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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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41화
141. 제안
"...?"
안톤이 멈춰 서 의뭉스런 시선을 보내자, 아로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공주님을 한 번 만나주지 않겠소?"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
"미안하지만 바빠서."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안톤이 다시 등을 돌리려 하자, 아로스는 그새 또다시 허리를 굽혀 안톤의 옷가지를 부여잡고 늘어졌다.
누가 도리안이 아니랄까봐, 굉장한 악력이었다.
이대로 무시하고 움직이면 옷이 찢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안톤은 잠시 멈춰섰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아로스가 필사적으로 거래를 제시했다.
"제발 부탁하오! 어차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당신은 여기서 나가는 방법도 모를 것 아니오? 그랜드 게이트 아래로 그냥 떨어져 내려도 무사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도 우리들이 다니는 통로가 필요할 것이오."
"그 통로는 외부인에게는 철저히 위치가 금지된 곳일텐데? 만약 내가 나가서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니면 어쩔 생각이오?"
"그 만큼 우리도 절실하다고 생각해주시오. 내가 책임지고 당신을 그리로 보내겠소."
간절함이 구구절절 전해졌지만, 안톤은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말로 그랜드 게이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오르는 건 힘들어도, 왠지 내려가는 건 어떻게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말이지.'
허나 속에서 샘솟는 그런 자신감과 다르게 안톤은 일말의 여지를 주었다.
"...만나보는 것만이라면."
어차피 카린도 연락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 이곳에서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뭐, 내심 대륙의 비밀 중 하나였던 록티아 내부의 모습이 궁금한 것도 살짝 있었고 말이다.
아무튼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안톤은 거침 없었다.
"그럼 갑시다."
"정말이오? 고맙소!"
"대신 빨리 가야 할 거요. 언제 내 맘이 변할지 모르는 노릇이니."
고작 한 마디의 재촉이었지만 뼈에 와닿았는지, 아로스는 정말로 빠릿하게 움직였다.
"쟈브론! 자네가 필요하네!"
쟈브론이란 이름의 병사가 아로스의 명령에 망설임없이 갑옷을 벗어던졌다.
"커허엉!"
눈 깜짝할 새 사람에서 코뿔소로 변해버린, 사내를 보며 안톤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평소엔 인간의 모습을 하다가도 원할 땐 언제나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애니반들만이 가진 특성이란 건 알았다.
허나 이렇게 탈태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익숙한 솜씨로 코뿔소 위에 안장까지 올린 아로스가 이제서야 안톤에게 질문을 날렸다.
"근데 말은 탈 줄 아시오?"
"그렇소. 뭐, 말이랑은 조금은 다른 것 같지만."
안톤이 피식 웃자, 아로스 또한 스스로가 느끼기에 다소 민망했는지 머쓱하게 웃었다.
"그냥 말이라 생각해주시오. 별로 다를 것도 없다오."
"그럼 갑시다."
그렇게 안톤과 아로스를 태운 코뿔소가 숲을 질주했다.
말보다도 빠른 속도였고, 커다란 덩치에 비해 지구력도 상당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록티아의 왕도. 가네스에 오신 걸 환영하오."
자연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숲이 끝나자, 이윽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전경의 도시가 나타났다.
천혜의 성벽인 그랜드 게이트로 사방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인지, 도시에는 딱히 울타리 같은 것도 쳐져 있지 않은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이제부터는 좀 천천히 갈 테니 양해 좀 해주시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이것을 입어주시오. 주민들이 인간인 당신을 보면 분명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것이오."
"그러지."
안톤은 순순히 아로스가 건네 준 로브를 걸쳐입었다.
괜한 소란에 연루되는 것은 그로서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에반하임과는 또 느낌이 다르군.'
이곳까지 타고 온 코뿔소에서 내린 안톤은 주변을 구경하며 아로스를 따라 걸었다.
아인종들의 도시 답게, 가네스는 굉장히 이색적인 분위기의 도시였다.
얼핏 분위기 자체는 에반하임과도 비슷한 듯 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전혀 달르달까.
그저 편의상 아인종이라는 한 이름만 함께 쓸 뿐이지, 사실상 네 가지 종족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도시답게, 건물들이 하나 같이 개성 있었다.
'문이 유독 작은 집은 벨보르들의 거처인가 보군.'
인간의 허리쯤 되는 왜소한 체구 덕에 작은 장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벨보르.
전투보다 제작에 특화된 그들은, 다른 아인종들 보다도 외부에선 만나기 어려웠다. 어지간해선 록티아 외부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던 탓이다.
그러나 록티아 내부인 이곳에선 고개만 살짝 돌려도 그들이 눈에 보였다.
'그렇게 보석을 좋아한다더니 그건 아무래도 사실이었나 보군.'
얼핏 뒷모습만 보면 소년처럼 보이는 벨보르들은 하나같이 몸에 보석들을 주렁주렁 메달고 다니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여기저기 구경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왕궁에 도착했다.
이 근방에선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긴 했다만, 황궁에 비하면 아주 소박하기 그지없는 크기. 돌이나 대리석이 아닌, 나무로 지어졌다는 것만이 조금 특이했다.
또한 그래도 왕이 기거하는 곳이라고, 마을 입구와는 다르게 앞을 지키는 자들도 있었다.
"아로스 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근위병이 아로스에게 경례했다. 얼굴에 갈기가 수북한 걸로 보아 코뿔소로 탈태가 가능했던 병사와 같은 애니반인 것 같았다.
"공주님을 뵈어야겠는데, 어디 계신가?"
"급한 용무입니까?"
"그러네."
원래 이들 문화가 이런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대화가 단답이고 직설적이다.
근위병이 안톤을 흘깃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뒤에 있는 자도 함께입니까?"
"믿을 수 있는 자네."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일단 기별을 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병사를 시켜 어디론가 보낸 근위병이 살살 눈치를 보며 아로스에게 질문을 날렸다.
"혹시 제가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모두 얘기해주겠네."
"알겠습니다."
이후 딱히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저 근위병이 계속해서 호기심 담긴 시선을 안톤에게 보냈고, 안톤은 이를 싹 무시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기별을 전하러 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일단 접견실에서 기다려달라고 하시는군요. 금방 오신답니다."
"알겠네."
아로스를 따라 고풍스런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묘령의 여성이 찾아왔다. 진갈색 머리를 곱게 땋아 한쪽으로 넘긴 이십 대의 여성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녀서일까.
그녀는 굉장히 차분해 보이는 첫인상을 풍겼다.
'여기에 인간이 있을 린 없으니, 저 여자가 공주겠군.'
아인종들 중 왕족인 에븐들 뿐만이 별 다른 신체적 특성이 없단 것쯤은, 안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아로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자, 공주가 나긋나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언제 오시든 환영합니다. 아로스 님."
그녀의 목소리나 눈빛은 마치 모든 걸 감싸안을 듯 자애롭고 포근하였지만, 그것은 오로지 아로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였다.
그녀의 눈빛은 안톤을 향하면서 완전히 돌변했다.
"근데 저기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인간은 대체 누구죠?"
싸늘하고 경계의 빛이 물씬한 눈빛이 안톤에게로 쏘아졌다.
동일한 여자가 내뿜는 분위기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극심한 변화였다.
"설마 아로스 님이 허튼 생각을 하셨을리는 없을테고, 혹시 성벽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건가요?"
질책의 의미가 담긴 물음이 아로스를 향한다.
온화한 것은 오직 첫인상 뿐이었는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아로스의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렇게 그가 안톤에 대해 막 뭐라고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안톤이 얼굴을 가리던 로브를 벗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고, 다시금 그녀의 시선이 안톤으로 옮겨졌다.
"당신은 누구죠?"
"정체를 묻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게 우선이겠지."
안톤의 당돌한 대응에 공주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인간들은 듣던 대로군요. 제 이름은 베니그론 첼브론드. 록티아 왕가의 유일한 딸이자, 차기 여왕으로 등극해 이 땅을 지킬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 묻죠. 당신은 누구입니까?"
"안톤. 성은 없소."
록티아의 공주, 베니그론의 입가에 비웃음이 희미하게 실렸다.
"성이 없단 건,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이라는 거겠죠. 도대체 왜 이런 인간을 제게 데려오신 건가요?"
"그는 명인입니다."
대륙의 최강자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수식어. 명인. 그나저나 이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라 여긴 것일까.
베니그론의 질문을 받은 아로스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명인? 이런 자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아닌가요?"
"어쩌면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저 자가 명인이 된 것은 4년 전이었고, 그 이후 곧바로 실종됐으니까요."
"그럼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어떤 의도인지도 모르는 자를 궁으로 데리고 오다니요!"
"그와 대화를 나눠본 제가 임의적으로 판단해본 결과, 그는 우릴 해하기 위해 접근한 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로스는 꿋꿋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고, 베니그론은 그런 그를 노려보듯 지켜보았다.
그러다 결국 어쩔 수 없었는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알겠어요. 만약 저 남자가 정말로 명인이고, 악독한 마음까지 품고 있었다면 지금 이미 우리는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아로스 님의 말을 다 믿을게요. 하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저 남자가 명인이라는 것과 지금 일이 무슨 관계가 있죠?"
아로스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베니그론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마룡을 막을 수 있는 건 그 뿐입니다. 공주님."
마룡은 또 갑자기 뭔 얘긴진 모르겠다만, 베니그론은 놀란 기색으로 한참이나 대답하지 못했다.
"...아로스 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제 알겠습니다. 허나 아무리 명인이라 한들 그 자는 이길 수 없어요. 어떻게 인간이 용을 대적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아로스 님은 제가 성벽 수호대라는 걸 만들면서까지 멀리 보낸 이유를 정녕 모른단 말인가요?"
"공주님!"
아로스의 외침이 바깥의 복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베니그론은 그가 이렇게 소리칠 줄은 몰랐는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어찌 그걸 제가 모르겠습니까! 허나 이 자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정된 미래만 남은 저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 말입니다!"
아로스의 말에는 박력이 넘쳤고, 확신이 가득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말은 없었지만 말보다 더한 것들이 쉴 새 없이 오간 시간이었다.
"...아로스 님을 믿겠어요."
베니그론의 승낙에 아로스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군신 관계의 유대감을 확인한 충신의 얼굴이랄까.
뭐, 그건 베니그론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은 그렇게 서로를 보며 한참이나 진지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왠지 입을 열면 곧바로 산파가 깨질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안톤은 아랑곳 않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나는 애초에 한 번 만나만 달라고해서 만나러 온 것일 뿐이지, 결코 당신들의 희망 같은 게 아니오."
"...?"
아로스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린다.
상당히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안토은 괜한 동정심에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그 일이 끝났으니 돌아가 봐야겠군. 약속대로 나가는 길이나 알려주시오."
"잠깐. 안톤 경!"
아까 그랬던 것처럼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는 아로스였고, 안톤은 이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슬쩍 발을 뒤로 옮기는 것으로 손길을 피해냈다.
그 탓에 중심을 잃은 아로스가 바닥으로 엉거주춤 넘어졌다.
그런 그를 향해 베니그론의 싸늘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아로스 님. 설마 거래의 대가로 통로를 내건 건가요?"
"...그를 잡을 방법은 오직 이 하나 뿐이었습니다."
아로스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자, 베니그론이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두눈을 꾹 감았다.
"만약 약속을 어길 셈이라면 나까지 적으로 만드는 것이오. 안 그래도 마룡인가 뭔가 때문에 곤란해 보이는데, 쉽게쉽게 가는게 피차 좋지 않겠소?"
안톤이 밖으로 표출하지 않던 기세를 내뿜었다.
어느새 공기중에 중압감이 가득 실렸고, 베니그론은 다리의 힘이 풀렸는지 풀썩 자리에 주저 앉았다.
허나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빛 만큼은 여전히 강렬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죽겠군요."
"공주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는 의미가 담긴 말에 아로스가 놀라 소리쳤지만, 그녀는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 통로는 우리를 바깥으로부터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외부인에게 알려져선 안 됩니다. 설령 이 자리서 비참하게 죽는다 해도!"
"...저 또한 공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죽음을 결사한 눈빛이 안톤에게로 쏘아졌다.
더욱 더 살기를 담아 기세를 뿜어내도 그 눈빛은 변할 기미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기세에 잡아먹힐 뿐이라 여겼는지, 아로스가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공주님 먼저 가겠습니다! 제 과오를 용서해주시길! 으아아아아!"
퍽.
안톤의 주먹이 아로스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전력을 담은 일격은 아니었지만, 혈도를 노렸기에 의식을 잃은 아로스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인종들은 원래 죄다 이렇게 고집이 센가?'
안톤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냥 겁이나 줘서 통로를 알아낼 생각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말이 안 통하는 탓에 골가 아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