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5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53화
153. 기약
"왜지? 이유를 설명해라."
만약 하튼 수작을 부리는 것 같단 생각이 들면, 그 즉시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들 작정이었다.
그러한 속내가 눈빛으로도 표출이 된 것일까.
침을 꿀꺽 삼킨 카트락시아 떨며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이미 아홉 가지의 조각, 성물들을 모았다. 허나 이를 합쳐 마스터피스로 만들기 위해선 네 몸 속에 있는 마지막 조각이 필요하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르토르는 물리력으로 너를 죽이고, 성물을 탈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방법은 초장부터 제외했지. 너를 다른 세계로 날려보낸다는 계획도 거기서부터 수립됐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일단 안톤은 잠자코 그녀의 얘길 들었다.
"차원의 틈새를 억지로 열었던 것처럼, 성물들은 여러가지 모이면 힘을 합쳐 기적을 벌일 수 있다. 허나 이 세계의 탈출구를 열 수 있는 마스터피스와는 또다른 얘기지."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라."
"그래서 전쟁을 벌인 거다. 마지막 한 조각을 도무지 얻을 방법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성물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만든다고?"
"만물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마나와는 또다른 물질이지. 우린 오랜 시간을 연구했고, 막대한 에너지만 충당된다면 성물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내렸다."
그리고 인간은 그 어떤 만물보다도 비교 불가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카트락시아는 부연 설명했다.
안톤도 이제 어떠한 이유 때문에 전란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인간 제물이 필요했기에, 전쟁을 벌였다는 거군."
"그래. 아까 동맹군을 만들어서 싸우겠다는 것을 막은 것도 그 이유다. 맞승부를 펼쳤다간 바쳐질 제물만 늘어나는 격이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고 안톤은 한참이나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었는지, 말을 꺼내 그녀에게 물었다.
"제물로 바쳐진 인간은 어떻게 되지?"
"고유의 데이터가 소멸, 아니 쉽게 말해서 영혼이 사라지게 된다. 즉, 더는 환생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지."
확실히 카트락시아 덕분에 갖고 있던 궁금증이 상당수 해소된 건 사실이지만, 안톤은 그러한 내색 없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가진 정보는 그게 끝인가?"
"일단은. 궁금한게 있다면 아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 대답해주지."
카트락시아가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자, 안톤은 그제야 아주 오래 전부터 묵혀왔던 의문을을 풀어냈다.
"왜 이 세계를 떠나려는 거지?"
어떤 이유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를 떠나, 카트락시아는 도대체 어떻게 이것을 설명해야할지 고민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인간인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선조들이 근원을 찾아냈던 순간... 그 한 가지의 사명은 우리들에게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지게 됐다."
"그렇다면 너는 숨과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건가?"
안톤이 우습다는 듯 말하자, 살짝 얼굴이 붉어진 카트락시아가 변명하듯 말했다.
"후대인 우리에게는 그 사명이 조금은 희미해졌다. 나를 포함한 몇몇은 점점 의문을 품게 됐지. 숙원을 이루어내어 도달할 그곳이 정말로 낙원인가에 대한 의문이었지."
이제 안톤도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말이다.
* * *
"일단 그녀는 당신이 잘 데리고 있어주시오."
"그러지. 아마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망갈 걱정은 없을 걸세. 이곳이 가장 안전하니까."
카트락시아와의 대화를 끝낸 안톤은 동굴을 나와, 원래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카린과 만나 카트락시아와 나눈 대화를 일부분 말해준 후, 다시금 계획을 재정비했다.
아니, 사실 재정비랄 것은 없었다.
그저 여유를 버리고 조금 더 긴박해졌을 뿐.
계획의 뼈대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젠 시간 싸움이네요. 그들이 먼저 목적을 이루든지, 아니면 우리가 먼저 그들을 막아내던지."
가장 좋은 방법은 희생 없이 이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북동부 지역에서는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하루에 서넛 뿐이 세뇌를 풀 수 없는 펠샤인의 능력으로 제국을 깨끗이 정화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이니 말이다.
"몰래 침입해서 수뇌부만 어떻게 해결하면 끝나는 일 아니오?"
안톤의 자신만만한 제안이었지만, 카린은 이를 깔끔하게 묵살했다.
만약에 또 예전처럼 함정에 당하거나 하면,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달렸어요. 그런 되면 되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도박수는 채택할 수 없어요."
일단 동맹군을 만드는 일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카트락시아의 말만 믿고 모든 계획을 뒤바꿀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안톤은 아직 아르토르가 어떠한 저의로 동료들을 해쳤는지 이유도 몰랐다.
'후우...'
안톤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펠샤인을 힐끗했다.
생각을 해보면 속내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르토르 뿐만이 아니라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녀가 자신을 돕고 있긴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안톤은 불안했다.
용의 협곡에서 재회하던 당시, 그녀는 안톤에게 평생 호위해달라고 조건을 내걸었다.
허나 이는 거래의 대가라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그녀가 안톤을 돕지 않겠다 결정했으면 그런 조건을 내걸 필요도 없던 것이니 말이다.
'예전에 아르토르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비밀이라며 말해주지 않았고 말이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허나 당장 그녀의 능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기에, 안톤은 조심히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다보니 머리가 아파지는군.'
안톤은 순간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뽑아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릴리가 말하길, 이 반지는 세계의 관리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물건이라고 했다.
즉, 안톤이 세상이 부여한 운명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운명대로 흘러간다면 이런 걱정 또한 하지 않아도 되겠지. 모든게 순리대로 될 테니까.'
운명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가 블라디미르를 대적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허나 안톤은 이 세계로 복귀한 후로 내내 반지를 끼우고 다녔다.
바로 모든 것들이 끝난 이후가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있다.
토끼가 잡히면 더 이상 사냥개는 필요가 없다는 그 말처럼, 블라디미르가 사라지면 안톤도 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관리자의 입장에선 안톤처럼 규격 외의 존재가 세상에 남아 있는 것도 골치 아플 터.
'아마 세상은 내가 그들과 동시에 파멸하는 상황을 가장 바라겠지.'
그런데 안톤이 손에 끼워진 반지에 유독 신경을 집중하는 게 티가 났던 것일까.
카린이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안톤. 처음 재회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그 괴상한 반지는 무슨 아티팩트 같은 건가요?"
"아, 그건 나도 궁금했네. 도대체 그 반지는 무엇인가? 분홍색의 보석은 마치 토끼 귀를 연상케 하는군."
"마법사인 제 소견으로는 아티팩트는 아니에요. 아무래도 그냥 멋으로 끼고 다니는 건 아닐까 싶은데..."
펠샤인의 확인사살까지 떨어지며, 안톤은 당황한 표정을 내지었다.
"이 반지가 보이시오...?"
어째선지 다른 차원에서 지금 이 순간을 상상하며 미소짓고 있을 릴리가 떠오른 안톤이었다.
* * *
카린과 클린턴, 그리고 세로게트가 함께 에반하임의 도시로 내려갔다. 혼요종들의 장로와 만나서 동맹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카린이 갈 것도 없이, 혼요종들에게 신의 대리인이나 다름없는 세로게트의 한 마디면 두말 없이 따를 것이지만, 카린은 그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레노테이르에서 온 오르메넨도 마찬가지였지만, 안톤은 카린을 따라가려던 그녀를 붙잡았다.
단 둘이 나눌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탈티온의 봉변이 그녀의 인생관을 바꾼 것일까.
예전과는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냉기가 절로 흘러 나왔다.
그녀에게 조금 껄끄러울 수 있겠지만, 안톤은 질질 끌 것 없이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이 일에 이렇게 적극적인 건, 혹시 그 때문이오?"
예민한 곳을 건드려서인지, 안 그래도 무표정하던 얼굴에 아예 서리가 맺혔다.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요?"
"호기심이라 해두지. 곤란하다면 대답해주지 않아도 되오. 그저 당신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가 궁금했을 뿐이니까."
오르메넨은 잠시간 말없이 안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어딘가 울분 넘치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분은 아직 살아계세요. 그리고 츠레이바의 편에 붙어 레노테이르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죠. 그 누구보다 이 나라를 사랑했던 그 분이 악독한 이들에게 조종되고 있어요. 바로 저 때문에요. 제 손으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해방시켜드려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자신의 목적을 밝힌 그녀는 연이어 안톤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네. 당신 말이 맞아요. 사실 나라를 구하겠다는 건 핑계에요.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잘 됐다 싶었죠. 아무리 청원해도 성주님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없던 의회도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만 했으니까. 그러던 중에 당신들이 나타났죠. 그것도 새로운 희망까지 들고서."
그녀가 말하는 희망이란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빤했다.
"용의 현자라던가요? 그 사람의 능력이면 아까 훼이안 경처럼 멀쩡하게 돌려 놓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군."
"어때요. 이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요?"
고개를 끄덕인 안톤이 카린에게서 돌려받은 아공간가방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그리고 이를 오르메넨에게 대뜸 건넸다.
"이게 뭔가요?"
"그냥 받으시오. 아마 당신이 뜻을 이루는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오."
지팡이에서 거대한 마력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구로부터 진한 이끌림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오르메넨은 얼떨결에 건네받은 지팡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당신이 레노테이르의 의장이 되어보시오. 내가 이를 도와주겠소."
* * *
야심한 밤.
호수 앞에 사이좋게 앉은 남녀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안톤과 카린이었다.
"이제 첫 목표까지 한 걸음이 남았네요."
해린에서 있었던 연회에서, 합류 가능성이 낮은 록티아는 아예 후보 선상에서 빼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이제 첫 목표가 달성되기까지 그레일시아만이 남았다.
그리고 카린은 이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오늘 그 남자처럼, 레노테이르에도 그들의 잔재가 뿌려져 있을 테니 두 걸음이지."
안톤의 삐딱한 대답에도 카린이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아무튼요. 정말 신기하다니까요? 나 혼자서는 엄두도 잘 나지 않던 일들이었는데, 당신이 오자마자 일들이 쑥쑥 풀리고 있는 걸 보면."
"아마 당신 혼자서도 잘 해냈을 것이오. 오히려 내게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동맹을 만들 엄두는 내지도 못했을 것이오."
눈을 마주치는 것이 부끄러워서 일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카린이 달빛을 머금은 호숫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정말 끝이 보이는 것 같아요. 안톤. 당신은 이 모든게 끝나면 뭘 하고 싶어요?"
그녀의 질문에 안톤은 성실하게 고민을 해본 후 대답했다.
"글쎄... 원래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싶었소. 근데 워낙에 대륙 곳곳을 돌아다녀서인지, 이젠 그냥 어딘가에 정착해 편히 쉬고 싶은 마음 뿐이오. 마음이 맞는 자들과 함께 여생을 즐기면 아주 즐거울 것 같소."
"네. 그거 참 즐거울 것 같네요."
내일이 밝으면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둘은 떨어져야만 한다.
그래서일까.
유독 짧게만 느껴지는 오늘의 밤이 야속하기만한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