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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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7화
127. 탐욕
“군대에 있었단 건 들었지만…….”
“그나저나 저런 게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안톤의 검을 보며 인부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뱉었다.
사실 어느덧 안톤에게는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반응들이었다.
대략 2m 정도의 길이에,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양 주먹을 합친 것보다 두꺼운 검신.
그 누구든 안톤의 대검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 정말로 이것이 실전에서 쓰려고 만든 물건인지 의문을 먼저 갖는다.
설령 이것의 재질이 철이 아니라 목재라 한들, 실제로 이런 걸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테니까.
‘안 그래도 눈에 띄는데 더욱 화려해진 것 같아 좀 그렇군.’
안톤이 오른손에 쥔 검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대검은 예전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원래 무식하단 말이 나올 정도로 투박했던 대검이, 겉보기로도 심상치 않은 마법검으로 변했달까.
검신 전체로 흐르는 묵빛의 광채는 여전했지만, 그 위로 붉은빛의 마법진들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뭐, 사실 변한 건 외관뿐만이 아니었다.
프로텍트 마법을 2중으로 더 각인시켜 보다 단단해졌고, 검날이 상했을 때 자동으로 복원도 가능해졌다.
하지면 이러나저러나 검이 지닌 본질만큼은 같다.
‘더 잘 죽일 수 있게 된 것뿐이지.’
검이란 결국 적을 베거나 찌르는 무기다.
안톤은 녹스 상단을 목표로 달려드는 적들을 살펴보았다. 수건으로 하관만 가린 도적들의 규모는 얼추 300~400명을 수렴했다.
양질의 무구들은 아니었지만 모두 기본적인 무장은 하고 있었고, 그들 무리 중엔 마나 유저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제일 놀라운 건 오러 유저까지 껴 있다는 거지만…….’
하긴 이러니까 전생에 제국이 그토록 반란군들을 힘겨워했던 것이리라.
“죽여라!”
“으아아아!”
선두의 양 측면을 덮친 도적 무리들과, 선두의 호위 병력이 맞붙는다.
비록 녹스 상단 측에서 먼저 눈치채고 행렬을 멈췄지만, 도적 무리들은 원래 상행이 중간 지점을 지나갈 때 기습하려 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전투가 시작됐다.
병력의 질은 녹스 상단 쪽이 훨씬 우수했지만, 숫자의 격차로 인해 그것은 상쇄된다.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감수한 격돌.
피가 흩뿌려지고, 온기를 간직한 시체들이 땅으로 몸을 누인다.
안톤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직접 나선다면 분명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이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행위는 불행히도 애런에게 커다란 이득을 안겨 줄 것이다. 허나 안톤은 죄 없는 인부들이 애먼 피해를 입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슬슬 나서 볼까 하려던 때.
안톤의 귀에 누군가의 대화가 들렸다.
애런과 그의 호위인 가로스 사이의 대화였다.
“도시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그곳까지 전력으로 뚫는다!”
“가장 뒤에 있는 3단은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3단의 경우 호위 용병들이 있기는 했지만 숫자가 극히 적다. 그 정도의 병력으론 도적 무리들의 공격을 막으며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아니, 도적 무리가 없어도 저렇게 노쇠한 말과 낡은 수레로는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벅찰 터.
“그럼 어쩔 수 없지. 버려라! 게다가 그들이 남겨진다면 도적놈들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애런의 명령에 가로스가 군말 없이 새로운 깃발을 들고 병력을 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말들을 몰아붙여 속도를 높이자, 호위 용병들은 모두 그 주변을 따라가며 수비 진형을 갖추었고 그들은 단숨에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야말로 아차 하는 순간에 멀어진 선두.
3단의 인간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입장을 깨달았다.
“젠장! 버려지다니!”
“애런, 이 개자식!”
“우린 끝났어!”
인부들은 물론 용병들까지 절망의 말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로 도적 무리들이 다가온다.
이렇게 아무런 손실 없이 얻을 수 있는 과실이 눈앞에 있는데, 굳이 피해를 감수하며 쫓을 필요는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마치 승냥이 같은 상황 판단.
300명이 넘는 도적 무리들이 총 50명도 되지 않는 그들을 포위하는 데에는 정말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개 한 마리 지나갈 틈 없이 사방이 가로막혔고, 벌벌 떠는 그들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로, 도적 무리들 중 유일한 오러 유저였다.
“미안하게 됐소. 우리들의 사정도 이해해 주시구려.”
어처구니없게 느껴질 사과였지만, 이에 발끈해 화를 내는 인물은 없었다.
그저 모두들 하나같이 고개를 조아리며 흐느꼈다.
지금 이들이 부여잡을 동아줄은 오로지 도적들의 자비뿐이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가진 것만 순순히 내놓는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오. 이러는 우리들도 마음이 편치 않소.”
사내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내놓는다.
마치 우리들도 당신들에게 이러고 싶진 않았다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듯이.
하지만 안톤은 보았다.
천으로 가려졌지만 사내의 입가가 살짝 구겨지는 모습과, 오만함과 탐욕으로 물든 그들의 눈빛을 말이다.
‘정말 궁지에 몰린 이들은 저런 눈빛을 짓지 않지.’
게다가 구성원들을 쓱 훑어보기만 해도, 그저 마른 체형인 자들을 제하면 다들 살집이 올라 있지 않은가.
저들은 결코 굶주림으로 인해 누군가의 것을 빼앗을 수밖에 없던 게 아니다.
그들이 칼을 잡은 것은, 그저 자신들이 더 잘 먹고 더 잘살기 위해서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작태에 안톤이 비웃음을 흘리며 나섰다.
“사과할 필요 없다. 여기서 네놈들이 가져갈 수 있는 건 저승으로 가는 표뿐이니까.”
안톤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피우며 등장하자, 도적 두목이 눈썹을 찌푸린다.
“더 이상 무의미한 피는 흘리고 싶지 않소.”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라……. 그래서 저들을 따라가지 않고 우리들을 노렸나 보지?”
“우리들 또한 어쩔 수 없었소. 이곳의 모두가 책임질 가족이 있는 이들이라오.”
“웃기는군. 너희들은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이 아니다. 그저 욕심에 굶주린 짐승들일 뿐이지.”
비아냥거리는 안톤의 말에 도적들이 험한 눈빛들을 쏘아붙인다.
그 모습에 안톤과 평소 말을 자주 나눴던 인부들이 다가와 그를 말렸다.
“안톤! 그만하게! 저들을 자극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단 말일세! 게다가 윗대가리 놈들이 우릴 버리고 도망간 이상, 이 물건들에 집착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나름 타당한 의견이었다.
버림받은 이상, 녹스 상단과의 의리는 지킬 필요가 없다. 그저 갖고 있는 짐들을 도적놈들에게 넘겨주면 된다.
그럼 피를 흘릴 이도 없고, 손해를 볼 이들도 없다.
“재커스. 당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레이먼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이 물건들을 지킨다고 어차피 이것들이 우리들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당신, 지금 저들을 동정하고 있군?”
안톤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짐짓 주춤하긴 했으나, 재커스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런 건 아닐세. 그저 애런에게 이 물건들이 가는 것보단 저자들이 갖는 게 더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지.”
“그렇군.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소. 하지만 겨우 그뿐이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보겠소?”
“그게 무슨 소린가?”
안톤은 재커스의 물음엔 답하지 않고, 도적 무리의 두목을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까 어쩔 수 없다고 했지? 그럼 증명해 보시오. 우리들은 가만히 있을 테니 상단의 물건들만 가져가시오.”
“그럴 순 없소.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이 갖고 있는 검만큼은 반드시 가져가야겠소.”
“왜지? 이깟 검으로는 사람의 굶주림을 막을 수 없는데.”
“심술궂게 굴지 마시오. 그 마법검을 판다면 훨씬 많은 이들이 배부를 수 있단 걸 당신도 알지 않소.”
“나름 그럴듯한 변명이군.”
쿵!
안톤이 거친 솜씨로 바닥에 대검을 꽂자, 도적 무리 중 여러 사내가 다가와 낑낑대며 검을 끌고 가져갔다.
그리고 이제 안톤의 수중에 무기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들의 분위기가 보다 대범하게 변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 팔찌도 줘야겠소. 그것 또한 아티팩트일 테지?”
“원하는 게 많군.”
툴툴거리긴 했지만 안톤은 순순히 그의 요구대로 팔찌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그가 비릿한 웃음을 내지었다.
“그리고 배낭도 한 번 뒤져 봐야겠다. 아무래도 내 생각엔 거기에도 뭔가 있을 것만 같군.”
안톤이 배낭을 내려놓자, 도적 두목이 경고의 말을 던져 온다.
“허튼 생각 하지 마라.”
처음엔 점잖은 척하더니, 이제는 자연스레 반말을 해 대는 모습에 안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안톤이 하고 있는 생각은 필시 허튼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어떻소, 재커스? 이자들이 그렇게 착한 놈들로 보이시오?”
도적놈들이 안톤의 배낭을 가져가기 위해 다가오는 동안, 안톤은 재커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낯빛이 붉게 물들었다.
“……미안하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아무리 자네여도 저렇게 많은 숫자를 홀로 상대할 순 없었을 걸세.”
“재커스. 난 당신이 마음에 드오. 그래서 해 주는 말이니 너무 꼬아 듣거나 흘려듣진 말아 주시오.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 버리면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소.”
푸슉.
안톤의 손끝이 지척에 접근한 도적의 가슴을 꿰뚫었다.
오러를 이용해 손끝을 감싼 것도 아닐진대, 그의 손은 마치 잘 벼려진 명검 같았다.
채챙!
도적 무리 중 반응이 빠른 몇몇이 검을 빼 들었고, 안톤은 찔렀던 손을 회수한 뒤, 힘없이 쓰러지는 도적 녀석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휘둘렀다.
휘이이잉!
허공을 가르는 그 가벼운 일격에, 도적 무리 중 절반이 무참하게 썰려 나갔다.
나머지 절반을 살려 둔 것은, 자비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검이 버티지 못했을 뿐이다.
가루처럼 변한 검이 지면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안톤은 손에 쥐고 있던 검병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진 후, 주변에 쓰러진 도적의 시체를 뒤져 검 하나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무감흥하게 다시 휘두르려는 때.
도적 두목의 허탈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처음부터 우리를 놀릴 생각이었나.”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군? 상단의 물건만 가져갔다면 정말로 줄 생각이었다. 근데 욕심을 부린 건 네놈이다.”
“젠장.”
휘이잉!
안톤의 검이 휘둘러지며, 남아 있던 도적 무리의 잔당들이 두 동강이 난 채 지면으로 흩어졌다.
인부들이나 용병들은 아직도 사태 파악이 덜 끝난 얼굴로 얼떨떨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재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득 안톤이 걸음을 내뻗자, 그들이 크게 움찔했다.
“어어…….”
안톤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시체들 틈 속으로 걸어가, 자신의 물건을 모두 회수했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원래 위치로 돌아와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출발합시다.”
* * *
재커스가 이끄는 3단은 상행을 계속했다. 목적지는 여전히 수도 그리딘이었다.
계약 위반에 대한 위약금이나 밀린 임금은 둘째 치고, 이대로 물건을 두고 떠나거나 한다면 도적놈들과 한패로 몰릴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상행의 분위기는 굉장히 무거웠다.
평소 친근하게 대하던 인부들은 안톤을 두려워했고, 재커스 또한 안톤을 대하는 것을 불편해했기 때문이다.
3단에 속한 모두가 어서 서둘러 그리딘에 도착해 모든 일이 마무리 지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허나 그런 소망과는 달리, 도적들과 조우한 때로부터 3일가량이 흘렀을 때.
재커스가 이끄는 3단은 또다시 의외의 사태에 휘말려야만 했다.
히힝!
“멈추시오!”
장엄한 목소리에 인부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벌벌 몸을 떤다.
어느샌가 그들은 말을 탄 삼십 명가량의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풍기는 기세는 일전의 도적들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모두가 하나같이 오러 유저의 숙달된 무인이었으며, 충천할 듯한 사기와 엄중한 군기가 잡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수장이 남달랐다.
“본관의 이름은 카를로스 피온 그라테인. 황제 폐하를 대신해 당신들에게 사정 청취를 하겠소.”
카를로스 피온 그라테인.
그는 황실기사단의 단장이자, 브란테의 전당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제국의 명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