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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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48화
148. 현답
"...도저히 무슨 얘길하는 건지 모르겠군."
떨리는 안톤의 동공을 보자 타르티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이 자리서 처음으로 그의 부고를 전해듣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젠장...'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그를 덥쳤다.
심정적으로는 당장이라도 이 불편한 자리를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허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임무를 부여한 하늘이 무척 원망스럽지만, 그는 이 순간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타르티안이 안톤의 눈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유감이오. 이 말 밖에는 할 수가 없군."
"범인은 누구지?"
안광에 살기가 희번뜩하게 맺힌 안톤을 보며 타르티안이 슬픈 얼굴로 고갤 내저었다.
"안톤. 그런 건 없소. 그저 명이 다하셨을 뿐이지. 그분의 마지막을 함께한 공녀님께의 말로는 가시는 마지막도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하오."
그의 말엔 거짓이 없었다.
단지 한 가지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온-누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하나 뿐인 제자 안톤을 그리워하며 명줄을 붙잡고 기다렸었다.
허나 타르티안은 그것은 언젠가 필히 해야 할 말이라곤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란 판단을 내렸다.
"장례는 그 어느 누구에게 밀리지 않도록 성대하게 치뤘소. 그리고..."
"4년 전!"
안톤의 분노 어린 외침에 이어지던 타르티안의 말을 끊겼다.
겉으로 표출되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두 주먹을 꽉진 안톤은, 어떻게든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격양되어 있었다.
"엘릭서를 보냈소. 반쯤 시체였던 내가 멀쩡한 몸으로 일어났을 정도로 대단한 그 비약을 말이오. 난 이해가 가질 않소. 설마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이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의 농간인지 철저히 밝혀내 책임을 묻겠단 의지가 안톤의 눈빛엔 가득했다.
타르티안은 자신이 잘못한 일도 아님에도 그 눈빛이 워낙에 강렬해 그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엘릭서는 확실히 제대로 전해졌소. 허나 이를 복용한 건 그분이 아니었지."
"...반드시 똑바로 설명해야만 할 것이오. "
속에서 억눌러져 있던 살기가 그만 터져나왔고, 그만 몸이 덜컥 굳어버린 타르티안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대신해여 가우스트가 입을 열었다.
"쯧쯧. 엄한데 화풀이 하기는... 엘릭서를 거부한 것은 암검이었다. 단전을 잃은 자신 보단 젊은 넬이 복용하는 게 낫다고 여긴게지. 모두가 말리며 반대했지만... 네 녀석이 더 잘 알 것 아니냐? 암검의 고집이 어떠했는지 말이야."
안톤이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화검선녀..."
그 이름을 처음 록티아에서 들었을 때, 조금 이상하긴 했다.
겨우 몇 년 만에 이루어낸 성취라기엔 살짝 위화감이 없잖아 있었다.
허나 그땐 단지 예의 제단에서 검령의 힘 중 일부가 그녀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만 여겼다.
근데 설마 그 배경에 자신이 보냈던 엘릭서가 껴 있었을 줄이야.
한 없이 가라앉는 안톤의 안색을 보며, 가우스트가 침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암검은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친우였네."
"그래서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지금 누가 더 안타까운지를 말하려 했다면, 시기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소."
안톤의 까칠한 말투에도 가우스트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저 애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게 아니네. 그저 모두가 힘들어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시간이 약이란 말은 하지 않겠네. 그래도 아마 자네에겐 지금 숨 한 번 돌릴 틈이 필요하다고 보네."
오늘 예정대로 대화를 나누긴 어렵다고 본 가우스트가 말을 이었다.
"암검이 묵던 거처를 내줄테니 거기서 마음을 가다듬고 때가 되면 다시 오게나. 이보게 부총관."
"예. 가주님."
"자네가 같이 가서 잘 좀 다독여주게."
타르티안은 그런 배려에 안톤을 대신해 꾸벅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눈빛을 전했다.
* * *
"이곳은 그대로군."
별채의 후원을 둘러보던 안톤이 혼잣말을 되뇌었다.
이곳은 그가 떠난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심지어 천검술을 막 수련할 당시에 베어냈던 철강석도 쪼개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기억의 잔재들을 찾는 것도 잠시.
"이쪽으로 오시오."
타르티안이 안톤을 후원 뒷편에 있는 뜰로 안내했다.
그곳 역시 이렇다 할 큰 변화는 없었다.
화원은 그간 잘 관리가 되었는지 꽃들이 풍성히 만개해 있었고, 평소 온-누르와 린디아스 이렇게 셋이서 차를 나눠 마시던 정자도 그대로였다.
그저 화원의 중심부에 전에는 없던, 볼록한 둔덕이 생겨나 있다는 점만이 예전과 다를 뿐이었다.
"..."
그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안톤은 곧장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이 둔덕이 의미하는 바와, 타르티안이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혼자 있을 시간을 드리리다."
"그러는 게 좋겠군."
오늘이 첫 만남인 타르티안과 케이혼이 같은 의견을 냈고, 펠샤인은 홀로 다른 의사를 표시했다.
"전 그냥 여기 있을래요."
"이보시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펠샤인의 무심한 대답에 케이혼이 나서서 설득하려 들자, 안튼이 그런 그를 만류했다.
"괜찮소. 내버려두시오."
"...그럼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겠네."
케이혼은 군말없이 타르티안과 함계 별채로 들어섰다. 그리고 펠샤인은 정자 위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톤은 묵묵히 온-누르의 무덤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 그저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무덤을 바라보았다.
무덤에 말을 걸거나 하는 주책을 부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청초한 꽃들 위로 석양의 노을빛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슬픈가요?"
문득 뒤에서 들려온 펠샤인의 물음에, 길었던 침묵이 끝이 났다.
안톤은 여전히 온-누르의 무덤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마 당신에게도 이런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하오. 그때 당신은 어땠소?"
노파의 죽음을 거론하며 질문으로 대답하자, 말문이 막힌 펠샤인은 내심 준비했던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청승맞게 계속 그러고 있을 거에요? 사람은 언젠가 다 죽는다고요."
"나도 알고 있소.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라는 걸. 그렇기에 이제 다시 그를 볼 수 없단 생각에 섭섭하군. 그러니 오늘은, 오늘은 그냥 이렇게 그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고 싶소."
안톤의 솔직한 심정을 듣게 되자, 펠샤인은 새삼 그가 얼마나 강한지를 실감했다.
애초에 그녀의 걱정은 쓸모 없는 것이었다. 안톤은 이런 일로 무너질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알았어요. 그럼 자리 비켜줄까요?"
"들어가 있고 싶으면 들어가 계시오. 나는 상관없소."
"그럼 있을래요. 뭔일이 생기면 당신이 날 지켜야 되잖아요."
세침데기처럼 통통 튀는 목소리에 안톤이 피식 웃었다.
이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위로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서툰 여자로군.'
그렇게 다시금 침묵이 시작됐고, 그것은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아예 정자에 등을 대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구경하던 펠샤인이 두서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 여자가 밉지는 않아요?"
"그 여자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넬-린디아스 조르디. 그녀가 엘릭서를 기어코 거절했으면 저 무덤 속의 노인도 살아 있었을 거잖아요."
아마 그녀 또한 자리를 지키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던 모양이었다.
안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분명 그랬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밉지는 않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걸 알고 있을 뿐이오. 그저 그랬을 뿐인 게지."
"누구의 잘못이 없어도, 뭔가가 잘못되면 어느 것이든 탓하고 싶어지는게 인간이에요."
"옳은 말이오."
집요하게 따지는 듯한 펠샤인의 말에 안톤이 긍정하자, 펠샤인이 덜컥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 뜻은 지금 당신도 무언가 원망하게 됐단 건가요?"
안톤도 이제 등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펠샤인은 기대에 찬 어린애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안톤이 어떤 대답을 할지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굳이 원망하는 대상을 찾는다면, 이런 운명을 준 세상이겠지."
그것은 안톤의 솔직한 대답이었으나, 펠샤인의 귀에는 그저 수도승이나 할 법한 재미없는 대답이었던 모양이었다.
"흥. 매번 혼자서만 고상한 척 하기는... 아무튼 헤까닥 해서 사고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여독이 남아서 피곤하네요."
"나도 슬슬 가려 했으니, 같이 갑시다."
하루 종일 머물렀던 화원을 떠나, 별채 안으로 들어서니 1층 거실에서는 케이혼과 타르티안이 둘이서 술을 대작하고 있었다.
펠샤인은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고, 안톤은 남아서 그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술 자리는 대체로 조용한 분위기로 흘러갔고,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안톤은 그들과 서너 잔 정도만을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랬듯, 남겨진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해야하는 법이었다.
* * *
다음 날, 조르디가의 가주전.
텅텅 빈 장내에는 오로지 두 명의 인물 만이 있었다.
바로 안톤과 가우스트였다.
"어제 일은 고마웠소."
상석에 앉은 가우스틀 향해 안톤이 정중하게 포권했다.
어제 받았던 가우스트의 배려를, 안톤은 그냥 모른체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안톤이 이렇게 거창하게 감사를 표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가우스트가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게 될 줄은 몰랐군. 그래서 이제는 좀 괜찮아졌나?"
"당신 덕분에 잘 정리할 수 있었소."
"눈을 보니 괜히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군. 자, 앉게."
안톤이 그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상석인 가우스트와 마주보는 자리였고, 그 앞에 준비된 탁상에는 차와 다과들이 올려져 있었다.
안톤은 먼저 차로 입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대륙의 정세는 말 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오."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된 본론이었지만, 가우스트 또한 이를 문제삼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리라 짐작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북부가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이더군. 흐음... 근데 아무래도 자네가 날 찾아온 것이 그 전란과 관계된 용무인 것 같은데... 어때, 내 생각이 맞나?"
"나는 예전부터 버릇없는 놈이었으니, 길게 말하지 않겠소. 해린을 주축으로 거대한 동맹군을 만들 것이오. 거기에 소우든도 껴주었으면 하오."
"조르디가가 아니라 소우든이라... 설마 내가 나서서 다른 팔대세가나 왕가를 설득해 줬으면 하는 건가?"
"그렇소."
역시 척이면 척이라고, 굳이 긴말을 하지 않아도 가우스트는 안톤의 목적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렇다고 그가 곧바로 제안에 승낙한 것은 아니었다.
"대답을 하기 전에 일단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설마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온 건 아닐테니 말이야."
"툭 까놓고 얘기하겠소. 제국과 츠레이바는 이미 블라디미르의 수족이나 다름없소. 그리고 그 외에도 지아누, 엔티아네아, 베노에가 있지."
"대륙이라도 정복할 생각인가."
가우스트의 혼잣말에 안톤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전쟁을 벌인 진의는 나도 모르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안톤이 알고 있는 블라디미르의 목적은, 아홉가지 성물을 모아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왜 전쟁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허나 분명한 건, 그레일시아와 레노테이르가 무너지면 그 다음은 남은 국가들 차례라는 것이오."
그렇다면 이 소우든도, 유서 깊은 명맥을 자랑하던 조르디가도 끝장이 난다.
그러한 의미가 담긴 말에 가우스트가 어이없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목적을 알 수 없다면, 모두 자네 추측이라는 거 아닌가."
평범하게 웃고 있는 그였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어지간한 자라면 눈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기가 죽을 만큼 살벌한 기세.
허나 안톤은 그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되물을 뿐이었다.
"강물이 원하는 걸 모른다고해서, 강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까지 모르는 건 아니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