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5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56화
156. 학문
안톤은 블라디미르에 대한 정보들을 모두 풀어냈고, 카를로스와 테피로스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의 얘기를 들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이야기.
카를로스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께서 이족들의 수작에 당했다는 건가?"
"그렇소. 클린턴이 제국을 떠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지. 당신도 진정으로 제국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잘 판단해 보시오."
"..."
그렇게 카를로스가 고민하는 사이.
내심 결정을 내린 듯 칠황자 테피로스가 되물었다.
"그래서 저희에게 하실 부탁은 뭡니까?"
"내가 신분을 감춘 채 황궁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 * *
테피로스가 협력하겠다 말하자, 카를로스도 마음을 굳혔다.
안톤의 말 한 마디로 그들이 설득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내심 현 황제 아이론의 수상쩍음을 은연 중에 느끼고 있던 것이다.
아무튼 이제 그들의 협조를 얻었으니, 소란없이 황궁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는 해결이 됐다.
허나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카트락시아가 말했던 황궁 지하에 있는 어느 공간을 찾아야 한다.
이에 대해 혹시 단서가 있을까 싶어, 둘에게 물었더니 테피로스는 나름 짐작이 가는 곳이 있던 모양이었다.
"알현실 아래에 지하 예배당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아주 예전에 황족들이 비밀리에 사용하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아주 오래 전.
펭 제국에서는 황제를 포함한 그들 일족을 신과 동일시 여겨졌고, 이 때문에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그리고 지하 예배당은 그러던 시절에 사용되던 것이었고, 추후 시간이 지나 굳이 몰래 예배를 할 필요가 없게 돼자 자연스레 형태만 남은 채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이 표면적인 이유이지만, 안톤은 뭔가 수상하게만 들렸다.
'일단 그곳을 한 번 알아봐야겠군.'
그런 결심을 내비치자 테피로스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알현실에 있던 입구는 안전을 문제로 오래 전에 재건축을 하며 폐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다른 입구는 없소?"
"예배당은 황제 뿐만 아니라 황족들 모두가 사용하던 곳이기에, 다른 입구가 있을 거란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지금 그곳을 기억하는 자는 없지요. 하지만 황실 도서관이라면 분명 기록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럼 우선 그곳을 뒤져봐야겠군."
그렇게 첫 목표지가 정해졌다.
* * *
황실 도서관.
제국의 모든 지식이 담긴 정수.
허나 그런 명성이나 중요성과는 달리, 황실 도서관은 황궁 내부에 위치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고, 인재 양성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 이전 황제에 의해 위치가 바뀌었다.
바로 제국의 최고 전문 교육 기관, 통칭 아카데미로.
"황실 도서관은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더라도 이용이 가능하지만, 그 구역에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황궁과 관련된 정보는 기초 개방 구역에서는 찾을 수 없겠죠."
"그렇다면 날 대신해서 찾아주면 되겠군."
보따리까지 내놓으란 식인 안톤의 뻔뻔한 작태에도, 테피로스는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책이라곤 근처에도 가지 않던 제가 그리로 향하면, 분명 다들 의심스럽게 여길 겁니다."
다소 변명처럼 느껴지긴 했다만, 안톤도 더 뭐라 할 순 없었다.
테피로스가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황실 도서관의 열람 권한은 아카데미의 기관장이 갖고 있기에, 제 힘으로는 안톤 경의 열람 등급을 올려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학생으로 추천드릴 수는 있겠죠."
"학생...?"
뜬금없는 단어에 안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지, 테피로스가 더욱 진한 웃음을 흘렸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으나, 이게 가장 손 쉬운 방법입니다. 아카데미의 학생은 모두 최고 검열 등급인 4등급 바로 아래인 3등급의 열람 권한을 갖게 되니까요."
"후... 만약 3등급의 구역에서 찾지 못한다면?"
"음, 그때는 알아서 해야겠죠. 뭐, 3등급 구역과 4등급 구역은 겨우 벽 하나 차이인데, 안톤 경이라면 어떻게든 몰래 들어갈 수 있지 않겠어요?"
못한다는 말은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테피로스였다.
옆에서 주구장창 듣기만 하던 카틀로스도 옆에서 거들었다.
"좀 나이가 많긴 하지만... 마침 시골 귀족 출신의 신분을 얻었으니, 딱히 남들이 보기에 위화감도 없을 테니 묘수로군."
눈앞에 테피로스나 카를로스처럼, 왠지 팔찌 속에 있는 펠샤인도 웃음짓고 있으리란 예상이 들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안톤은 카를로스의 추천장을 들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7황자인 테피로스가 추천장을 써줄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단숨에 이목이 집중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의 것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라테인 가의 가주인 그의 직인이 담긴 추천서만 해도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손에 넣지 못하는 물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마 그 정도 되는 인물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지금 안톤은 꽤나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입학 마감은 한 달 전에 끝났으니 돌아가시오."
이랬던 고압적인 직원이 그의 추천서를 보고 곧바로 돌변한 것이다.
"하지만 추천서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쾅쾅!
입학 서류에 도장을 찍는 그의 모습은 새삼 박력 넘쳤다.
아무튼 푸른 귀신이라는 그의 명성 덕에 안톤은 손 쉽게 아카데미의 학생증을 목에 걸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학생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절을 보내거나, 수업을 들으러 다닐 생각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애초에 정규 수업이 시작된다는 다음 달이 되기 전에, 안톤은 이곳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안톤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 학생증.
안톤은 학생증을 걸고 당당히 황실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제국 최대의 도서관이라더니, 그 외관부터가 압도적이었으나 더욱 더 장관인 것은 그 내부였다.
사방에 가득 꽂힌 책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책에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랄까.
코를 간지럽히는 책 내음을 맡으며 안톤은 본격적으로 도서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한 달 안에 이곳에서 정보를 얻고 나가겠단 것이, 얼마나 오만한 각오였는지를 말이다.
한 평생을 걸쳐 읽어도 읽지 못할 만큼 많은 책들이 이곳에 있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대충 분류가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책이 워낙 많다보니 그렇지 않은 책도 부기지수라는 듯 했다.
일단 안톤은 직원의 도움을 받아 황궁과 관련된 서적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나 하나 읽었다간 아예 답도 없었기에, 안톤은 실전으로 단련된 동체시력을 극구 발휘해 책을 후다닥 넘기며 핵심 단어만을 찾았다.
종교. 예배당. 황족.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그 짧은 사이 안톤에 대한 이야기는 서서히 퍼져갔다.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니었고, 그냥 이상한 괴짜가 새롭게 나타났다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름 황실 도서관에서는 유명인이 된 안톤에게 호기심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대체 뭘 찾나. 자네는?"
"진짜 그 속도로 책을 읽고 있는 거에요?"
허나 이들은 대게 안톤이 대꾸도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그냥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갔다. 뭐, 물론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날 무시하다니 이 놈!"
이런 녀석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고작 놈팽이 귀족 출신의 학생일 뿐.
안톤의 눈빛 한 번 감당치 못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안톤이 짧은 사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자들이 꾸준했기에, 안톤은 이번 역시 그럴 줄만 알았다.
"레바스턴을 눈빛 한 번으로 제압했다는 말을 들었소."
안톤은 대꾸도 않고 계속해서 책만을 읽었다.
그런데 그 사내는 그런 안톤의 무대응에도 아랑곳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옷으로 가렸어도 알 수 있소. 당신의 육체야말로 책에서만 봤던 완성된 형태라는 걸. 아마 당신은 굉장히 숙달된 검사일 것이오. 어때, 내 추측이 맞소?"
자신의 육체가 완성된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자는 그 동안 안톤에게 접근했던 자들과는 완전히 색다른 형태의 인물이었다.
"부디 내게 검을 가르쳐주시오!"
그제서야 안톤도 눈을 떼고 앞에 대뜸 무릎을 꿇은 사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째선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아무튼 그는 안톤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도, 이미 주변의 시선을 모두 끌어모으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의 수근거림이 안톤의 귀로 들려왔다.
"어머, 드디어 도서관의 명물들이 만났네!"
"레트안 저 녀석이 또 어떤 기행을 벌일지가 궁금하군!"
제각기 반응은 달랐지만, 대게 이러한 반응이었다.
아마 이 레트안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안톤이 이 도서관에 오기 전부터 유명인사인 모양이었다.
'잠깐 레트안이라고?'
사내를 보던 안톤의 눈매가 좁혀졌다.
어쩜 이런 우연이 있을까.
낯이 익다 싶더라니, 전생에 그와 인연이 있던 자였다.
그렇기에 신기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생에서는 거진 모두 악연만 되물림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처음 재회한 선연이라 할 수 있는 자였으니까.
'나중에라도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가롱 센데벨. 대전쟁 당시 그 자에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레트안은 안톤의 부대에 속했던 부관이었다.
그는 모든 부대원과 서먹서먹했던 안톤과도 격의없이 지냈고, 여러 사회전반적인 상식들을 가르쳐주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전에 안톤이 린디아스와 친해질 수 있던 계기기도 했던 체스트였다.
이를 안톤에게 알려준 자가 바로 레트안이었다.
아무튼 그는 워낙에 잔재주가 많고 영리한 인물이라, 안톤도 전쟁의 혼란 틈에서 그의 도움을 많이도 받았다.
그 때문일까.
만약 이번 삶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안톤은 그를 도와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나저나 그건 모두 전생의 인연이며, 안톤 홀로 갖고 있는 생각일 뿐.
그에게 있어 안톤은 생전부지의 초면인 사람이다.
근데 다짜고짜 검을 가르쳐달라니,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부탁하겠소. 난 강해져야 하오."
그러고보니 레트안은 당시에도 무에 대한 갈망이 컸었다.
상시 내 전투에서도 무언가 배우려 힘 썼고, 혼자 수련을 하다보면 나를 찾아와 질문을 날렸었다.
허나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 일곱.
마나 연공법을 익히기엔 너무도 늦은 나이였다. 마법 각인으로 입막음 당한 안톤은 그것을 알려줄 수도 없었고 말이다.
"지금 당신의 나이는?"
"열 여덟."
"너무 늦었군."
따지고보면 스무살 적에 처음으로 마나 연공법을 배웠던 안톤보다는 2년이나 빠르지만, 온-누르가 극찬한 재능의 소유자였던 안톤도 늦은 나이에 입문한 탓에 마흔이 되어서나 죽기 직전 겨우 오러 유저의 도달했다.
"..."
그런 안톤의 진심이 담긴 한 마디가 묵직하게 다가온 것일까.
레트안이 입을 꾹 다물고 부르르 떨었다.
"하나만 묻지. 여태껏 학문만 파고들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깟 펜으론 칼을 이길 수 없단 걸 어쩌다 보니 깨달았을 뿐이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아까 물었던 그 레바스턴이라는 놈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단 예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뭔가 씁쓸했다.
학문적으로 견문이 짧은 안톤이 보기에도, 이 남자는 칼보다는 책이 어울리는 사내였으니까. 이렇게 피가 철철 흐르는 시대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은 그와 같은 학자였을 터.
"당신에게 검을 알려주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걸지."
"정말이오? 뭐든지 하겠소."
"일단 무를 배웠다고, 문을 소홀히하지 말라는 것이 첫 째고."
"그럼 두 번째도 있단 말씀이오?"
레트안은 그래도 상관없다는 눈빛을 지었고, 이를 보며 안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도서관에서 찾고 있는 정보가 있는데, 그 일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
막막했던 단서 찾기에, 한 명의 조력자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