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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3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38화

138. 태초

 

 

예전의 몸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방향을 대충 갸늠했다고 한들, 지금의 그로서는 수영해서 섬까지 도달하는 건 무리다.

 

섬까지 무사히 도착하려면 반드시 배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연히도 이 텅 빈 세계에서 턱하니 어딘가 배가 버려져 있을 리는 만무하니, 직접 만들어야 한다.

 

안톤은 살면서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허나 그는 시작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부족한 지식과 경험은 분명 널리고 널린 이 시간이 채워줄 수 있을 테니까.

 

일단 안톤은 벌목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우선 황야로 돌아가 썩어문드러진 악마병들의 사체를 뒤져 도끼를 구했다. 그리고 숲으로 향해 나무들을 베어 어느 나무가 물에 잘 뜨는지 선별했다.

 

본격적으로 뗏목을 제작하기 시작한 건 그 이후부터다.

 

워낙에 이런 종류의 일에 경험이 없었기에 꽤나 난항을 겪었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며 노력하니 제법 그럴 듯한 결과물이 나왔다.

 

'이거라면 되겠어.'

 

안톤이 만족스런 미소를 내지었다. 마치 잘 자라준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미소였다.

 

사실 지금 그가 완성한 이 뗏목은 벌써 네 번째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전에 만들었던 뗏목들은 모두 파도를 버티지 못하고 분해됐다.

 

바로 이전에 실패에선 바다 한복판에서 뗏목이 망가졌기에 정말 죽을 뻔 했었다. 그 때문에 이번에는 실패의 원인들을 하나 하나 분석하여 공을 들여 만들었다.

 

'섬까지만, 아니 그 근처까지만 버텨주면 된다. 나머지는 어떻게든 몸으로 떼우면 될 테니.'

 

말 그대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이라고나 할까.

 

안톤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물론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섬에는 이곳을 탈출할 방법도, 그렇다고 뗏목을 만들만한 나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또 설상가상으로 식량으로 쓸 만한 것조차 전무하다면 그냥 그대로 죽는 수 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그 동안 안톤은 구슬들을 모으기 위해 다른 지역들을 샅샅이 뒤졌다. 그래서 잘 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 저 섬엔 뭔가가 있다.'

 

안톤의 믿음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을 정도로 확고했다.

 

어쩌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저 아집의 한 종류일지도 몰랐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이 세계에 낙오한지 근 사 년.

 

안톤의 정신은 위태로운 낭떠러지까지 몰려 있었으니까.

 

"으아아아!"

 

우렁찬 기합과 함께, 안톤을 태운 뗏목이 바다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그 어느 때보다 느낌이 좋다.

 

중심으로 갈 수록 거칠어지던 파도도 왠지 잔잔했고, 바람도 선선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손에 쥘 듯 서서히 형상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 기분 좋은 느낌 속에서 안톤은 힘차게 노를 저었다.

 

땀이 한 방울 한 방울 흘러 나올 수록, 그는 웃었다.

 

이 땀들이야말로 그가 지금 앞으로 전진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렇게 뗏목을 타고 바다를 헤쳐나간지 일주일.

 

안톤은 드디어 성공을 논할 수 있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섬 주위로는 암초들이 널려있었고, 그로 인해 소용돌이가 눈으로 보일 정도로 물살이 심상치 않았다.

 

'한 번 삐끗하면 골로 가버리겠군.'

 

이 연약한 몸으로 저 물살에 빠지는 즉시,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온몸이 박살나버리고 마리라.

 

안톤은 멈춘 노질을 재개하기 전에 결심을 다잡았다.

 

두려움과 의심은 지금 이 순간 도움이 되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간의 외로운 싸움으로 인해 그의 정신은 이곳저곳 갉아먹혀 있었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잘 갈무리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그를 지탱해주던 한 가지의 목적이, 오늘도 그의 등을 떠밀어주었던 것이다.

 

'반드시 이곳을 나간다.'

 

노를 굳게 거머 쥔 안톤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뗏목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섬이 보이는 정면은 아니었다.

 

안톤은 섬 주위를 한 바퀴 뺑 돌며 암초가 적고 물살이 약한 곳을 찾았다.

 

아무리 죽음을 불사했다고 한들, 그저 막무가내로 돌진하고 보는 것은 그냥 자살 행위였다.

 

안톤은 총 하루에 걸쳐 섬 주변을 둘러봤고, 이내 어느 쪽의 길을 고를지 선택했다.

 

시간을 더 들인다면 가장 최적의 선택지를 찾아낼 수 있을 테지만, 아쉽게도 안톤에겐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파도에 부닥치는 이 뗏목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무르게 변해갈 테니까.

 

물론 이번에는 탐색만 한 뒤, 지상으로 돌아갔다 다시 시도한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다.

 

허나 오늘만큼 시기가 좋은 날이 언제 또 올지 몰랐다.

 

촤앗! 촤앗!

 

본격적으로 물살을 타기 시작하고서도, 뗏목은 안톤이 노를 저을 때마다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직접 몸으로 하는 일이어서였을까.

 

뗏목을 제작하는 일과는 달리, 그의 노질은 이미 숙련된 뱃사람의 솜씨에 대적할 만큼 노련해져 있었다.

 

안톤은 급류 위에서도 능숙하게 암초들을 피해내며 전진했다.

 

조금이라도 아차하는 순간 목숨이 날아가버릴 테지만, 노를 젓는 그의 눈빛은 고요하기만 했다.

 

흥분이나 조급,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은 잘 될 일도 망치는 주범들 중 하나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모든 암초들을 성공적으로 피해내 섬에 도착하는 순간.

 

안톤은 참아왔던 감정들을 표출했다.

 

"우아아아아아!"

 

귀를 먹먹하게끔 만드는 파도 소리도 묻힐 만큼 세찬 함성 소리.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푸다닥 거리며 하늘을 날았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생명체였다.

 

그는 하염없이 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에는 탐스럽게 생긴 과일들이 주렁주렁 메달려 있었고, 새가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곳곳에서 보였다.

 

동물들은 마치 인간을 처음 보는 것마냥 멀리서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안톤은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서라. 기뻐하는 건 더 나중이다."

 

허나 그런 노력과 달리 심장은 주체하지 않고 요동치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던 모래사장에서 일어난 안톤은 타고 온 뗏목에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이래선 다시 쓰진 못하겠군.'

 

그래도 괜찮다.

 

일단 저 과일이나 짐승이 있는 걸로 보아 적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어 보였으니까.

 

안톤은 혹시 몰라 챙겨왔던 검을 빼들었다.

 

'일단 섬부터 둘러보자.'

 

그렇게 막 첫 걸음을 떼던 찰나였다.

 

턱.

 

무언가 모래에 떨어진 소리가 났다.

 

바로 그의 아래에서 난 소리였다.

 

안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떨구어 이를 확인했다.

 

"...?"

 

그의 오른 발 옆치에, 검을 쥔 팔이 모래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이나 팔의 생김새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안톤은 자신이 볼 수 있도록 오른 팔을 들었다. 팔은 멀쩡했다.

 

만약 팔꿈치 아래 부분이 통째로 잘려나간 것만 아니었다면.

 

팔의 잘려진 단면에서는 피도 새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이렇게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꿈, 아니면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젠장. 꿈일리가 있나.'

 

그제야 현 상황을 마주 본 안톤은 곧장 옆으로 몸을 내던졌다.

 

꿈이나 환각이라는 가정보다는 이 섬에 누군가 위험한 녀석이 자신을 노렸다는 것이 보다 신빙성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

 

안톤의 본능이 내린 판단은 옳았다.

 

파바밧!

 

방금 전까지 안톤이 서 있던 모래가 무언가에 부딪친 듯 위로 솟구친다.

 

모래가 튀는 모습을 통해 안톤은 대강 방향을 짐작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누군가 태연자약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 뭐야? 바루스가 아니었잖아?"

 

 

* * *

 

그것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안톤과 눈을 마주친 그 소녀는 환한 미소를 내뿜으며 천진무구하게 질문을 날렸다.

 

"대체 아저씨는 누구야?"

 

"안톤... 성은 없다."

 

"재밌는 사람이구나!"

 

안톤의 대답에 소녀가 꺄르륵 웃는다.

 

어째선지 소녀에게서 적의는 느낄 수가 없었지만, 안심할 수 없는 없었다.

 

자신의 팔을 자른 이가 저 소녀라는 건 어린 애라도 짐작할 수 있을 일이었으니까.

 

"잠깐만. 아프진 않겠지만, 보기 흉하니까 다시 복구해 줄게!"

 

소녀의 말이 끝나자 마자, 바닥에 나뒹굴던 안톤의 팔이 스르륵 연기처럼 변하며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인지를 했을 땐 이미 잘려나가 있던 팔꿈치 아래 부분이 정상으로 돌아온 후였다.

 

평범한 소녀일 거라곤 눈곱만치도 생각치 않았다.

 

헌데 이런 신과 대적할 정도의 절대적인 능력이라니, 도대체 이 소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안톤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넌 누구지?"

 

질문을 받은 소녀가 배시시 웃음을 내지으며 안톤에게로 다가왔다.

 

"릴리 트루지온. 그게 내 이름이야. 성은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니, 그냥 릴리라고 불러줘."

 

어떠한 절대적인 존재보다는, 마치 어쩌다가 거대한 힘을 지니게 된 어린애 같은 모습.

 

물론 겉보기로 그랬다는 것이지만, 어쩌면 이 소녀를 잘만 구슬리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안톤은 속에서 들끓는 적의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릴리. 혹시 이곳이 어딘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건, 아저씨는 역시 천상인이 아니라는 소리지?"

 

어느새 안톤의 코앞까지 다가온 릴리가 고개를 들어 안톤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천상인?"

 

"아저씨는 정말로 현지인이었구나? 그것도 다른 차원에서 건너 온!"

 

안톤이 되묻자, 그게 대답이 되었다는 듯 릴리가 방방 뛰었다.

 

온몸으로 기쁨을 표하는 릴리를 보며, 안톤은 도무지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 몰라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 안톤을 릴리가 눈을 반짝이며 채근했다.

 

"그쪽의 얘기 좀 들려줄 수 있어? 응?"

 

"내 질문에 답해준다면 얼마든지 들려주마."

 

"아, 미안해. 너무 내 말만 했지? 여긴 태초의 세계야. 모든 차원의 시초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제 궁금증이 풀렸어?"

 

저런 짧막한 설명으로 궁금증이 풀릴 리는 만무했지만, 안톤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겐 보다 중요한 질문이 따로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내 원래 세계로 돌아 갈 수 있지?"

 

안톤의 질문에 릴리가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으로 고갤 갸웃했다.

 

"...왜 돌아가려는 거야?"

 

"금방 돌아가겠다고 누군가와 약속했다."

 

"...들려줘. 아까 여기가 어딘지 알려주면 그쪽의 얘기를 들려준다고 했잖아. 우선 나랑한 약속부터 지켜."

 

여전히 서글한 웃음을 짓는 릴리였으나, 왠지모르게 목소리는 냉랭했다.

 

이 소녀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안톤은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마."

 

이 세계에 떨어진지 어언 4년.

 

드디어 이곳을 탈출할 단서를 발견했다.

 

한 시라도 빨리 이 빌어먹을 곳을 탈출하고 싶긴 하다만, 괜히 조급해서 일을 망쳐선 안 된다.

 

"그럼 따라 와, 아저씨!"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릴리는 안톤을 섬 안쪽에 있는 자신의 거처까지 데리고 갔다. 작은 옹달샘 옆에 지어진 소박한 오두막이었다.

 

허나 안톤은 오두막의 문을 넘는 순간, 소박한이라는 수식어는 틀렸음을 깨달았다.

 

내부의 공간은 물리 법칙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 만큼 넓었다.

 

안톤은 유심히 여기저기를 살폈다.

 

바닥의 재질이나 공간에 배치된 가구 따위의 것들은 모두 안톤에게는 생경한 것들 뿐이었다.

 

"여기 앉아!"

 

푹신푹신한 의자에 안톤을 앉힌 릴리는 그 앞에 오무려 앉았다.

 

그리고는 시작된 안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경청했다.

 

그렇다고 듣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안톤이 뭔 얘기를 할려하면, 쉴 새 없이 재잘되며 이런저런 질문들을 해왔다.

 

마치 릴리는 그가 살던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한 것 같았다.

 

그렇게 안톤의 이야기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됐다.

 

"오늘은 이제 그만 할래. 잘 시간이거든. 남은 얘기들은 내일 계속 해줘."

 

"그러도록 하마."

 

밤이 되자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릴리가 일어났다.

 

그녀의 옷차림은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의 바뀌어져 있었다.

 

당근이 그려진 잠옷에 양팔로 꽉 안은 토끼 인형.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을 한 릴리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안톤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헤헤. 고마워. 정말로 오랜만이었어. 이렇게 즐거웠던 적은."

 

왠지 안톤은 방금 릴리가 말한 오랜만이 의미하는 세월이, 보통 사람들의 오랜만과는 아득히 다를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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