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31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31화
131. 회포
조금 얼떨떨하다고 하면 알맞은 표현이 될까.
카린을 만나기 위해 온 이곳에서, 안톤은 여러 인물들과 한자리에서 대면하게 되었다.
원래 제국의 인물이었던 클린턴이나 카를로스, 그리고 황태자까진 그러려니 하겠지만…… 얼마 전에 헤어졌던 케이혼과 이곳에서 재회하게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한 바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는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애런을 보며, 안톤은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허나 그가 안톤을 대하는 반응은 천양지차로 변해 있었다.
“죄송합니다!”
처음 한 마디 외에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도 대뜸 바닥에 엎드리며 극구 사죄하기 시작한 애런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뭔가 우습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참으로 비겁하군.”
안톤도 그가 태도를 바꾼 이유 정도는 안다.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자신이, 그가 아득히 올려다봐야 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하니 덜컥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 증거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애런은 드문드문 고개를 들어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쿵쿵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자해를 시작한 애런이었지만, 안톤의 시선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보는 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옆에서 그를 마치 벌레라도 바라보듯 한번 흘깃한 아이론이 그대로 애런을 지나쳐 누군가의 앞에 섰다.
“아로네프 후작은 이자와 어떤 사이인가?”
“저는 이자와 어떤 연도 없사옵니다! 그저 몇 분 전에 만나 한두 마디 정도 대화를 나눴을 뿐입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즐겁게 애런과 대화를 나누던 후작이 정색한 채 황급히 항변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애런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지만, 엄한 불똥이라도 튈까 봐 아주 필사적이었다.
그런 진심이 와 닿은 것일까.
아이론이 턱을 짚고 고개를 갸웃했다.
“후작의 말을 믿겠네. 근데 그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자가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지는군. 이보게, 아르탄 경, 자네가 한 번 알아봐 주겠나?”
“예.”
황태자 뒤에 기립해 있던 기사 중 하나가 명을 받자마자 이를 수행하기 위해 어디론가 향했고, 금세 어떤 명단을 들고 돌아왔다.
“근위병이 확인한 일지를 보아서는 로브리언 백작의 혈족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그의 슬하에 아들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게다가 성도 다르지 않은가.”
“조카라더군요.”
“왠지 내 감은 그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드는데? 뭐, 그거야 직접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지.”
그 한 마디에 기사가 또다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고, 머지않아 로브리언 백작은 그들 앞에 서게 됐다.
구석에서 한가하게 차나 홀짝거리다 끌려온 그는, 눈알을 한 번 크게 굴리는 것으로 대강 사태 파악을 마쳤다.
‘기어코 뭔가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그것도 황태자가 끼어 있는 대형 사고를 말이다.
순긴 픽 하고 현기증이 몰려왔으나, 로브리언 백작은 간신히 서서 버텼다.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그런 한심한 꼴을 보일 순 없었다.
“백작. 아마 10년쯤 전에 황궁에서 한 번 봤었지?”
“감읍하게도 16년 전, 7황자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우연히 인사드렸던 적이 있사옵니다, 저하.”
“그래, 그랬던 것 같군. 아무튼 꽤나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것으로 기억하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니 나도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아.”
“송구하오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겠사옵니까?”
“여기 이자가, 우리 제국의 귀빈께 아주 엄청난 무례를 저질렀다네. 그래서 묻노니, 백작은 이자와는 어떤 관계인가? 정말로 조카인 겐가?”
“진짜 피를 이은 사이는 아니고, 사별한 친구의 자식이옵니다.”
벌벌 떨면서 말하는 로브리언 백작을 보며 아이론이 혀를 쯧쯧 찼다.
“그거 안됐군. 친구를 잘못 둔 탓에 여기서 죽게 생겼으니 말이야.”
한 줌의 자비조차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어조.
그 압박감을 도무지 버티지 못한 로브리언 백작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아아…….”
불과 수 초가 지났을 뿐인데, 그의 얼굴은 마치 수년은 더 지난 듯 늙어 있었다. 보다 못한 안톤이 나섰다.
“그만하시오. 저자에겐 죄가 없으니.”
그의 등장에 모두가 경악의 눈빛을 내지었다.
안톤이 누군지 알아서, 그래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황태자가 누군가를 벌하는 이 상황에서, 만용을 부리며 끼어드는 누군가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심지어 말투도 마치 비슷한 신분에서나 할 수 있을 법한 편한 말투였다.
그러나 이후, 군중들을 더 경악스럽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하던 아이론의 눈빛이 안톤을 보자마자 싹 바뀐 것이다.
“이거 자비로운 친구였군? 뭐,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어쩔 수 없지. 로브리언 백작은 어서 고맙다 하지 않고 뭐하나? 설마 나를 귀빈 앞에서 무안 주려고 작정한 겐가?”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이자는 어떻게 할 텐가? 설마 마찬가지로 그냥 용서해 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로브리언 백작의 사과를 들은 체 만 체하던 안톤이 아이론과 눈을 마주쳤다.
안톤 역시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이런 식으로 나서는 것임을 알았다.
“제국의 법률상, 도적을 만나 일행을 두고 도망친 것이 죽을 정도로 큰 죄요?”
안톤이 무덤덤하게 묻자 아이론이 어깨를 으쓱했고, 클린턴이 나서서 대신 대답했다.
“그렇진 않네. 허나 도의적인 책임은 있지 않겠는가.”
클린턴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안톤의 입에선 피식 웃음이 새 나왔다.
도의적인 책임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진짜 무책임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가진 자들만을 위한 이중 잣대 같다고나 할까.
힘이 있어야지만 물을 수 있는 책임에, ‘도의적인’이란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안톤이 애런에게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속내를 터놓고 얘기하자면, 나는 이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소. 그저 버려져서 고생한 인부들이나 용병들에겐 마땅한 보상을 치러 줬으면 하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애런이 감격하며 바닥에 몸을 붙인 채로 고개를 쉬지 않고 끄덕였지만, 이를 보는 안톤의 시선은 싸늘했다.
그리고 어째선지, 아이론이 정말로 그를 이렇게 내버려 둘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다면 자업자득이겠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냉큼 물러가란 아이론의 말에 백작과 애런이 후다닥 도망치듯 연회장을 벗어나는 것으로 한바탕의 소란은 끝맺음이 지어졌다.
안톤은 케이혼에게 다가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당신은 어떻게 저자를 알고 있던 것이오?”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던 중에 마주쳤네. 근데 아까 자네의 얘기들을 듣다 보니 딱 저자 같더군.”
“대단한 우연이오.”
“운명인 게지.”
케이혼이 너털웃음을 내지으며 고개를 단호히 젓는다.
누가 아넨교 출신 아니랄까 봐, 뭐만 하면 신이 정한 운명이고 인연이란다.
어쩌다 이런 자와 친구가 되었을까 한숨이 나온 안톤이었으나, 그의 입꼬리는 즐거운 듯 올라가 있었다.
* * *
산해진미들과 귀한 술, 그리고 괜찮은 사람들까지 함께했던 연회는 해가 저물면서 끝이 났다.
원래는 다음 날 아침까지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황제가 지병이 악화되어 병상에 들었다는 소식이 그 무렵에 공표된 탓이었다.
전생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싶었지만, 뭐 대충 그런가 보다 했다.
어차피 원래의 역사에서도 앞으로 1년 뒤면 그가 죽으며 새로운 황제가 탄생하니 말이다.
아무튼 연회가 끝나고 안톤은 카린과 함께 황궁을 나선 후 그녀의 본가로 향했다.
블루머챈트의 중심인 레이왈츠가는 그리딘과 지척에 위치한 도시에 있었다.
암만 가깝다고 한들, 그래도 대략 하루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안톤에게는 무의미한 계산이었다.
가볍게 한두 시간쯤 뛰니 목표 지점에 도달했다.
레이왈츠가는 과거 세계에서 가 봤던 그 자리에 여전히 위치해 있었다.
물론 기억 속의 모습과는 살짝 달랐다. 일단 좀 더 외곽부가 으리으리하게 꾸며져 있었고, 규모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커져 있달까.
이걸 보자니 안톤은 왠지 모르게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군.’
안톤은 처음 오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둘러보며 카린을 따라갔다.
그러니 머지않아 그녀 하나만이 사용하는 커다란 전각이 나타났다. 이를 본 안톤은 카린이 가문에서 거의 작은주인 대접을 받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여기 1층은 그냥 당신이 다 쓰세요. 어차피 다 빈방뿐이라서요.”
“이런 걸 두고 금의환향이라고 하나? 당신도 성공했군.”
“어머, 지금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거예요?”
안톤의 중얼거림에 카린이 새침하게 반응한다.
어째선지 꽤나 그리웠던 느낌이라 자꾸만 실없는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조금 늦긴 했어도, 이야기 좀 할까요?”
“좋지.”
조금 이른 밤중이긴 했으나, 카린이 관리인에게 한 마디를 하는 것만으로 간소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한 상이 차려졌다.
“역시 당신은 술보다는 차죠?”
그렇게 말하면서 카린이 대답도 듣지 않고 차를 따라 준다.
먼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사소한 배려들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이 김이 피어나는 찻물보다도 따스한 것일지도 몰랐다.
안톤이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물었다.
“그나저나 당신 아버지는 어디 있소?”
“일정이 있어서 일주일가량은 본가에 안 오세요. 그러니 마음 편하게 있어요.”
“그렇소? 아쉽게 됐군.”
20년이 지난 후의 가던트가 상당히 궁금했던 안톤이 입맛을 다신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린이 뜬금없이 얼굴을 붉히고 수줍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아쉽다니요? ……당신 설마?”
갑자기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의아했다가 이내 그는 픽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카린도 이렇게 간혹 가다가 참 엉뚱한 면을 보인단 말이지…….’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카린이 지닌 많은 매력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안톤은 생각했다.
“그냥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말이오.”
정확히 말해서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한 것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카린은 그저 그렇구나 하는 기색이었다.
조금은 무안했는지 카린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아무튼 아까 정말 크게 놀랐어요. 차라리 오면 온다고 말이나 해 주지…….”
“나도 당신이 그자들과 있을 줄은 몰라서 당황했었소.”
핀잔 어린 투정에 안톤이 웃으며 대답하자, 카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거든요? 언제 이런 사람들과 안면을 터 뒀던 건지……. 그나저나 가만 보면 매번 상당한 사람들만 골라서 사귀는 거 같다니까요, 당신은?”
“딱히 그럴 생각은 없는데, 그렇게 되더군.”
재커스나 그들 밑에 있던 인부들이 안톤을 어려워했던 것처럼, 어쩌면 어느 정도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야 서로가 편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황태자가 당신을 엄청나게 맘에 들어 하던데, 앞으로는 어쩔 거예요?”
안톤은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카린의 말대로, 아이론은 숨기지 않고 안톤에게 관심을 표출했다.
애런과의 사건 외에도 끊임없이 호의와 친절을 베풀었고, 안톤이 살아온 이야기를 매우 궁금해했다.
“싫지는 않지만…… 그다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소.”
안톤이 솔직한 감상을 내려놓았다.
어쩌면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선입견 때문일지도 몰랐다.
철혈 황제.
아이론 리디스 파이오니아.
굳이 따지자면 그는 대륙 전역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대전쟁의 시초가 된 셈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1년 뒤 역병이 돌기 시작하고, 창설된 반란군이 제압된 후 아이론은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아인종 탄압정책을 벌이며 전쟁의 서막을 알린다.
‘딱 생각하던 그대로의 인물이었지.’
유약한 외모와 달리 성격은 매정하고 대범하기 짝이 없으며, 실력 있는 인재와 자기 사람들에게는 후하기 그지없다.
또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으며, 반드시 이뤄 내려는 의지마저 갖고 있다.
‘하긴 그러니까 그 혼란 속에서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웠겠지.’
안톤은 아인종에 관련해 아이론에게 의견을 구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속내를 떠보기 위한 질문에, 아이론은 아인종들에게는 어떠한 유감도 증오도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저 그는 제국이 결집하기 위해 적의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하다 판단했고, 철저한 계산으로 그들이 지정되었을 뿐이다.
“역시 당신답네요. 그래도 뭔가 아쉽네요. 차기 황제가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는 건 정말 드물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린은 뭐가 웃긴지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웃으시오?”
“그냥 황태자를 보고 그런 소릴 할 사람은 아마 당신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럴 수도 있겠군.”
하기야, 황태자인 아이론은 모두에게 친해지고 싶어도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지, 그 반대인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카린이 탁자에 팔을 기대며 턱을 짚은 채 안톤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흠. 왠지 내 감으로는 그가 그리 쉽게 놓아줄 거 같지가 않은데. 뭐, 잘해 봐요. 난 솔직히 당신이 제국에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오?”
“하나하나 다 묻기만 하지 말고, 그런 건 한 번 스스로 생각해 보시죠?”
싱그럽게 미소 지을 뿐, 카린은 안톤에게 정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