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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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39화
139. 귀환
섬에 도착하고, 릴리와 조우한 지도 어느새 여섯 달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안톤은 착실히 릴리에 대해서도, 이 세계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아갔다.
팔 한 짝을 대뜸 날려버렸던 첫 대면과는 다르게, 릴리는 굉장히 여리고 사람을 잘 따르는 아이였다.
항상 릴리는 안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했다. 때문에 안톤은 릴리가 호기심이 많은 소녀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이후 릴리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그런 게 아니란 걸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릴리는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녀가 혼자 보낸 시간들은, 안톤이 이 세계에서 보낸 4년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오랜 시간이었을 테니까.
어느 정도 친해진 이후, 안톤은 릴리의 정체를 물어본 적 있었다. 릴리는 자신이 이 세계의 관리자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안톤은 그럼 신인 거냐고 되물었고, 릴리는 처연하게 웃었다.
"난 신 같은 게 아니야. 말했잖아. 관리자 같은 거라고.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얘기하는 것이겠지."
"그 사람들?"
"천상인. 나는 그렇게 불러."
안톤의 차원도, 태초의 세계라는 명칭의 이곳도, 그 외에 다른 차원들도.
모두 천상인이라는 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릴리는 얘기했다.
그리고 그 얘기가 맞다면, 릴리의 말대로 그들이야말로 신이라 칭할 수 있는 존재였다.
"처음엔 이 세계에도 이렇게 아무것도 없던 건 아니었어. 매일 같이 많은 천상인들이 드나들었고, 활기도 넘쳤지."
천상인들에게 이 세계는 거대한 실험장 같은 것이었다고 릴리는 설명했다.
"그들은 늘 바쁘게 이곳에서 무언가를 창조해내고 또 지워냈어. 그들이 나를 만든 것도 그걸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였지. 나는 항상 그들을 도와 뭔가를 만들거나, 바루스들을 해치웠어."
"바루스?"
"세계를 갉아먹는 괴물들이야. 자신들이 애써 만든 세계를 해치는 바루스들을 천상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이 여겼었지."
말을 하고는 뭔가 떠오르는 일화가 있는지, 릴리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유심히 릴리의 이야기를 듣던 안톤이 질문했다.
"그럼 천상인들은 어디갔지?"
릴리는 분명 오랫동안 혼자 있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천상인들의 발길이 끊긴지도 한참이 되었다는 뜻이다.
예전에 세로게트가 말했던, 세계는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이 어쩌면 그것과도 상관이 있을지 몰랐기에 안톤은 귀를 기울였다.
허나 이번 기회에 신과 얽힌 비사에 대한 진실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단 기대는 빗나갔다.
"그건 나도 몰라.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았어."
릴리가 고개를 숙이며 다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안톤은 뭔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동정심이 피어올라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외로웠겠군."
그리고 그 한 마디를 들은 릴리가 기가 차다는 듯 질색했다.
"외로움? 난 그런 감정은 없어. 만들어 질 때부터 입력되지 않았거든. 나는 늘 밝고 명랑한 릴리야."
"..."
안톤은 당당히 어깨를 편 릴리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주었다.
릴리가 꽉 쥔 바짓춤에서 미미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 * *
"싫어. 알려주지 않을거야. 아니, 못 알려줘. 이건 비밀이니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어떡해야하냐는 질문을 했더니 돌아온 답변이었다.
천상인이니 뭐니, 묻지 않던 것까지 스스럼없이 대답해주던 릴리였다.
그런데 이건 비밀이어서 안 된다니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마치 뭔가를 숨기는 듯한 표정이 아닌가.
허나 안톤은 괜히 이를 추근하지 않았다.
그저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라고 여기며, 릴리의 마음이 바뀌길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지난 며칠 동안 안톤은 평소처럼 행동하고 대화했다.
그 동안에 오히려 평소와 같지 못했던 것은 릴리 쪽이었다.
릴리는 항상 어딘가 석연찮은 기색으로 내내 안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결국 짓누르는 마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일까.
오늘에 이르러서 릴리는 힘 없는 목소리로 먼저 그 주제를 꺼내왔다.
"그렇게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그래."
안톤의 단호한 대답에 릴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어딘가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내짓던 릴리의 버릇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고 싶은 건데?"
"돌아가야만 하니까."
릴리는 안톤의 이야기들을 모두 들었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돌아가야 하는지도 안다.
하지만 릴리는 그것을 말리고 싶었다.
"이제 아저씨도 내 말을 들어서 알잖아. 보아하니 거기도 나 같은 관리자가 남아서 어떻게든 축을 이용해 버티고 있는 모양인데, 여기나 거기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니까?"
"그래도 가야한다."
"아 참! 아저씨, 아저씨는 그 운명이란 걸 증오했다면서? 여기 있으면 그쪽 관리자한테 이용당할 염려도 없어. 그러니까 그냥 나랑 있자. 응?"
"..."
이미 확고한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는 듯, 안톤이 입을 굳게 다물자 릴리가 울먹이며 속내를 꺼냈다.
"내가 싫은 거야? 그래서 그 사람들처럼 날 버려 두고 가려는 거야?"
"그럴 리가."
"그럼 가지마... 이제 더는 혼자 있기 싫단 말이야."
외로움 같은 건 모른다더니, 이제야 솔직한 마음을 내비친다.
안톤이 릴리와 함께한 시간은 대략 6개월 가량 뿐이 되지 않았다. 허나 이 텅빈 세계에서 단 둘 뿐이란 사실에서 오는 동질감 때문일까.
그간 둘 사이에는 적잖은 유대감이 쌓였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구슬려 이곳을 탈출할 생각만 하던 안톤조차, 릴리의 눈물에 결심이 흔들릴 정도로 말이다.
떠난 후 이곳에서 혼자서 자신은 외롭지 않다며 버틸 릴리가 눈에 자꾸만 밟힌다.
그것은 어쩌면 안톤 또한 진정한 고독이, 얼만큼 괴로운 것인지 지난 시간 동안 겪어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안톤이 허리를 굽혀 릴리와 눈을 맞췄다.
"내가 돌아가는 이유가 약속 때문이라고 그랬지?"
"응..."
"너에게도 약속하마. 언젠가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고."
안톤의 진정성을 말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한참이나 말없이 안톤을 바라보던 릴리가 촉촉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약속해."
그 말과 함께 릴리가 주먹을 내민다.
조그마한 새끼 손가락만 쑥 내밀어져 있는 주먹이었다.
"천상인들이 약속할 때 쓰던 의식이야. 이걸 어기면 바늘 천 개를 삼키는 저주에 걸린댔어."
안톤이 피식 웃었다.
신이나 다름없는 천상인들의 의식이라니니, 이거 미신이라 취급하기도 뭣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뭐,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으니 상관 없었다.
"그거 참 살벌하군.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나랑 똑같이 한 다음에, 여기에 손을 걸어. 그리고 맹세하는 거야."
안톤이 릴리와 새끼 손가락을 교차하며 말했다.
"맹세한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그리고 널 데리고 나가마."
"...데리고 나간다고? 그건 불가능해."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겠지."
"헤... 역시 아저씨다운 말이네.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
릴리가 평소와 같은 밝은 모습으로 미소지었다.
안톤은 그게 애써 지어낸 표정이란 걸 알지만, 내색치 않았다.
릴리는 더는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없었는지 휙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안톤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자, 따라와."
지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가본 적도 없었던 릴리의 방이었다.
릴리는 방에 가득한 인형들 사이를 뒤지더니, 아기자기한 반지 하나를 꺼냈다.
"이걸 가져가."
얼떨결에 반지를 받은 안톤이 주춤했다.
도대체 뭐에 쓰는 물건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다.
"돌아온다며? 그걸 위해선 반드시 필요할거야. 항상 끼고 다녀."
"끼고 다니라니..."
안톤이 말꼬리를 흐렸다.
도무지 맨정신으로 한쪽 손에 끼고 다니기에는 영 부끄러운 모양새의 반지였다.
"이걸 끼고 있으면 그쪽 세계의 관리자는 더 이상 아저씨한테 간섭하지 못할 거야. 어떤 방법으로 여기에 돌아오겠다고 장담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분명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
그저 끼고 다니는 것만으로 세계가 부여한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반지라니, 생긴 거에 비해 능력이 굉장하다.
그리고 어차피 안톤 또한 운명의 힘에 의지해서 블라디미르를 상대할 생각은 그다지 없었기에, 끼고 다니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안톤은 쉽사리 반지를 손에 끼워 넣지 못했다.
"...생김새는 어떻게 못 바꾸나?"
"글쎄? 천상인이라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안 된다는 말을 돌려하는 릴리였다.
안톤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손에 반지를 끼우자, 릴리가 깔깔 거리면서 웃어댔다.
"걱정 마. 일단 끼고 나면 아저씨의 눈에만 보이는 반지니까."
릴리의 말에 내쉬던 안톤의 한숨이 안도의 숨으로 탈바꿈했다.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면, 끼고 다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제 준비는 됐어?"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가 그의 손을 잡고 방 한구석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둥근 형태의 전신 거울 하나가 있었다. 릴리가 무언가 앞에서 주문을 읊자, 거울은 소용돌이의 빛을 뿜어냈다.
별 부연 설명은 없었지만, 안톤은 그것이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는 출구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의 노력이 허무해지는군."
"그러게. 누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계의 축들을 모으래?"
허탈한 중얼거림에 릴리가 핀잔을 쏘아낸다.
그간 안톤이 모았던 구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서로 신뢰가 쌓이기 이전에 있었던 일화를 떠올리며 둘은 미소지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킨지 얼마나 되었을까.
먼저 이별의 말을 내민 것은 릴리였다.
"다녀 와."
"그래. 다녀오마."
안톤도 더 이상 거울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야할 시간이었다.
* * *
록티아의 외곽 성벽.
원래라면 이곳에 경비 임무로 병력이 배치될 일은 거의 없다.
물리적인 힘으로 그랜드 게이트를 넘어 올 침입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허나 현 대륙의 정세가 너무나 난해했기에, 만전을 가하는 의미에서 성벽에도 병력이 배치 됐다.
"공주님께서는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신지..."
새로이 창설된 성벽 수호대의 대장 아로스가 성벽 끄트머리에 올라 서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계절은 여름이었으나, 별이 가장 가깝다 불리우는 이곳의 기온은 입김이 나올 정도로 낮았다.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며, 아로스는 그가 충성하는 이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록티아 유일의 공주 베니그린 첼브론드.
아로스에게 성벽 수호의 임무를 명한 장본인.
"공주님도 성벽을 넘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셨지. 만일 침입자가 온다면 반드시 하늘에서 올 것이라고."
아로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단언컨대 그가 있는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별과 가까운 곳이다.
일반인이라면 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울 만큼 공기가 옅고, 새들조차 제대로 날지를 못한다.
"그래도 이곳은 평화로우니 다행이구나."
아로스의 시선이 성벽 아래로 향했다.
어두운 밤이었으나 그 아래에로 드문드문 불이 밝혀져 있는 게 보였다.
얼핏 작은 횃불 정도의 크기였으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의 시력이 비범하다 한들, 이만한 거리에서 보이는 불빛이 고작 횃불일 리가 없었으니까.
적어도 마을 하나 정도는 통째로 불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중이리라.
"어째서 이런 난세가 내 시대에..."
아로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혹함 뿐인 지상과는 다르게,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적적함을 달래던 떄였다.
그의 눈에 떨어져내리는 별똥별이 보였고, 얼른 소원을 빌기 위해 아로스가 눈을 감았다.
현재 그가 빌만한 소원은 딱 하나였다.
'어서 이 혼란이 지나가기를...'
간절한 염원을 담아 소원을 빌고 있던 때, 아로스는 주변의 소란에 재빨리 눈을 떴다.
저 멀리서 지나가는 듯하던 별똥별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
"피해라!"
앞뒤 잴 것 없이 아로스가 옆으로 몸을 굴렀고, 그 위로 은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빠르게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정적이던 밤을 꺠우는 듯한 파괴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