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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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51화
151. 목적
"추후 다시 부르겠소.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합시다."
왕이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말했다.
하기사, 충격적인 진실들을 방금 전에 눈앞에서 확인한 직후니 머리가 아프기도 할 터.
안톤은 이 자리서 확답을 해달라고 더 보채기 보다는, 일단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안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궁전을 나와 조르디가의 거점으로 돌아가려는 중, 린디아스가 안톤을 불러세웠다.
"물론이오."
가우스트는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먼저 자리를 떴고, 펠샤인은 그대로 남아 안톤과 린디아스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린디아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둘이서 할 얘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싫어요."
저렇게 직설적인 거절의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린디아스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해달라는 린디아스의 눈빛이 안톤을 향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날 보낼거냐는 펠샤인의 불타는 눈초리도 쏘아졌다.
왠지 모르게 머리가 아파진 안톤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디가서 함부로 말을 흘리고 다닐 사람은 아니니, 이 자리서 할 순 없겠소?"
"..."
린디아스가 야속하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어쩔 수 없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후우! 무슨 공적인 얘기를 할라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혹시 스승님에 대한 일이오?"
안톤의 되물음에, 린디아스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 역시 들었구나..."
안톤은 그녀가 왜 저렇게 불안해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괜한 걱정은 마시오. 그게 당신 잘못이 아니란 걸 모르진 않으니까."
그 대답에 옆에서 흥! 하고 코웃음치는 소리가 터져나왔으나, 다행히 린디아스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침울한 얼굴로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정말로... 이건 변명처럼도 들리겠지만, 저도 누르 공이 그렇게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질 줄은 몰랐어요. 만약 알았으면 땅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그걸 받진 않았을 거에요."
그 말을 모두 들은 안톤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비웃는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어째선지 엘릭서를 들고 땅에 붓는 시늉까지 했을 스승님이 떠올라서 그만 웃음이 나와버렸소."
"아, 그랬군요..."
그런 안톤의 반응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일까.
무섭게 굳어있던 그녀의 안색도 나름 밝아졌다.
이를 잠자코 지켜보던 펠샤인이 따분하다는 듯 하품을 크게 내쉬었다. 자칫하면 구렁텅이로 갔을 상황이 부드럽게 흘러가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근데, 어떤 이유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이오?"
"마음이 변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안톤이 앞뒤를 다 잘라먹은 질문이었단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
"몇 번이나 나에게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내전이 끝나면 당신도 이제 그렇게 살아갈 줄만 알았는데, 다시 검을 잡게 되다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소. 그건 대체 무슨 이유였소?"
"..."
예상과 달리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던 것일까.
린디아스는 한참이나 입술을 떼지 못하며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어쩌면 무심한 자신의 성격 탓에 또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은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소. 말하기 어렵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오."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조금 부끄러워서요. 제가 누르 공께 청원을 하면서까지 검을 다시 잡은 게, 다름 아닌 당신 때문이었으니까요."
"나말이오?"
"나는 사실 항상 당신을 동경했어요. 당신이 탈주 노예 신분으로 사막을 헤집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부끄럽다더니, 말과는 달리 얼굴이 화끈화끈한 기색도 없이 안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린디아스였다.
도리어 겸연쩍어진 안톤이 볼을 긁적이며 허공을 바라보았고, 펠샤인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안톤의 허리를 꼬집었다.
"얘기 다 끝났으면 피곤한데 이제 그만 가죠?"
* * *
벌써 안톤이 소우든 왕실령에 머무른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의 예상대로 소우든의 왕과 팔대세가의 대표들은 제국을 등지고 안톤의 동맹에 들어오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한 결정이 내려온 것은 엊그제 있었던 일이었지만, 아직도 안톤은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의 수작에 당한 자들이 이곳에만 해도 상당수 존재했고, 펠샤인의 능력으로는 하루에 세뇌를 풀 수 있는 횟수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뭐, 이곳에 있는 모든 주구들을 찾아낸들 소우든이 완전히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팔대세가를 뒤져보면 훨씬 많은 숫자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허나 그들 하나 하나를 찾아내기엔 시간이 부족했기에 안톤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그래도 일단 수뇌부들은 확실하게 검사를 했으니, 큰 걱정거리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후! 드디어 끝났네요."
지난 며칠 사이 쉴 틈 없이 바빴던 펠샤인이 기지개를 피며 뒤로 늘어졌다. 이 모습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던 안톤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고생 많았소."
안톤의 노고 치하에 펠샤인이 도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린 애처럼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말로만요?"
뭔가 대가를 기대하는 눈빛에 안톤이 못 말린단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걸 보니 여력이 남은 모양이군. 오늘은 푹 쉬는 걸로 하고 내일 아침에 이곳을 떠납시다."
"치. 알았어요."
그 다음 날.
안톤 일행을 태운 마룡이 또다시 창공으로 비상했다.
가우스트와 린디아스는 소우든에 남기로 했기에, 마룡 위에 있는 구성원은 해린을 처음 떠날 때와 동일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레노테이르로 가는 건가?"
케이혼의 물음에 안톤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레노테이르 공화국은 카린과 동맹 협약을 체결했다고 하오. 따라서 우린 에반하임으로 갈 것이오. 아마 그녀는 지금쯤 그쪽에 도착했을 것이오."
"흐음. 전쟁의 직격탄을 맞아서 거부할 방법이 없을 거라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 근데 에반하임도 동맹으로 끌어들일려는 겐가?"
"혹시 꺼려지시오?"
에반하임.
아넨교의 성자인 그에게는 이단이나 다름없는 혼요종의 성지.
때문에 순간 그가 극구 반대를 하고 나서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케이혼은 그런 것 따윈 별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엥? 내가 왜?"
너무나 능글맞고 천연덕스런 반응에 웃음이 덜컥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후훗. 당신답구려."
대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케이혼이 고갤 갸웃했고,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펠샤인이 입을 열었다.
"근데 혼요종들은 굉장히 고집이 쎄다고 들었는데, 과연 인간인 우리들과 손을 잡으려고 할까요?"
"그건 걱정 마시오. 그들과 원래부터 동맹 관계였던 레노테이르도 포섭한데다가, 에반하임에서 굉장한 위치에 있는 자와 친분이 있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니면 또 제가 나서야하는지 고민했거든요."
수틀리면 정신 조작 마법을 사용해 이쪽에서도 세뇌를 시키겠다는 섬뜩한 말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내심은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덧 익숙해진 안톤은 그냥 한 귀로 흘렸다.
* * *
안톤의 안내를 따라, 펠샤인이 마룡을 이끌고 호수가 보이는 산의 정상부에 안착했다. 바로 세로게트의 거처였다.
"왔군."
그들을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세로게트였다.
"언제 오나 목이 빠지랴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래도 그때보다는 일찍 왔군."
과거 세계에서의 일을 말하는 그를 보며, 안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세로게트 옆에 있던 인물들이 다가왔고, 케이혼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이거 새로운 분들이 계시는 것 같군. 카린 양, 소개를 시켜주시겠소?"
그의 시선은 카린과 클린턴을 제외한 두 사람.
아니, 정확히는 한 사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안톤에게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여기 이분들은 에반하임과의 협약에 도움을 주시겠다고 함께 와주신 레노테이르의 수뇌부 분들이세요."
"그렇군.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숙녀분께서는 아무래도 능력까지 뛰어나신가 보군요. 성함을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케이혼이 바닥에 널리고 널린 들꽃 하나를 꺾은 후, 그의 시선을 강탈했던 여인을 향해 건넸다.
"오르메넨 프로젠마임."
다소 냉랭한 대답이었지만, 케이혼은 아랑곳않고 번지르르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제 이름은 케이혼 아델..."
"그나저나 오랜만이네요."
도중에 말이 끊긴 케이혼이 인생에서 가장 집중해 짧은 시간 동안 고민했지만, 아쉽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으음...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죄송하지만 기억이 잘..."
케이혼이 도중에 말꼬리를 흐렸다.
오르메넨의 시선이,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군. 이렇게 바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오랜만이오."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안톤이었고, 케이혼은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자네는 도대체 신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길래!"
암만 보아도 성자가 할 소리는 아닌 듯 보였지만, 워낙에 돌팔이처럼 인식이 박힌 그였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며 안톤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안톤. 이분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에요?"
카린의 질문에 안톤이 차근차근 사연을 말해주었다.
"예전에 에반하임에 처음 왔을 때, 탈티온 베니체른이란 이름의 사내를 기억하시오?"
"네."
"그때 그 자와 같이 있었던 마법사가 저 여인이오. 그 이후에 사막에서도 한 번 더 만났었지. 설마 당신이 데리고 온다던 자들 중에 같이 끼어 있을 줄은 나도 몰랐소."
이제 이해가 된 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때였다.
"갑자기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저 사람 이상한데요?"
펠샤인이 일행 중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오르메넨의 옆에 자리한 중년 남성으로, 레노테이르에서 함께 왔다던 수뇌부 중 나머지 한 명이었다.
순식간에 장중의 시선이 사내를 향해 주목됐고, 이내 지목된 사내는 갑작스런 관심에 당혹감을 얼굴에 고스란히 내비쳤다. 그리고 그것은 카린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상하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인가요?"
카린의 질문에 펠샤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톤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렇게 당장에 저 사내를 잡아다가 펠샤인 앞에 대령할 생각 만전이던 때였다.
"그, 그럴리가 없는데...?"
카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고, 그런 그녀의 반응이 의아하게 보인 안톤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뭔가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이오?"
안톤의 질문에 카린이 변명하듯 대답했다.
"왜냐면 저 사람은 레노테이르 의회의 강경파에 속해있는 분이니까요!"
"...당신이 잘못알고 있을 확률은?"
"없어요."
카린의 단호한 즉답에 안톤도 어리둥절해졌다.
그녀가 말하길, 레노테이르의 의회는 현재 두 파벌로 갈라졌다고 했었다.
강경파와 온건파.
온건파는 어차피 전세가 기운 것, 어서 제국에게 항복 선언을 하고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쪽이었고, 강경파는 그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서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파벌이었다.
그러니까 즉, 레노테이르의 강경파라 함은 곧 반제국 성향의 정치인이라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근데 도대체 왜 블라디미르의 주구가 제국과의 전쟁을 찬성하는 것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고, 때문에 안톤은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펠샤인이 그냥 아무나대고 모함을 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나 결코 그럴 리는 없다고 여긴 안톤은 그 가능성을 재빨리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머릿속에 띵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사고의 편린이 있었다.
'설마 전쟁을 벌인 목적이, 전쟁 그 자체였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