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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3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8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33화

133. 함정

 

 

카린의 본가에서 지낸 평온한 나날.

 

그동안 안톤은 시간이 남으면 항상 명상을 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남들 눈에는 그가 명상을 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딱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안톤은 오로지 한 가지 화두를 두고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블라디미르.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행동하고 있을 터인데, 정말로 이렇게 안주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고민이었다.

 

사실 안톤이 그간 블라디미르의 계획을 막아 세계를 지키겠다거나 하는 거창한 사명을 띠고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항상 눈앞의 일에 집중했고, 그때그때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일이었을 뿐이다.

 

뭐, 지금이야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란 걸 안다.

 

빌어먹을 운명의 힘이, 안톤이 그들과 마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혼란스러웠다.

 

‘이젠 잘 모르겠군.’

 

안톤은 세로게트에게서 이 세계가 거짓된 세상임을 들었다.

 

그래서 블라디미르가 이 세계를 탈출하기 위해 열쇠를 모은다는 것도.

 

‘그게 악인가?’

 

기본적으로 안톤은 그들과 섞이려야 섞일 수 없는 사이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원수지간이랄까.

 

안톤의 부모는 그들에 의해 죽었고, 그 탓에 안톤은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허나 그게 처음부터 운명으로 구분 지어져 있던 것이라면…….’

 

어쩌면 진정한 적은 그들이 아니라, 이 거짓된 세계를 이어 가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강요하는 세계일지도 몰랐다.

 

‘사실 선이니 악이니 하는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지.’

 

애초에 안톤은 악은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등의 고상한 사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저 자신의 윤리관에 있어 아니면 아닌 것이었을 뿐.

 

그래서였을까.

 

안톤은 블라디미르의 목적을 알게 됐을 때도, 딱히 모든 걸 바쳐서라도 그들을 막겠다는 사명감을 띠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그가 원한 건, 예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손에 검을 쥐고, 발길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 여행을 다닐 수만 있다면 족했다.

 

이 세계에 미래가 사라진 지는 오래고, 그저 생존만이 목적인 세계가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란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초심을 떠올리니 보다 머릿속이 명확해진다.

 

많은 것들이 눈앞을 흐리게 하고 있었지만, 안톤은 끝내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거였다.

 

‘내가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안톤은 선과 악의 구분이 무의미하단 걸 깨달았다.

 

애초에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옳다고 여긴 일을 내일 후회할 수도 있는 것이 삶이었다.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었다.

 

단지 매 순간순간, 스스로가 옳다고 여긴 것에 진지하게 임하면 된다.

 

안톤은 어떠한 결정이 가장 본인의 목적과 상충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블라디미르가 열쇠를 모아 세계를 떠나면, 이 세계는 끝이 난다.

 

‘나는 그걸 원하는가?’

 

거짓된 세계.

 

부여된 운명과 희생.

 

그저 세계를 이루는 작은 톱니바퀴 같은 삶.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이 세계의 꼭두각시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톤은 이제 확고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아니.’

 

가짜든 진짜든.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상관없다.

 

이 순간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겐, 지금이 현재이고 현실이다.

 

그러니까 자신 또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만약 나중에서야 블라디미르가 옳았단 걸 깨닫는다면, 정말 맞서 싸워야 하는 적이 세상이란 걸 알게 된다면, 그때 다시 판단하면 된다.

 

당시의 선택은 그때를 살아가는 충실한 자들로 인해 결정될 것이다.

 

결코 누구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선 안 된다.

 

그게 안톤이 내린 결론이었다.

 

카린, 클린턴, 레온 등등.

 

안톤은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무수한 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카린은 훗날 대상인이 될 것이고, 클린턴은 무예를 더 갈고닦아 명인의 칭호를 얻어 낼 것이다. 이제 막 검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레온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스스로에게 당당한 삶을 얻는 날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를 것이다.

 

이것은 분명 세계의 미래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미래였다.

 

‘고민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한 얘기였군.’

 

자신들의 사명만을 위해서.

 

모든 이들의 미래를 빼앗고자 하는 블라디미르.

 

그들은 명백한 적이었다.

 

 

* * *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해졌지만, 안톤은 차분한 마음으로 외출을 나간 카린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작별의 인사와 더불어 부탁할 사안도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핫산에겐 미안하게 됐군. 웬만해선 얼굴도 볼 겸 직접 빚을 갚으러 가려 했는데 말이지.’

 

은원에 엄격한 안톤에게 이는 중요한 사안이긴 했으나, 가장 급한 안건은 아니었다.

 

미루려면 미룰 수 있었다.

 

서로가 살아만 있다면, 분명 마주 보고 앉아 회포를 풀 미래는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

 

안톤은 카린이 오면 그녀에게 대신 돈을 전해 줄 것을 부탁한 후, 세로게트가 있는 에반하임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세로게트라면 뭘 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블라디미르를 막을 수 있을지 조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안톤은 카린을 기다리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려 돌아다녔다.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한 반응이었다. 안톤이 떠난다고 말하자 다들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가던트와 세트반, 그리고 아렛에게 작별 인사를 끝낸 안톤은 마지막으로 클린턴과 케이혼에게 향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꽤나 친해진 둘은 때마침 한곳에 있었다.

 

“흠. 하긴 나도 슬슬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던 참이었으니, 아쉽긴 해도 오히려 딱 좋은 시기일지도 모르겠어. 나중에 성국에 오거든 꼭 나를 찾아오게!”

 

“쩝. 자네가 이곳에 있는 덕에 아주 편히 쉴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군.”

 

“황궁으로 돌아간 테피로스나 카를로스에게는 클린턴, 당신이 대신 안부 좀 전해 주시오.”

 

“알겠네. 근데 아직 그녀도 오지 않았는데 그냥 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 미리 인사를 해 둔 건가?”

 

“그건 아니오.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생각보다 늦는군.”

 

안톤의 목소리에는 찜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게, 시내에서 간단한 업무만 보고 온다던 카린이 일러 준 시간을 훨씬 초과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클린턴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혼자서도 어디서든 살아남을 대찬 여인일세. 그리고 설마 도시 한복판에서 뭔 일이라도 벌어졌으려고? 만약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직접 마중을 나가면 될 것 아닌가.”

 

“걱정이 되는 건 아니지만, 당신 말대로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게 보다 빠르고 효율적일 것 같군. 이만 가 보리다.”

 

“마지막까지 솔직하지 못한 친구구먼. 그래, 잘 가게나. 언젠가 또 보지.”

 

작별 인사를 끝내고 미련 없이 레이왈츠가에서 나온 안톤은 카린이 업무를 보러 간다던 상인 길드로 향했다.

 

 

 

곧바로 직원에게 다가가 카린에 대해 묻자, 의심스러운 눈길로 안톤을 쓱 훑어보던 직원이 무언가를 깨닫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호, 혹시 검신님이십니까?”

 

뜬금없는 곳에서 강제로 수치를 당하게 된 안톤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보는 인물이 대뜸 쏟아 내는 존경의 눈빛은 그에겐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안톤이 침울함을 감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러니 그녀가 아직 여기 있는지 알려 주시겠소?”

 

명인이 된 후, 안톤의 이름은 이 도시에 쫙 퍼져 있었다.

 

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어차피 명예를 얻게 된 것, 자신이라도 유용하게 써 주겠다며 카린이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다닌 탓이다.

 

그냥 마스터도 아니고, 무려 명인이 뒤를 봐주는 상단이란 게 알려지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일이 한결 수월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안톤과 카린의 관계는 단순한 친분을 넘어 애틋한 사이라고 대중에 알려져 있었다.

 

“카린 님께서는 아까 전에 볼일을 마치고 가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두 시간가량 전의 일이군요.”

 

“……혹시 어디로 간다고 했는지 들은 게 있소?”

 

“잘은 모르겠지만, 본가로 돌아가신다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군. 알려 주어서 고맙소.”

 

“도움이 되셨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톤이 나가는 걸 맞아 주었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대우가 아닐 수 없었지만, 안톤은 그런 걸 신경 쓸 머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자기 피어난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휩쓴 것이다.

 

‘두 시간 전에 떠났다니……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어쩌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저 오는 길에 어딘가 들를 곳이 있었던 것일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한 생각이 가시질 않는 것일까.

 

“어머나. 무서운 얼굴이네. 혹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카린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였을까.

 

앞에 선 누군가가 그를 부르기 전까지, 안톤은 그 존재에 대해서 전혀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트락시아…….”

 

안톤이 앞에 선 은발의 여인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뿐만 아니라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조르디가에서 있었던 내전에서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현재 카트락시아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안톤의 눈에 섬뜩한 청광이 어렸다.

 

“카린은 어디 있지?”

 

“글쎄?”

 

카트락시아가 천연덕스럽게 웃는 순간.

 

안톤의 손이 번개처럼 쏘아진다.

 

“죽고 싶은 건가?”

 

어느새 안톤은 우악스러운 손으로 카트락시아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었다.

 

미처 반응조차 하지 못한 그녀의 입에서 뒤늦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흣!”

 

예전에는 안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처럼도 느껴졌던 카트락시아.

 

허나 이제는 그녀와 안톤 사이에는 메울 수 없을 만큼 큰 간극이 벌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카린은 어디 있지?”

 

안톤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졸도할 만큼 살벌한 기세.

 

허나 카트락시아는 이를 마주하면서도 뭐가 그리 우스운지 웃었다.

 

“크, 큭! 크흐흐.”

 

소리만 들어서는 숨이 막히는 건지, 아니면 웃는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지만, 안톤은 후자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굳이 길게 올라간 입꼬리가 아니더라도, 그녀가 쏘아 내는 눈빛의 의미는 너무나 정직했으니까.

 

‘젠장.’

 

안톤이 카트락시아의 목을 움켜쥐던 손을 풀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기침을 내뱉던 그녀가 입을 쓱 닫으며 일어났다.

 

“아무것도 못 할 거면서 귀찮게 쓸데없는 허세나 부리기는.”

 

표독스러운 눈빛을 쏘아 내는 카트락시아를 향해, 안톤이 한 걸음 다가갔다.

 

“원하는 게 뭐냐.”

 

뭐, 사실 이렇게 묻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다.

 

그들이 카린을 납치한 후, 자신을 찾아온 이유라고는 오직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나를 따라오면 자연히 알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정답은 하나이기에,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카트락시아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띤다. 그리고 고민하는 안톤을 즐거운 듯 지켜보았다.

 

안톤이 그런 그녀를 향해 비아냥의 말을 던졌다.

 

“하긴 너 같은 잔챙이가 혼자 왔을 린 없겠지.”

 

그야말로 눈에 훤히 보이는 함정이 아닐 수 없다.

 

분명 그녀를 따라간다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적들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굉장히 불리한 전투를 치러야만 하겠지.

 

허나 문제는 이것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함정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안톤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한 걸음을 내뻗었다.

 

“앞장서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피하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최선을 다해 맞서는 수밖에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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