났다.
조르디가 검의 제단에서 보았던 그 검령이었다.
[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랬는데 말이지. 이봐,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어차피 기록자는 어디선가 보고 있을 테고, 균형을 중시하시는 수호자께선 오시지 않을 것 같으니 슬슬 얘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르토르가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말했다.
"저는 새로운 관리자가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걸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뭔가 해서 와봤더니 들을 필요도 없는 얘기였군. 나는 이만 가보겠다.]
흥미를 잃은 듯 어둠이 물러가려 하자, 아르토르가 이를 붙잡았다.
"불멸자께서는 이미 저를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호오. 그 녀석이?]
"제가 무슨 제안을 했길래 그분의 마음이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말해봐라.]
그 대답의 여하에 따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듯, 어둠이 스멀스멀 움직였다.
"여러분들이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충분히 인정했으리라 봅니다. 제가 관리자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제가 관리자가 되면 여러분을 모두 죽여드리겠습니다."
그의 호언장담에 안톤이 놀랐다.
이런 초월체들을 불러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저런 뜬금없는 통보라니.
분명 협력을 바라겠다는 태도로는 거리가 멀어보였지만, 초월체들에게는 또 다르게 들린 모양이었다.
어둠이 기쁜 듯 일렁였다.
[이 지긋지긋한 사명에서 해방될 수 있다니, 그건 좀 흥미롭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우리가 사라지면 이 세계도 끝이에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당신은?]
"대통합."
아르토르의 말에 일동이 술렁였다.
[정신이 나갔군.]
[확실히 완전히 불가능한 말은 아니네요.]
[그래. 이제 천상인들은 존재치 않으니까.]
[네 녀석은 정말로 신이라도 될 셈인가?]
아까부터 안톤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멋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안톤이 입을 열었다.
"대통합이 대체 뭐지?"
"이미 한 번 차원을 넘나든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겁니다. 다른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걸."
안톤도 이세계의 관리자인 릴리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천상인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창조한 것이, 이 세계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해라."
"대통합. 그 단어만 들어도 감이 잡히지 않으신가요? 천상인이 떠난 지금 모든 세계들은 불완전합니다. 그저 세계의 축에 의지해 어떻게든 형태만 유지하고 있을 뿐. 발전이라곤 전무하죠."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는 이를 모두 합칠 겁니다. 그로 말미암아 반드시 완성된 세계를 내 손으로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운명이란 이름 하에 자유를 빼앗기지 않아도 되는 세계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거신의 중후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자칫하면 모든 게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렇겠죠.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왜 그걸 우리가 책임져야 하죠?"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고 방식이다. 너 같은 놈이 만들어질 줄이야. 이건 명백한 버그군.]
"천상인은 이제 없는데다가, 관리자 또한 세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바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아르토르의 뻔뻔한 말에 어둠이 한 차례 일렁였다.
[이건... 재미있군. 난 네 녀석의 제안을 따르겠다.]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어둠을 물러내기라도 하듯 빛이 광채를 내뿜었다.
[켈바브! 당신 정말 저런 말에 넘어갈 생각이에요?]
[아넨. 네 년도 알지 않느냐? 나는 원래 이런 식으로 태어났다는 걸. 자, 진혈종 놈. 이제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
"제 제안을 거절한 분들에게서 사명을 빼앗아주시면 됩니다."
아르토르의 간결한 말에 어둠이 조소했다.
[크큭. 우리끼리 싸우란 말이군.]
[미쳤군요. 당신은! 이대로 지켜볼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생성된 빛의 화살이 아르토르를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어둠의 장벽이 이를 감싸 않으며 상쇄시켰다.
지이이잉!
무언가 폭발했다기 보다는 무언가 찢겨져 나갔다는 묘사가 어울릴 굉음.
순간 고막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에서 이명이 생겨났다.
[자, 이제 편 가르기를 할 시간이군. 다들 가만 있지 말고 어서 의견을 내보시지.]
초월체들이 내뿜는 기세 싸움.
이건 단순히 살벌한 분위기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눈짓만으로 공간이 짓물리고, 깨져나갔다.
안톤도 일단 그들과 같은 사도이기는 했으나,그들은 이 공간에서 만큼은 비교가 불가한 힘을 선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편 가르기의 결과는 예상외로 금방 나왔다.
[후후. 반 테일. 자이안. 네 녀석들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줄 알았다.]
[우린 오래된 사명에 지쳤다.]
[이 속박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는 행하겠다.]
그들의 힘을 등에 업은 어둠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이봐. 모던. 물 속에 모습을 감춘 채 아무말 않는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걸로 해석해도 되겠지?]
[...]
해일 속에 모습을 감춘 존재가 침묵했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둠이 출렁였다.
[자, 이제 너만 남았군 아넨. 그럼 이제 어쩔 거지? 혼자 우리들과 맞설 생각인가?]
수적열세에 몰린 빛이 주춤하며 갈팡질팡 하기 시작했다.
망설이다간 그 마저도 등을 돌릴지 모른단 불안감에 안톤이 나섰다.
"혼자가 아니다."
[그래. 네 놈도 있었지.]
마치 전력으로 상정하지도 않는 듯한 말투였다.
간만에 느껴본 모멸감에 안톤이 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런 안톤의 등을 떠미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안톤의 몸에서 나타났던 검령이었다.
[나도 있다 이 놈아.]
[심판자. 네 선택은 의외군. 가장 나와 비슷한 사고 방식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르토르라고 했던가? 집행자의 안에서 본 바로는, 저 놈은 믿을 놈이 못 돼. 단지 그 뿐이다.]
[선택은 존중하지. 자, 그럼 이제 얼추 수가 맞는군.]
백호. 거신. 어둠.
빛. 안톤. 검령.
일단은 이렇게 3:3의 구도가 펼쳐다.
비록 수는 비등했으나, 어느 쪽이 열세인지는 명백했다.
현 상황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아르토르가 웃음을 흘렸다.
그의 의도가 훤히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이독제독이라고 하던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공간에 떠민 것인가 싶었는데, 이제보니 녀석은 이런 초월체들을 이용해 안톤을 해치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네 생각대로는 안 될 거다. 아르토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안톤의 머릿속이 빠릿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