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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3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30화

130. 응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잔잔한 음악.

 

달달하진 않고 독하기만 한 술.

 

고급스러운 식재료를 쓰긴 했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까지.

 

도대체 어느 한구석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허나 애런은 이 자리에 오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숙부에게 헤실헤실 웃으며 간청을 해야만 했다.

 

무릇 연회란, 술과 음식보다 그곳에 있는 사람이 중요한 법 아니겠는가.

 

연회장 내부를 쓱 둘러보던 애런이 눈을 빛냈다.

 

황궁에서 펼쳐진 황태자의 탄생일 기념 연회.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평범한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발에 차일 듯 많은 사람들 중 하나하나가 모두 내로라하는 제국의 실력자들이다.

 

“내 이름을 빌려 이곳에 온 것이니, 절대 사고는 치면 안 된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숙부, 너무 걱정 마세요. 오늘 반드시 엄청난 거물을 물어 오고야 말 테니까.”

 

“그게 걱정이 된다고 하는 거다, 이 녀석아. 에휴.”

 

로브리언 백작이 한숨을 내쉬며 애런의 머리에 살짝 꿀밤을 놓았다.

 

애런은 이제 죽고 없는 오랜 친구의 자식이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그를 어여삐 봐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친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로브리언 백작은 애런이 간곡한 부탁을 청했을 때 미처 거절을 하지 못하고 이런 중요한 자리에까지 데려와 버렸다.

 

‘누가 장사꾼 녀석의 자식 아니랄까 봐.’

 

야망에 찬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지만, 너무 열의에만 찬 것은 아닐까 싶어 조금은 염려스럽다.

 

그러나 그의 낯빛에 차오른 걱정의 기색은, 애런이 배시시 웃는 것을 보며 눈 녹듯이 사라졌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참으로 귀여운 조카였다.

 

부부 사이에서 딸만 낳고 아들을 보지 못해서일까. 그에게 아들이 있었으면 이런 느낌이었으리라.

 

“그럼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애런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로브리언 백작은 이를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실, 애런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반듯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서로의 인연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이내 로브리언 백작으로부터 등을 돌린 애런은 금방 얼굴색을 바꾸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중이었다.

 

‘망할 늙은이, 으스대기는……. 그리고 아프잖아. 젠장.’

 

아까 꿀밤을 맞은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던 애런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나저나 제국 놈들도 어지간히 점잖은 척하는 늙은이들뿐인가 보군. 이게 뭐야. 쯧쯧.’

 

헐벗은 여자가 술을 따라 주지도, 신나는 음악 속에서 춤을 추지도 않는다.

 

그저 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모여 화담을 나눈다.

 

‘뭐, 저놈들 역시 놀러 온 건 아니라 이거겠지.’

 

그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고, 애런도 슬슬 사냥감을 노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훑으며 적당한 인물들을 탐색했다.

 

그리고 그러느라 정신이 팔려서였을까.

 

“앗!”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쳤단 걸 인지한 순간, 마치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세차게 경종이 울렸다.

 

명망 높은 귀족들의 악랄함과 포악함을 애런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무심코 던진 조약돌로 개구리를 죽였듯이, 자신 역시 누군가 던진 돌팔매질에 악 하고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반사적으로 실수에 대한 사죄의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오히려 상대측으로부터 사과의 말이 돌아왔다.

 

“미안합니다. 제가 앞을 못 봤군요.”

 

고래고래 지르는 역성이 아니란 걸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안심하는 것도 잠시. 이윽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애런은 잘됐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내지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만큼 한 인물 하는 자인 건 틀림없겠지. 친해지면 무조건 이득이다.’

 

애런이 얼굴색을 싹 바꾸고 호탕한 미소를 지었다.

 

“아뇨. 이 또한 신이 점지한 인연 아니겠습니까.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지요.”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아넨교의 신자로 보이는 상대방에게 가장 호감을 얻을 수 있을 법한 말을 골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재치는 아무래도 잘 통한 듯 보였다.

 

“아아!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는군요. 고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 기회에 통성명이나 하겠습니까?”

 

크게 감격한 듯한 모습을 보며, 애런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애런 파레룬. 편하게 애런이라 불러 주시지요.”

 

“하하! 애런……. 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저는 케이혼 아델로만이라는 사람입니다. 케이혼이라 불러 주시지요.”

 

“그러겠습니다. 근데 케이혼 님은 어떤 분이시죠?”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바로 시작된 호구조사.

 

그런데 케이혼이 목소리를 낮추며 진중하게 입을 연다.

 

“이건 비밀이니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시면 안 된답니다?”

 

애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예상외로 시작부터 대박을 건진 것일지도 모른단 예감이 들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후! 저는 사실 성자랍니다.”

 

뭔가 큰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듯, 진 빠진 얼굴을 하는 케이혼을 보며 애런의 표정이 못 봐 줄 정도로 구겨졌다.

 

“성자요……?”

 

엔티아네아에서 지냈던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단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애런은 다시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제가 식견이 짧은 탓에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군요. 성자가 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케이혼은 최선을 다해 성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애런에게 설명해 주었고, 진지하게 이를 듣던 애런은 금세 썩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거 영 미친놈이었군.’

 

초장부터 일진이 사납다는 듯, 애런은 대충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고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다른 인물들을 찾아가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말을 더 붙이려고 노력했다.

 

애런의 신분을 듣고는 확고하게 선을 긋는 재수 없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애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아부를 떨어 댔다.

 

“상인이라……. 참으로 보람찬 일을 하는군?”

 

“고귀하신 분들께선 대부분 상인을 천대하기 마련인데, 후작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시는군요. 정말로 감격스럽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하니 낯이 다 뜨거워지는군. 나는 그저 이번 사태를 통해 상인들이 가진 힘을 여실히 깨달았을 뿐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워낙에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란 걸 알지만, 기회만 주신다면 후작님의 얘기를 상세히 들어 보고 싶습니다!”

 

후작이 기분 좋은 듯 웃음 짓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 끝에는 홀로 고고하게 앉아 있는 푸른 머리의 여인이 있었다.

 

“우리 제국의 은인이라 불리는 분이라네. 저분 또한 자네와 같은 상인이지. 모르긴 몰라도 저분이 아니었으면 상인에 대한 인식은 더욱 나빠졌을 걸세. 그럼 자네와 내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일도 없겠지.”

 

“아, 그렇군요! 정말로 고마운 분이십니다. 저 여성분에 대한 자세한 얘기도 꼭 들어 보고 싶습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지만, 애런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그와의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후작은 즐겁다는 듯 그녀와 얽힌 이런저런 얘기를 해 주었다.

 

“대가뭄으로 인해 제국이 혼란을 맞이하고 있을 때, 사막을 횡단해 곡식을 갖고 온 상인이 있었네.”

 

“그게 바로 저분이었군요!”

 

애런의 추임새에 후작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그 상인으로 인해 천정부지로 오르던 곡식의 시세가 안정화됐네. 누가 굶어 죽든 말든 일단은 손에 들고 곡식 값이 더 뛰길 기다리던 이국의 상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한 덕이지.”

 

이후로도 후작은 한참이나 카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놨고, 애런은 그 얘기를 들으며 이 대화가 끝나면 저 여인에게도 접근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직종이 같은 상인이니 서로 얘기도 잘 통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생긴 것도 꽤나 괜찮고 말이야. 흐흐.’

 

후작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은연중에 계속 카린을 훑어보던 애런의 눈매가 좁혀졌다. 한 사내가 그녀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저놈은 아까 그놈이잖아?’

 

케이혼 아델로만.

 

아까 그와 어깨를 부딪쳤던 그 사내가 카린의 옆자리에 대뜸 앉자, 그녀가 곤란한 기색을 얼굴에 비친다.

 

그걸 본 애런은 이때다 싶었다.

 

‘지금 가서 멋들어지게 구해 준다면, 쉽게 친해질 수 있겠는데?’

 

그리고 후작과의 대화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애런이 막 고민하던 때.

 

연회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황태자 저하를 뵙나이다.”

 

순식간에 모든 이목을 주목시킨 황태자는 귀족들의 인사를 본체만체하며 어디론가 향하더니, 케이혼과 카린의 앞에서 멈추었다.

 

후작은 그제야 카린의 곁에 있는 케이혼을 발견하고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저자가 바로 성국 사절을 이끌던 그 젊은 성직자로군!”

 

그 소릴 듣고 애런이 입맛을 다셨다.

 

미친놈 취급했던 남자가 알고 보니 대박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쉽게 됐단 생각보다는 안도의 마음이 먼저 든다.

 

섣불리 다가가 무례를 저지르던 찰나에 황태자가 등장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엄청난 비극이었을 테니까.

 

아무튼 거물들의 등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태자를 보필하던 기사들 중 하나가 투구를 벗어 던지자, 후작은 또다시 감탄사를 토해 냈다.

 

“오오. 저자는 최연소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클린턴 제오르 군! 이거 아무래도 다들 저 자리에 끼고 싶어 침 좀 마르겠는데?”

 

장내의 어느 무리들보다 빛나는 호화로운 구성.

 

그러나 화룡점정은 따로 있었다.

 

“오오! 푸른 귀신이다!”

 

제국의 단둘뿐인 명인. 황궁의 수호신이라고도 불리는 카를로스가 등장한 것이다.

 

이내 자연스럽게 무리가 지어진 그들은 그들끼리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실력자들처럼 애런 역시 이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거리가 상당한 탓에 내용은 들을 수 없었다.

 

뭐, 사실 그가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어 봤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언감생심이라고나 할까.

 

그들과 애런 사이에는 몇 번을 태어나도 좁혀지지 않을 만큼의 간극이 있었다.

 

아무튼 그러던 때였다.

 

황태자가 어떤 곳을 향해 손짓했고, 자연히 군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따라 움직였다.

 

애런 역시 그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이내 그는 보았다.

 

그곳에 존재하는 붉은 머리의 사내를.

 

“저, 저 녀석은!”

 

너무 화들짝 놀란 탓에 그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왔고, 후작이 궁금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질문을 해 왔다.

 

“아는 자인가?”

 

“아, 아닙니다. 그저 닮은 사람이군요.”

 

그렇게 둘러대며 애런은 안톤의 반대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후작에게 건실하고 바람직한 상인을 연기해 둔 지금.

 

만약 안톤과 눈을 마주쳐 그가 이 자리로 와 난리를 피운다면 모든 게 까발려지고 말 터였다.

 

그러나 그런 걱정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안톤!”

 

황태자를 제외한 사인방이 모두 반갑다는 듯이 안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애런은 슬그머니 각도를 틀어 다시 안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태자가 낀 무리로 걸어가더니, 이내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게다가 태도를 보아하니 황태자를 제외하면 모두와 안면이 있는 듯했고, 또 상당히 친해 보였다.

 

‘어떻게 저런 비루한 잡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애런은 자신이 안톤에게 한 짓을 기억하고 있었다.

 

‘걸리면 안 돼…….’

 

만약 그랬다간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한 이곳이 순식간에 삶의 종착지가 되어 버릴 거다.

 

아무도 모르게 바람처럼 이 자리를 떠야겠다고 판단한 애런이 황급히 후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유익하고도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나서고 빠질 때를 구분해야 하는 법. 더 귀찮게 하지 않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허허. 즐거웠네. 잘 가게.”

 

그렇게 연회에서 벗어나려고 발을 옮기려던 찰나.

 

케이혼이 갸우뚱하며 뭔가를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난 듯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고, 애런은 딱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안 돼!’

 

애런은 질끈 눈을 감았고, 그런 그의 귀로 케이혼의 열띤 외침이 들려왔다.

 

“바로 저자였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주변의 모두가 의뭉 어린 시선을 쏘아 내는 중이었다.

 

그 속에는 물론 후작의 시선도 있었으며, 안톤의 시선 또한 있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는군.”

 

안톤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애런의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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