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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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58화
158. 제안
내일의 해가 밝았다.
안톤은 테피로스를 따라 황궁에 들어선 뒤, 곧장 그와 헤어져 경로를 따라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황제가 회의를 가기 위해 떠나고 빈 침실에는, 스무 명 가량의 시녀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톤은 침실과 연결된 정원의 수풀에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대략 두 시간 정도가 흐르자 시녀들이 휴식을 위해 밖으로 나갔고, 안톤은 기다렸다는 듯 침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침실을 샅샅이 뒤졌다.
이곳에 지하 예배당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정확히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안톤도 몰랐다.
때문에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기 위해, 테피로스에게 자문을 구해 방 배치도를 그려 짐작이 가는 곳을 추렸고, 이를 집중적으로 탐색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았군.'
찰칵.
안톤은 벽난로 부위에서 기관 장치로 보이는 이음새를 찾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음새를 조작하니 벽난로가 미는대로 술술 옆으로 밀려났다.
스르르르.
안톤은 머뭇거리지 않고 어두운 계단 아래로 내려간 다음 벽난로를 닫았다.
이로 인해 공간에는 한 줌의 빛도 존재치 않게되었지만 안톤은 서슴없이 발을 뻗었다.
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아래에서 올라오는 빛으로 인해 장내는 점점 밝아졌다.
탁.
문득 계단을 내려가던 안톤이 발을 멈췄다.
'이건...'
심상치 않은 요력이 지하에서부터 스멀스멀 풍겨오고 있었다. 안톤이 만나본 그 어떤 누구보다도 강대한 요력이었다.
'이런 자가 있었나?'
놀랍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일단 팔찌로부터 대검을 꺼낸 안톤은 멈춘 발을 움직였다. 만약 이곳에서 싸움이 불가결하다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터벅 터벅.
계단이 끝나고 공동이 나타났다.
공동은 안톤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하 예배당이라더니, 공동에서는 예배당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하라는 느낌조차 말이다.
마치 어느 건물에 잘 꾸며진 방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왔군요."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안톤을 반겼다. 안톤도 이제 도무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의 남자였다.
"아르토르."
그가 앞에 테이블에 거하게 차려진 다과를 권했다.
아주 능청스런 몸짓이었다.
"좀 드시겠습니까?"
그의 제안에 안톤도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
다과상에는 두 잔의 찻잔이 놓여져 있었고,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이 시간에 안톤이 찾아오리란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와도 동일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수작이라니요? 차에 독 같은 걸 타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뭐, 독 따위로 당신을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지만요."
동문서답이나 하는 아르토르를 상대로, 안톤이 딱 잘라 물었다.
"카를로스와 테피로스, 둘 중 배신을 한 건 누구지?"
"그들 중 배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안톤."
살벌하기 그지없는 안톤의 눈빛에도 아르토르는 아랑곳않고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싶은 것도 잠시.
속에서 확하고 와닿는 게 있었다.
안톤이 허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뇌를 당한 게 아니라, 그냥 진심으로 충성을 했다는 거였나... 내 실수군."
근데 그게 해답이 아니었던 걸까.
대답이 걸작이었다는 듯, 아르토르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안톤을 비웃으려는 것보다는 그저 대답 그 자체가 웃기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하하하! 아, 죄송합니다. 정말로 아직도 모르겠나요?"
"..."
안톤이 멀뚱히 서서 노려보자, 아르토르가 고개를 냅다 저었다.
"그런 무서운 눈은 그만하고, 정 모르겠으면 여기 앉는 게 어떤가요? 잠시 대화를 해봅시다. 지금껏 싸우기만 했지 제대로 얘길 나눠본 적은 없지 않습니까?"
안톤이 대답대신 검을 쥔 손을 슬그머니 움직이자, 아르토르가 안톤을 앉히겠다는 의지를 꺾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냥 서서 들으시지요. 역시 지금 당신에게 있어 제일 궁금한 건 왜 제가 웃었는지겠죠? 답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냥 말해주면 재미가 없으니 단서만 드리죠. 칠황자와 푸른 귀신. 그 둘은 처음부터 제게 지배되어 있었습니다."
말을 마친 아르토르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안톤을 지켜봤다.
그때 이미 안톤의 얼굴은 보기좋게 일그러져 있었다.
거대한 모순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 둘이 처음부터 지배가 되어 있었다고? '
안톤은 그들과 대면하자마자 펠샤인을 불러내 그들이 정상인 것을 확인했다.
근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렇게 아르토르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생각을 해보니, 두 가지의 경우의 수가 도출됐다.
만약 펠샤인이 무언가 실수를 해서 제대로 탐색을 하지 못했을 경우의 수와, 처음부터 자신을 속이기 위해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었을 경우의 수.
안톤은 자기도 모르게 펠샤인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건 그저 허울 좋은 합리화일 뿐이었다.
그 깐깐한 여인이 실수를 했다니. 절대 아니다.
그냥 펠샤인이 자신을 속이기 위해 그 사실을 감춘 거다.
그게 바로 진실이다.
"펠샤인. 그녀가 배신자였군."
"정답입니다."
짝짝짝.
안톤의 결론에 아르토르가 경쾌한 박수 소리를 자아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따위 짓으로 화를 부추기면 부추겼지,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일은 없었다.
안톤의 굳은 목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언제부터였지? 그때 용의 협곡에서 만났을 때부터였나?"
"확실히 그녀가 내 계획을 돕겠다 말한 건 그때가 맞지만, 정확히 말해서 그녀가 당신을 배신한 건 그때가 아닙니다. 일전에 제가 배신자를 찾으러 왔다고 했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그때 배신자를 칭한 건 카트락시아가 아니라 그녀였군."
"네. 제 약속은 버려두고, 당신을 돕고 있었으니까요. 허나, 그때 몰래 대화를 나눠보니 완전히 배신한 것은 아니더군요."
그때 마룡 위에서 안톤이 했던 터무니없다고만 여겼던 가설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안톤이 급하게 질문을 덧붙였다.
"잠깐. 그럼 설마 카트락시아도 배신자가 아니라는 소리냐?"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판단해 우리를 저버리고 당신에게 붙은 건 맞지만, 그러도록 유도한 건 저였으니까요. 그녀가 불안해했던 진실을 보여주니, 예상대로 어떻게든 살려고 수를 쓰더군요."
정말로 놀라운 치밀함이 아닐 수 없었다.
아르토르는 안톤이 이 세계로 귀환하기 전부터 이 모든 계획을 짰다는 것이었으니까.
"당신이 이곳에 오게 된 건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다만 시기가 조금 이른 탓에,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죠."
"도서관으로 보낸 것도 그런 이윤가."
"네. 이제 머리가 쌩쌩하게 돌아가는 모양이군요."
아르토르의 이야길 들어보면, 그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고 그의 의도가 존재했다.
안톤도 이젠 확실히 그가 자신과 전혀 다른 형식의 인간이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전신을 속박한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다.
'분명 놈의 성격이라면, 헤어나올 수 없는 덫을 짜놨을 터.'
그때도 녀석의 계략에 넘어가 이계로 떨어진 후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이번엔 어쩌면 목숨마저 위험할지도 몰랐다.
보이는 칼이라면 안톤의 무력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비수는 그런 안톤에게도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 날 잡을 거지?"
안톤이 검을 들어 아르토르에게 겨누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듯한 움직임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세로게트에게 처음으로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뭘 하려고 해도 이것 역시 녀석이 예상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아로트로가 피식 웃었다.
"처음 보는 긴장한 얼굴이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안톤. 내가 당신을 이 자리로 불러낸 것은, 단지 제 안전이 보증된 장소에서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믿을까 보냐."
"당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게 사실입니다."
안톤이 아르토르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거짓없이 깨끗한, 흔들림 없는 눈이었다.
허나 그것으로 진실을 꿰뚫어 볼 능력은 안톤에게 없었다. 이렇게 속이 음흉한 놈이라면 더더욱.
"이제 실컷 당신의 궁금증을 풀었으니 저도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토르가 준비한 질문을 쏘아냈다.
"당신은 어떻게 율법의 힘에서 벗어났죠?"
암만 세상사에 통달해 사람을 주무르는 녀석이라도, 안톤이 이계에서 얻은 이 반지에 대한 능력만은 짐작해낼 수 없던 모양.
안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
"대답해 줄 수 없다 이건가요? 뭐, 좋습니다. 제가 당신을 이리로 부른 건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 였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당신을 귀찮게 하는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건?"
"무슨 개소리지?"
아르토르가 식어버린 찻물을 바닥에 버리고 새로이 잔에 따르면서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사실 저는 이 세계를 부술 생각이 없습니다."
올해 들은 말들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르토르가 새로이 따른 차를 한모금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러했듯, 저 역시 이 차가 진짜든 가짜든 아무래도 좋거든요. 다만, 누군가에 손에 의해 조종당한다는 것이 진절머리 날 뿐입니다. 아, 어쩌면 이것도 당신과 나의 공통점일까요?"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저는 이 마스터피스의 힘을 이용해 이 세계의 신, 그러니까 즉 관리자가 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당신이 갖고 있는 두 가지의 힘이 필요한 거죠."
"뭐지?"
"조르디가에서 얻은 심판의 힘과, 당신이 본래 지니고 있던 율법의 힘."
그 말에 안톤이 영문 모를 얼굴을 지었다.
"심판의 힘이라니?"
"설마 모르고 있던 건가요? 하긴, 그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를 때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제야 안톤은 자신의 계획이 처음부터 엇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이곳에서 성물을 탈취를 하겠다는 계획은 애초부터 필요가 없던 것이다.
"자, 그래서 어떻게 할 겁니까? 그 두 가지를 넘겨주면 당신이 행복하게 일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겁니다. 아니, 원한다면 무한한 삶을 드리죠."
"결국 블라디미르란 단체는 모두 네놈에게 있어 본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었을 뿐이었군."
"그게 잘못 됐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드린 제안에 답해 주시겠습니까?"
"..."
안톤이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의 제안은 흥미로운 걸 넘어 매력적이었다.
행복한 삶이나, 영생 따위의 달콤한 말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아르토르의 제안을 따르면, 그를 옭아맸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대신 그 대가로 지니고 있던 심판의 힘과 율법의 힘을 건네야 하지만, 뭐 그것들은 솔직히 안톤에게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것들에 불과했다.
그저 이 세계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수중에 갖고 있었을 뿐이지, 없어진다해도 전혀 아쉽지 않달까.
"자, 어서 답해 주시죠. 당신의 한 마디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 납니다."
아르토르의 재촉에 안톤이 짧게 읊조렸다.
"거절한다."
녀석의 제안은 꽤나 구색 좋게 들린 건 사실이나, 치명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아르토르란 사내는, 무언가 믿고 약속을 할 만큼 신용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안톤의 대답에 아르토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지하 공동이 진동으로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악!
마나가 아닌,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만들어진 결계가 공간 전부를 감쌌다. 육안으론 확인이 불가했고, 신안으로만 볼 수 있는 결계였다.
그저 추측하기로, 이것이 카트락시아가 말했던 그 에너지라는 물질인가 싶었다.
"대화만 하려 했다더니?'
안톤의 질문에 아르토르가 천연덕스런 미소를 내짓는다.
"아,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믿을 놈이 아니란 안톤의 판단은 옳았다.
역시 아르토르는 속에 흐르는 피까지 검은 음흉한 사내였다.
"그럼 이제 슬슬 지긋지긋한 이야기의 결말로 향해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