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2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6화
126. 호위
“젊은 친구가 대단하군…….”
“저거라면 가히 천력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겠어.”
주위의 인부들이 혀를 내두르며 경악의 눈초리를 어디론가 쏘아 낸다.
그 눈빛들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태연한 얼굴로 짐을 옮기는 안톤이 있었다.
쿠웅.
안톤이 양어깨에 가득 짊어지고 있던 포대 자루들을 수레에 내려놓았다.
이쪽 방면에선 나름 일가견 있는 인부들도 보통 두 자루를 한 번에 옮기기 어려웠으나, 그 몇 배나 되는 짐을 나른 안톤의 이마에는 땀이 한 방울도 맺혀 있지 않았다.
안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을 도우니, 수레에 짐을 싣는 작업은 예정 시간보다 훨씬 빨리 끝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갑작스레 오늘 아침부터 합류하게 된 이방인임에도, 인부들은 호의 어린 시선으로 친근하게 안톤을 대했다.
“이보게! 거기 빨간 친구! 어서 와서 이것 좀 먹고 쉬게나!”
안톤은 그런 그들의 반응이 다소 생경했다.
하지만 조금 낯설었을 뿐이지 싫은 건 아니었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벌어진 판에 안톤이 끼자, 인부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날아들었다.
그중 가장 먼저 안톤에게 말을 건 이는, 처음 안톤을 불렀던 40대의 남성이었다.
“3단주의 소개로 왔다지? 자넨 이름이 뭔가?”
“안톤이오.”
“난 레이먼일세. 그나저나 딱 봐도 무언가 사연이 있는 친구일 것 같은데, 어디 한번 말해 보겠나?”
어떻게 느끼기엔 다소 무례한 화법이었지만, 안톤은 딱히 별 기분은 들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구구절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안톤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다소 무안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시기 좋게 한 사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이, 레이먼. 이 친구가 곤란해하지 않나.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라고? 주책 부리지 말고 이거나 먹게.”
그 사내를 향해 고맙다는 시선을 보낸 안톤은 접시에 놓인 과일 하나만을 집고선 조용히 물러나 뒤쪽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들 사이에선 특이하다느니, 낯을 가린다느니 하는 말은 있었지만, 비난의 말은 일절 들려오지 않았다.
여하튼 그들은 금세 안톤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톤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면서도 귀를 열어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때로는 감정이 격해지고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안톤은 좋았다.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아서 그런가? 정말 평범해진 기분이군. 그에게 고마워해야겠어.’
안톤이 무심결에 오른쪽 팔에 낀 팔찌를 매만졌다.
그 팔찌는 온-누르에게 받았던 아티팩트로, 원래는 생명체만이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칸타타는 안톤의 검을 개조해 주며 검을 그곳에 보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자, 출발한다!”
그렇게 쉬고 있던 때.
안톤이 속한 제3단 외에도 슬슬 모든 준비를 끝마쳤고, 이내 상단주인 애런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상행이 시작됐다.
일정은 지루할 만큼 간단했다.
성문을 넘은 이후 그들은 기다란 행렬을 만들며 하루 종일 관도를 따라 이동했고, 밤이 되자 적당한 자리에서 야영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도 안톤의 존재는 빛을 발했다.
“아무래도 이런 경험이 많은 모양인데, 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굉장히 능숙하군!”
“군대에 있을 적에 배웠소.”
“아, 원래는 군인이었나? 어쩐지……. 근데 그래서 나이는 말 안 해 줄 텐가?”
“비밀이오.”
안톤의 즉답에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던 레이먼이 유쾌한 듯 웃는다.
아무래도 그는 안톤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하! 이거 보면 볼수록 궁금해지는 친구로구먼! 그나저나 잘은 모르겠지만, 3단주가 상관 복은 없어도 부하 복은 있는 듯해.”
“뭔 소리야? 자네가 3단에 있는데.”
옆을 지나가던 인부가 농담 어린 핀잔을 놓자, 주변의 여럿으로부터 한바탕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들에 섞여 멋쩍은 듯 웃던 레이먼이 안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반드시 이번 상행이 끝나기 전까지 자네 입으로 나이를 듣고야 말겠네. 각오하게나!”
“그러시오.”
아무튼 그렇게 야영 준비가 순조롭게 끝이 났고, 시간이 지나 불침번만을 남기고 하나둘 막 잠에 들기 시작할 무렵.
재커스가 안톤을 찾아왔다.
“여러 말이 나올 수 있기에 일부러 찾질 않았네. 어떤가? 일은 할 만한 것 같은가?”
“내가 해 봤던 그 어떤 일보다 편한 것 같소.”
“그래도 편했다니 진심으로 다행일세.”
어제 늦저녁에 칸타타를 찾아간 재커스는, 그에게서 안톤이 굉장한 검사일 것이란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탓에 오늘 하루 종일 그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칸타타가 인정한 검사에게 이런 잡일이나 시키며 인부 대접을 받게 해야 했던 탓이다.
“아무튼 나는 정말로 괜찮으니, 나보다는 당신 걱정부터 하시오.”
재커스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내 걱정이라니?”
“여기서 당신의 입지가 꽤나 위태위태한 듯 보이더군.”
상식적인 부분에서 안톤이 남들보다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는 결코 멍청하지도 눈치가 없지도 않다.
안톤은 상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장 재커스가 이끄는 3단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노쇠한 말과 유난히 낡은 수레. 속해 있는 인부들의 숫자도 현저하게 적은 데다가, 심지어 다들 연령대도 높은 편이다.
만약 오늘 아침에도 안톤이 없었다면 가장 늦게 일을 끝마치는 건 3단이었을 것이다.
“혹시 누군가에게 밉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오?”
아무래도 그 추측이 맞는지, 재커스가 침묵을 지켰다.
왠지 안톤은 그것이 상단장인 애런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그러니 괜히 날 생각한답시고 자기 목 조르는 일은 하지 말란 말을 해 주고 싶었소. 나는 정말로 괜찮소.”
안톤의 생에 거의 8할은 검과 함께 보냈다.
허나 그렇다고 검을 쓰는 일이 아닌 직업을 천대하거나, 수치스럽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저 길이 달랐을 뿐이고, 환경이 달랐을 뿐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팔아 차익을 얻는 상단.
그리고 그들을 도와 짐을 나르는 잡일꾼.
뭔가 어감이 별로고 땅에 씨를 뿌리는 농부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하는 일은 검술을 연마하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지 않은가.
“알겠네. 솔직히 그렇게 깊은 사이도 아닌 지금, 이런 말을 하긴 영 그렇지만……. 자네는 정말 믿음직스러운 사람이군.”
“……난 이만 자야겠소.”
낯 뜨거운 칭찬에 안톤이 침낭 속으로 몸을 숨겼고, 그런 그를 보며 재커스가 훈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는다.
“하긴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할 테니까.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네.”
펭 제국까지 총 42일로 잡힌 여정의 그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빠르건 느리건 시간은 흐르며 결국 아침은 온다.
안톤이 녹스 상단의 잡일꾼이 된 지도 벌써 34일이 지났다.
펭 제국의 국경을 넘은 것이 이 주 전이니, 이제 목적지인 수도 그리딘까지는 근 일주일가량의 거리만이 남은 셈.
그동안의 상행은 순탄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엄격히 구분되는 짐들이 분실되는 일 또한 벌어지지 않았고, 도적들의 습격 같은 것도 없었다.
심지어 숙소를 구하지 못해 마을에 들어서서 노숙을 해야만 할 때도 인부들 사이에서 하다못해 작은 다툼도 없었다.
그야말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여정.
그러나 그것이 안톤이 순조로운 생활을 보냈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이! 빨간 머리!”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안톤이 썩은 표정을 내지었다.
번지르르한 백마에 올라탄 20대 초반의 사내가 그를 손짓으로 부르고 있었다. 녹스 상단의 최고 권력자, 애런이었다.
“…….”
“어쭈, 상단장이 묻는데 대답도 안 해?”
안톤이 그를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기 시작하자, 애런이 말을 이끌고 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자꾸만 옆에서 깐죽거린다.
안톤은 이를 들은 체 만 체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지난 시간 동안, 안톤은 이런 이유 없는 시비에 관해서는 이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도대체 3단주는 부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쯧쯧.”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은 꽤나 영악했다.
본능적으로 사람이 지닌 약점을 파악할 줄 알았으며, 집요하게 그것을 건드는 악랄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요?”
3단주가 거론이 된 이상, 안톤도 더 이상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되어 버리면 애런은 언제까지나 기고만장하게 거들먹거리겠지만, 안톤은 자신 때문에 재커스에게로 불똥이 튀는 일은 막고 싶었다.
안톤이 고개를 돌리자, 애런이 그럼 그렇지 하는 비릿한 웃음을 내지었다.
“와서 어깨 좀 주물러 봐.”
“알다시피 내 업무는 짐을 나르는 일인지라, 거절하겠소.”
“아니, 네 업무는 짐을 나르는 게 아니라, 시키는 일을 하는 거다. 그리고 지금 나는 명령하고 있다.”
“…….”
안톤이 살벌한 기세로 그를 쏘아보았다.
처음에는 그 눈빛에 잠시 멈칫한 애런이었지만, 안톤이 자신을 해칠 수 없단 걸 깨닫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 역시 재미있다니까?”
어쩌면 애런이 항상 후미에 위치한 이곳까지 행차하여 안톤을 괴롭히는 건, 고작 저 이유 때문일지도 몰랐다.
안톤을 바라보던 애런의 시선이 어디론가 움직였다. 행렬 선두 쪽 방향이었다.
그곳에는 후미인 이곳에서도 잘 보이도록 높이 올라가 휘날리는 노란색 깃발이 있었다.
그 깃발은 뭔가 문제가 생겨 이동을 멈추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오지. 준비하고 있으라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애런이 서둘러 말을 몰아 앞으로 치고 나갔고, 그제야 안톤 주위에 있던 인부들이 하나씩 투덜거렸다.
“에이, 빌어먹을 호래자식! 이거야 원, 날이 갈수록 행패가 심해지는 것 같구먼그래.”
“아휴! 아니온 님은 왜 하필 저런 놈을 낳고 돌아가셔 가지고…….”
“자넨 괜찮나, 안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자넨 수도에만 도착하면 더 이상 저 낯짝을 볼 일도 없지 않은가.”
위로의 말들을 던져 오는 그들을 보며 안톤이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고말고! 그럴 것도 없이,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소. 그나저나 왜 갑자기 잘 가던 도중에 멈춰 섰는지가 궁금한데 재커스, 혹시 당신은 짚이는 게 있소?”
“글쎄……. 이제 와서 마적 떼들이 나타날 것 같지도 않은데 왜 멈췄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재커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마적 때문일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지만, 안톤은 어쩌면 정말 그 이유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수도인 그리딘과 그 반경의 도시와 마을들은 카린이 가져온 곡식으로 어느 정도 혼란이 잠재워졌다지만, 외곽 쪽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대가뭄이 남기고 간 기근 때문에 사람들은 다들 굶주려 있었고, 안톤은 녹스 상단이 지나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짓던 눈빛을 기억했다.
그것은 총 200명가량이나 되는 인파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도적으로 돌변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사납고 험악한 눈빛이었다.
아무리 수도인 그리딘과 일주일가량 떨어진 위치라고 한들,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도적놈들이 활동 중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안톤은 습관적으로 현 상황을 재단해 보았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쪽이 가장 위험하겠군.’
재커스가 이끄는 제3단이 후미에 위치했다는 점이나, 호위 병력이 적다는 점은 둘째 치고, 애초에 운송하는 품목 자체가 위험했다.
고품질의 마석들을 주로 실은 1단이나 2단과 다르게, 그들은 곡식들을 싣고 있었다. 굶주림으로 인해 칼을 들게 된 도적놈들이라면 분명 이곳을 노릴 터.
게다가 짐이 가벼운 1, 2단과는 다르게 제3단은 말도 노쇠했고 곡식을 싣다 보니 빠르게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안톤만이 심각한 얼굴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때.
선두에서 깃발 하나가 새로이 올라왔다. 붉은색의 깃이었으며, 그것은 매우 다급한 느낌이 물씬 묻어나도록 열렬히 휘둘러지고 있었다.
“붉은색 깃발은 무슨 의미요?”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적이 나타났다는 의미일세.”
재커스와 안톤의 짧은 대화가 끝이 난 후.
시린 긴장감이 감돌며 다들 몸이 얼어붙는다.
그것은 재커스도 마찬가지였고, 안톤은 그저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투 준비!”
어느덧 앞에서부터 시작된 외침이 안톤이 있는 후미에까지 전해졌고, 안톤은 근 한 달 만에 검을 팔찌에서 꺼냈다.
“걱정 마시오. 이곳은 반드시 내가 지켜 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