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3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32화
132. 결전
슬슬 시작될 기미가 보이는 여름의 무더위.
연회가 있던 날로부터 대략 한 달가량이 지났다.
안톤은 여전히 카린의 본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상이란 무료할 만치 간단했다.
아침이 되면 그간 틈틈이 개량한 마나 연공법을 레온에게 전수했고, 남는 시간에는 지인들과 시간을 갖거나 이도 아니면 명상을 하며 보냈다.
생각보다 안톤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케이혼이나 클린턴은 아예 레이왈츠가의 식객처럼 눌러앉아 버렸고, 가던트나 유독 안톤을 따랐던 세트반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다.
‘하긴 그들에겐 무려 20년 만의 재회였을 테니까.’
안톤은 3주 전에 있었던, 그와의 독대가 문득 떠올랐다.
당시 가던트는 젊은 외모의 안톤을 보고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했었다.
허나 당시 쓰던 가명의 신분패와, 둘만 알고 있던 얘기들을 해 주니 금방 받아들였다.
‘알고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이후 대화를 나눠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던트는 외려 안톤이 다른 이들에게 나이를 속이고 있다고 착각했다.
허나 굳이 이를 정정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의 착각 덕에 알아서 입이 맞춰졌고, 카린에게 뭐라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니 오히려 잘됐다고나 할까.
아무튼 안톤을 찾는 이들은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고, 그중에는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인물도 껴 있었다.
“하아, 하아…….”
서서히 여름이 다가오는 시기.
햇빛이 쨍쨍하게 내려쬐는 후원 위에서 한 남자가 검을 휘두른다. 안톤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한 레온이었다.
고된 운동에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으나, 그는 결코 얼굴을 가린 철투구를 벗어 던지지 않았다.
“의지가 굉장하네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온의 수련을 지켜보던 안톤의 귀에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안톤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심심하면 찾아오는 것 같군.”
“카를로스 경께서 하도 함께 가자고 유난이어서요. 그렇다고 제가 억지로 따라왔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시죠?”
이 소년의 이름은 테피로스 혼트 파이오니아.
이름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황제의 많은 자식들 중 하나다.
안톤은 테피로스를 처음 봤을 때 두 눈을 의심했다.
이 천진무구한 소년이, 훗날 철혈 황제만큼이나 유명세를 날리는 전쟁영웅이 된다는 것이 도무지 연상되지 않던 탓이다.
‘그 소문의 7황자가 이렇게 순둥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지.’
고작 열여섯이란 나이에 오러 유저의 경지, 그것도 거의 완숙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신안을 통해 확인하지 못했다면 아마 믿기 어려웠을 사실이다.
“그나저나 축하드려요. 정식으로 브란테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셨다면서요?”
테피로스가 헤실헤실 웃으며 존경의 눈빛을 쏘아 낸다.
예전에 카를로스와 대련했던 것을 한 번 참관하고부터 안톤을 대할 땐 항상 이런 태도다.
안톤은 딴 곳을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원하던 일이 아니었으니, 축하받을 일도 아니겠지.”
일주일 전.
안톤은 한 단체로부터 어떠한 통보를 받았다.
바로 브란테의 전당에 정식으로 이름을 등재하겠다는 통보였다.
그곳에 이름을 올린다 함은, 즉 명인의 칭호를 얻으며 정식으로 대륙에 알려진다는 뜻과도 동일했다.
모든 무인들의 선망을 받는 자리임은 분명했으나, 안 그래도 카린의 가문에 틀어박혀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던 때에 받은 통보라 안톤은 꽤나 당황스러웠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지만, 아무래도 카를로스나 황태자가 뭔가 입김을 잔뜩 불어 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부끄러워하시긴…….”
정말 안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테피로스가 아주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이내 안톤과 눈을 마주치더니 뜨끔하며 놀란다.
뭔가 황제의 핏줄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탈한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 나왔다.
“즐거워 보이네요?”
“아, 카린 경! 오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카린을 보며 테피로스가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황자라고 보기엔 권위 따윈 일절 느껴지지 않는 소박한 인사였다.
카린이 화사하게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아 준 후, 안톤의 옆에 위치한 창틀에 팔을 기댔다.
“그나저나 레온은 정말 열심히 하네요.”
“노예로 살면서 배울 수 있는 건 그런 것 정도뿐이니까.”
불현듯 노예 검투사 양성소에서 지냈던 시절의 기억이 아스라이 지나간다.
그의 삶은 늘 치열하다 못해 참혹했지만, 그 시기만큼은 그에게도 유독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무리 비루한 노예로 살더라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치겠다는.
그러한 신념이 만들어진 것도 아마 그곳에서 지낸 경험의 영향이 상당했을 것이다.
검을 잡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떤 인간으로 성장했을까.
‘왠지 상상이 안 가는군.’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들, 어떤 형식으로든 검을 잡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재능이 없어 그저 상단을 따라다니는 호위 용병이나 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나저나 재커스는 잘 있소?”
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해진 안톤이 카린에게 질문을 날렸다.
전에 재커스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자 호기심이 생겼다며, 카린은 직접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눠 본 후 맘에 들었는지 영입했다.
뭐, 그렇다고 카린이 재커스를 특별 대우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지금쯤 한창 고생하고 있을걸요? 일부러 그런 곳으로 보냈으니까.”
왠지 모르게 서늘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보면서, 안톤은 재커스의 앞날이 걱정됐다.
그렇다고 카린의 방식에 이견을 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분명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생각이 있을 테니까.
“아, 그리고 당신이 부탁한 것은 무사히 조르디가에 도착했다네요.”
안톤이 화색을 띠었다.
칸타타에게 받은 엘릭서가 무사히 온-누르에게 전해진 것이다.
“고맙소.”
“내가 한 게 뭐 있다고요? 감사 인사는 나중에 아렛에게나 하세요.”
고맙다는 말이 그렇게까지 부끄러웠던 것인지, 카린이 시선을 피하며 툴툴거린다.
안톤이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살며시 웃었다.
“꼭 그러리다.”
* * *
황궁에 위치한 어느 작은 정원.
아이론과 테피로스가 다과를 즐기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주된 화제는 안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주로 아이론이 질문을 하면 테피로스가 안톤 옆에서 보고 느낀 그대로를 가감 없이 들려주는 형식의 대화.
“아무래도 연인인 것 같다고?”
아이론의 말에 테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적어도 서로를 끔찍이 아낀다는 건 분명해요. 옆에서 지켜보면 막 답답한 면이 없잖아 있을 정도로요.”
“드디어 약점을 찾았군.”
어째선지 상시 온화하던 아이론의 얼굴에 한기가 묻어 나온다.
석연찮음을 감추지 않으며 테피로스가 되물었다.
“약점이라니요?”
그는 말의 무거움을 안다.
그래서 아이론이 안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왔을 때도 한참을 망설였다.
허나 그 역시 안톤이 제국의 일원이 돼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에, 아이론을 돕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이론의 뒤바뀐 표정을 보는 순간, 혹여 그것이 실수였던 건 아닌가 하는 고민마저 들었다.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쏘라는 말이 있지. 아무래도 무뚝뚝한 그보단,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는 소리였다.”
아이론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고, 짐짓 굳어 있던 테피로스의 표정도 어느새 풀어졌다.
섣부른 기우였단 걸 알게 돼서일까.
테피로스는 평소보다 더 능글맞게 배시시 웃으며 감탄사를 뱉었다.
“아아, 그렇군요. 형님! 하긴, 세상 혼자 사는 듯한 느낌이었던 그분도 카린 경의 말이라면 일단은 듣고 보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카린 경은 굉장히 능력 있는 여성이니 친분을 다져 놔서 손해 볼 건 없겠죠.”
“하하. 이거 듬직한데? 정말로 너도 이제 다 크긴 큰 모양이구나. 이거 뭔가 서운할 정도야.”
안톤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된 후에도, 아이론과 테피로스는 한참이나 화기애애하게 우애를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정반대의 형식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테피로스가 연신 재잘거리며 옛이야기들을 꺼냈고, 아이론은 이를 받아 주며 호응해 주는 형식이었다.
“하하! 제가 말이 많은 탓에 바쁘신 형님의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네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려무나.”
헤어지기 전, 둘은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가?
그들의 눈빛은 영락없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형제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서로가 등을 돌린 순간 돌변했다.
‘도대체 왜 형님은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거대한 의문이 잔잔한 호수 속에 던져졌기 때문일까.
순둥이 같던 테피로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런 그와는 다르게, 아이론의 눈에는 열띤 희열만이 가득 치밀어 오른다.
‘계획했던 일이 훨씬 더 쉽게 되겠어.’
내내 억제되고 있던 그의 입꼬리가 그제야 미미하게 경련했다.
* * *
아득히 먼 옛날.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카프란 블라디미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궁금증 하나를 달고 살았다. 만약 누군가 알게 된다면, 그는 당장에 사회에서 이단아로 낙인이 찍혀 버릴 테니 그 어느 누구한테도 풀어놓을 수 없는 궁금증이었다.
‘도대체 이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세계에 의심을 갖는 것은, 신을 의심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기에 그는 늘 불안했다.
허나 그런 불안함과는 다르게, 처음에는 그저 막연할 뿐이던 호기심은 점점 크기를 키워 갔고, 그는 더 이상 그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차근차근 남들의 눈을 피해 진리에 다가갔다.
고서들을 뒤져 가며 역사를 공부했고, 폐허가 된 유적들을 파헤쳤다.
알아 갈수록 이치에 맞게 설명되지 않는 모순들이 많았다.
카프란은 그 모순을 증명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고, 우연히도 근원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저질러선 안 될 짓을 저질러 버렸어.’
카프란이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된 그날.
마치 그의 오만을 벌하기라도 하듯이, 하늘에서는 아홉 개의 운석이 떨어져 내렸다.
극강한 성세를 누리던 진혈종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대격변의 시대가 펼쳐졌다.
운석이 떨어진 날 새롭게 탄생한 인간이란 종과 더불어, 진혈종이 몰락하자 곧장 야욕을 드러낸 여타 종족들까지.
어느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끔찍한 혼세였다.
진혈종에게는 그러한 혼세를 버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 개체 수가 극히 감소한 것도 감소한 것이지만, 갑작스러운 신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무녀들이 매일같이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렸지만, 암흑신 베놀라는 예전처럼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절망한 광신도들은 울부짖으며 자신의 배를 갈랐고, 만인의 존경을 받던 장로는 아예 미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의 피를 마시며 제물을 바쳐 댔다.
그렇게 진혈종은 철저하게 몰락을 향해 갔고, 카프란은 몇몇 뜻있는 자들을 모아 함께 근원의 끝자락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명만을 위해서 아주 오랜 시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지.”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세계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된 순간, 자만하고 있었다.
만약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이 거짓된 세계가 지닌 끈질긴 생명력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섣부르게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긴 알았다고 해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겠지. 영웅이란,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세계가 만든 병기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야.”
허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일까.
그들은 목숨과 영혼을 바쳐, 세계를 대적할 비밀 병기를 만들어 냈다.
툭.
선조들의 이야기가 담긴 역사서를 덮은 아르토르가 웃음을 내지었다.
영혼을 바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과감한 결단을 내리다니.
정말 다시 생각해도 무지막지한 선조들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솔직히 이해는 안 가지만 나름 존경은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이번 대에는 잘될 겁니다. 물론 카프란 당신이 원했던 시나리오는 아닐 것 같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토르는 외투를 걸쳐 입음으로써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만반의 준비를 하더라도, 오늘 운이 나쁘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는 전날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지켜봐 달란 말은 하지 않지요. 어차피 당신은 그 어디에도 존재치 않지 않습니까.”
철컥.
아르토르가 서재를 나서자, 앞에서 대기하던 살리첸이 고개를 숙이며 반겨 주었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드디어 밝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전의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