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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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8화
128. 초대
황실의 누군가에게 근래 가장 바쁜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여러 이름들이 나오겠지만, 분명 이 이름은 그 목록에 껴 있을 것이다.
카를로스 피온 그라테인.
그는 최근 아주 분주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제국 각지에서 창궐한 도적 무리들 때문이었다.
제국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그들을 제국은 용인할 생각이 없었고, 그가 속한 황실기사단은 황제로부터 도적 소탕의 임무를 명받았다.
사실 도적들이라 해 봤자 결국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농기구 대신 칼을 쥔 자들이 대부분.
단순히 능력 면에서만 본다면 결코 그 같은 거물까지 나설 일은 아니었다.
허나 이 임무는 황제의 엄명에 의해 그의 손으로 넘어왔다.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카를로스의 성정 자체가 불의를 증오하여 이런 일에 제격이었고, 그 정도는 되어야 주변의 영주들에게 황실의 위엄을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행보를 대대적으로 밝힌다면 도적 떼의 창궐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도 있을 거란 부가적인 기대도 있었다.
뭐, 비록 마지막 항목은 생각보다 효과는 없는 듯했지만 아무튼.
제국 최강의 무인 중 하나가 도적이 나타나는 족족 찾아가 응징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들판의 잡초처럼 도적 무리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카를로스는 새삼 지금 제국이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단 걸 깨닫고 자신의 임무에 집중했다.
그리고 하루 전.
대략 400명 규모의 도적 무리들이 일을 벌여 댄다는 정보를 얻은 그는 평소처럼 그들을 처치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헌데 이게 웬걸.
그들의 은신처를 뒤져 보니 400명은커녕 스물도 채 안 되는 도적 잔당만이 남아 있는 것 아닌가.
이를 이상하다 여긴 카를로스는 잔당들을 사로잡은 뒤 일의 경위를 캐물었다.
그리고 그 결과, 도적 무리들이 현재 약탈을 위해 원정을 떠났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 카를로스는 황급히 잔당을 통해 알게 된 습격 예정지로 향했다.
그의 예상대로 이미 일은 다 벌어진 후였다. 허허벌판인 초원 위에는 시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허나 그 광경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것도 잠시.
카를로스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300구가량의 시체들이 모두 하나같이 상체와 하체가 이등분이 되어 있었다.
유심히 현장을 살피던 카를로스는 금방 무언가를 깨달았다.
일단 이 시체들은 상인들이 아니라, 모두 도적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단 한 사람에 의해 도륙됐다.
‘한 번, 아니 두 번인가…….’
그것도 겨우 두 번의 검격에 의해서 말이다.
물론 카를로스 역시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신위를 펼칠 능력이 된다.
허나, 그 또한 그러기 위해선 전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게다가 이 잘린 단면, 오러라 보기엔 뭔가 이상하다. 이 정도 위력을 펼치는데 이렇게 예리하게 베다니 말이야.’
순간 카를로스는 그 인물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이 치솟았다.
과연 그 어떤 검사가 이런 일을 벌였을지, 전혀 예상 가는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견고하게 잘 지어진 성이라도 작은 주춧돌 하나가 문제 되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카를로스 피온 그라테인은 잘 알고 있었다.
혹여 이 인물이 제국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파악은 해 두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카를로스는 마차의 바퀴 자국을 따라 추격했다.
해가 저물어 밤이 찾아오고, 다시 해가 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찾던 이들의 앞에 도달했다.
총인원 마흔 명가량의 소규모 상단.
마차에는 짐들이 가득 실려 있었지만, 겨우 열 대도 채 되지 않는다.
고작해야 호위 용병들 몇몇뿐이고, 그마저도 그가 평가하기엔 뜨내기 취급조차 과분한 실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래서였을까.
일단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카를로스였지만, 그의 얼굴은 뭔가 석연찮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의 경지쯤 되면 보는 것만으로도 견적이 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저들 중에 그럴 만한 인물은 없었다.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던 건가?’
혹시 우연히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들을 도왔을 수도 있다.
나름 신빙성 있는 추측이다.
우연이라는 단어는 그만큼 드물게 벌어진다는 뜻을 갖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일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함께 의미하기도 하니까.
오늘의 우연한 만남이, 훗날 역사서에 운명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기록될 것이라고 지금의 그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재커스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쩌면 도적 무리들에게 포위당했을 때보다도 심하게 떠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가로막고 나선 자가 바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황실기사단의 단장 카를로스 피온 그라테인 공작이었으니까.
재커스는 멀쩡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제국의 단둘뿐인 명인 중 하나를 이렇게 직면하게 되다니, 정말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저 새치가 희끗한 푸른 머리와, 살벌한 크기의 창까지.
푸른 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의 익히 알려진 모습 그대로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저기 저 사내 주변의 기사들이 입은 갑주에 황실기사단의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풍기는 기세와 품격을 보아 이자들은 결코 사칭 같은 걸 할 자들로 보이진 않는다.
‘지, 진짜 푸른 귀신이다…….’
재커스가 잔뜩 겁에 질려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자, 카를로스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그저 주변의 마나들을 건드리면 되는 일이니,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에겐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자네들을 나쁜 이유로 찾아온 것은 아니니까. 그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숨기는 것 없이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무, 물론입니다! 공작님!”
잔뜩 얼어 소리치는 재커스를 보며 카를로스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고맙군.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네. 자네들은 얼마 전에 도적들에게 습격당하지 않았는가?”
“그, 그랬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아, 자네들이 당했어야 했다는 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질 않아서 말일세.”
재커스가 우물쭈물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들의 호위로 있는 자가 행한 일입니다.”
카를로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내 눈썹을 찌푸렸다.
겨우 짧은 표정 변화였을 뿐이지만, 재커스는 그 모습에 한순간 지옥을 다녀올 정도였다.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을 텐데. 내 말을 허투루 들었나 보군.”
“지, 진짜입니다!”
“자네를 겁박하고 싶지는 않네. 혹여 그자에게 입막음을 당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마음 놓게. 내가 자네들을 지켜 줄 테니까.”
조여졌던 공기가 다시 유해진다.
이를 지켜보던 안톤이 내심 감탄했다.
카를로스는 공기 중에 있는 마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사람의 심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천적을 만난 개구리처럼 몸이 굳어 있는 재커스가 마냥 안쓰럽게 보여서 안톤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그랬소.”
그리고 그런 안톤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퍼붓던 카를로스가 살짝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무지막지한 대검을 들고 다니는 붉은 머리의 젊은 사내가 대륙에 있다고.
‘제오르가의 그 꼬맹이가 그렇게 신이 나서 떠들 땐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무지막지한 검이로군.’
검신이라고 했던가.
분명 조르디가에서 그런 무호를 받았다고 했었다.
기억을 조금 더 되짚으니, 외적 사항 외에도 생각이 나는 것이 또 있다.
‘마나를 쓰지 않는 검이라 했지.’
인상착의는 대충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검술과 관련된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의 체내에서 마나가 감지되지 않는 것도 설명된다.
그러나 섣불리 단정 짓기엔 아직 이르다.
일단 먼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자네 이름이 뭔지 알 수 있겠나?”
카를로스의 질문에 안톤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안톤. 성은 없소이다.”
늘 누군가에게 하던 대로의 자기소개.
그것을 들은 카를로스가 굳은 표정을 풀고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자네가 검신이었군.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네.”
“거, 검신이라니요?”
“조르디가에서 불리는 저자의 별명이라네.”
질문을 했던 재커스가 실로 떨떠름하다는 눈으로 안톤을 바라봤고, 안톤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역시 몇 번을 들어도 낯이 뜨거워지는 무호였다.
“허명이오.”
“생각보다 겸손하군. 뭐, 신이란 단어를 썼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마는……. 자네는 너무 겸손할 필요 없네.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바로 얼마 전에 광전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지?”
“그 얘길 누구에게 들었소?”
“제오르가의 꼬맹이가 매일같이 나불거리고 다닌 탓에 이미 황실에는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자자하다네.”
“제오르가의 꼬맹이라면…… 혹시 클린턴을 말하는 거요?”
“맞네.”
안톤이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둘 모두 제국의 거물들이니 친분이 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클린턴과 꽤나 친밀한 기색으로 말하자 나름 경계심이 한층 풀린 안톤이었으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생각만큼은 여전했다.
“그럼 의심이 풀렸으면 이만 보내 주시겠소?”
“물론일세.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해도 되겠나?”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로스가 싱글벙글 웃으며 질문을 날렸다.
“경로를 대강 추측해 보니 그리딘으로 향하는 듯한데, 이는 폐하를 알현하기 위함인가?”
황제가 안톤에게 관심을 보내고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클린턴의 호들갑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딱히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뭐, 일단 그리딘으로 가고 있는 건 사실이오.”
“으음. 그렇다면 지금부터 사나흘 정도는 걸릴 테군.”
“뭔가 문제라도 있소?”
“아니. 공교롭게도 딱 시기가 알맞다고 생각해서 그러네.”
“시기가 알맞다니?”
카를로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려 내며 대답했다.
“자네가 도착할 즈음이면 황태자 저하의 탄생일 기념 연회가 있을 예정이거든. 시간이 된다면 그곳에 참석해 줄 수 있겠나?”
클린턴도 그렇고, 카를로스도 그렇고.
어떻게든 안톤을 황궁으로 초대하려고 그런다.
물론 그 이유를 모를 정도로 안톤은 멍청하진 않았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러겠소.”
안톤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카를로스가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이젠 대충 자네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 줄 알겠군. 그러니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네. 그러나 이왕 제국에 들른 거, 황궁을 한 번 구경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네. 게다가 그 자리에는 클린턴 그 아이도 있을 테니, 그렇게 마냥 불편한 자리도 아닐 걸세.”
구구절절 설득의 말을 쏟아 낸 카를로스였지만, 안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사실 안톤이 굳이 황궁으로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카를로스의 말대로 황궁에 대한 호기심도 내심 있었고 말이다.
허나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안톤은 확답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결국 그러한 거절도 승낙도 아닌 태도에 카를로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새로운 설득의 말을 꺼내며 안톤을 귀찮게 하진 않았다.
“후……. 그럼 혹시 모르니 이거라도 갖고 있게. 이걸 보여 주면 군말 없이 경비들이 안으로 들여보내 줄 걸세.”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는 탓에, 안톤은 카를로스가 전해 준 패를 받고 말았다.
다시 돌려주려 했으나 카를로스의 행동이 보다 빨랐다.
“아예 딱 달라붙어서 같이 가고 싶지만, 일이 바쁜 것이 발목을 잡는군. 그럼 꼭 와 주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겠네!”
히힝!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카를로스는 순식간에 기사단을 이끌고 사라졌다.
안톤은 이미 떠나고 없는 그에게 받은 옥패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잘 모르겠소.”
재커스의 질문에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안톤은 초대를 거절하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황궁을 안에서 구경하고, 소문만 무성하게 들었던 황제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허나 귀족들의 정치와 관련되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뭐, 결국 이번에도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이 흘러가겠지만.’
왠지 그런 예감이 들어서 안톤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