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2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3화
123. 작별
엔티아네아에 위치한 어느 산속.
절벽 끄트머리에서 안톤이 나타났다.
‘어쩌다 보니 또다시 여기군.’
허탈한 웃음을 내짓던 것도 잠시.
안톤은 산등성이 사이로 내려앉는 석양을 바라보며 방향을 가늠한 후, 그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달렸다.
그렇게 산을 내려서자 예전에도 한 번 지나쳤던 들판이 나왔고, 그곳에서 조금 더 가자 칸트렐리움이 나왔다.
그러나 저번과 달리, 굳이 성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미 지도를 구입해 근방의 지리는 숙달을 끝마쳤다. 그러니 그냥 성을 지나쳐 곧장 목적지까지 직행하는 게 훨씬 빠르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고, 밤이 지나가고 다시 해가 뜬다.
내내 쉬지 않고 움직이던 안톤의 발이 멈춰 선 것은 정오를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미궁 도시 라프도니아의 성문을 바라보며 안톤이 팔찌 속에 있는 델스와 케이혼을 꺼내 주었다.
“안에서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를 모르겠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미궁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인가?”
“그런 아티팩트가 있소.”
트릭 씰에 관해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안톤이 대충 둘러댔고, 케이혼은 그저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아티팩트라……. 결국 기적을 믿지 못하던 마법사들이 기적을 만들어 냈군.”
일단 그들은 성문 앞으로 향했다.
그곳은 여느 때와 같이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입가심할 거리라도 사 오겠소.”
길게 늘어진 줄에 합류하기 전에 케이혼이 주변의 행상인들에게서 군것질거리를 몇 가지 구해 왔고, 그들은 그것들을 먹으며 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이었다.
누군가가 안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며칠 전에 칸트렐리움에서 함께 식사한 적이 있었던 재넌 일행이었다.
“어! 당신, 안톤 맞죠?”
“정말 그자로군? 거봐, 내가 그때 분명 잘못 본 걸 거라고 말했지? 그렇게 빨리 달리는 사람이 안톤일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을 걸며, 그들 무리가 자연스럽게 안톤의 뒤쪽에 섰다.
처음부터 이럴 요량으로 말을 걸어온 것이리란 예상이 섰지만, 안톤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원래 안톤의 뒤쪽에 서 있던 상인 무리들이 묘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재넌은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나저나 당신, 어떻게 이리 빨리 도착했지? 딱히 우리가 여유를 부린 것도 아닌데.”
“그냥저냥 서두르다 보니.”
“흐음. 아무튼 그새 못 보던 일행이 생긴 것 같은데……. 언젠 혼자인 게 좋다더니?”
“어쩌다 보니 그리됐소.”
안톤이 그저 단답으로만 일관하자, 재넌이 델스와 케이혼을 바라보며 소개를 바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델스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기색이었고, 케이혼은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하하! 반갑소. 나는 케이혼 아델로만이라는 사람이오. 이렇게 만난 것이 다 신께서 점지한 인연이란 생각은 들지만, 뒤에 있는 상인분들께서 먼저 오셨으니 뒤로 가서 줄을 서는 게 어떻겠소?”
그리 말하며 케이혼은 안톤에게 슬쩍 시선을 보냈다.
이래도 괜찮겠냐는 의미가 그 시선 속에 담겨 있었고, 안톤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걸로 의사를 표명했다.
“하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이렇게 직설적인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재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케이혼은 넉살맞게 웃으면서도 돌려 말하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저분들도 꽤나 오래 기다렸을 텐데, 새치기를 당하면 기분이 어떻겠소. 우리가 같이 온 것도 아닐진대.”
“아니…….”
재넌이 뭔가 도움을 바라는 시선으로 안톤을 바라보았고, 안톤은 아무런 말 없이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됐어, 재넌. 그만해. 아델로만이라고 했나요? 새치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반가워서 말이나 걸어 보려고 온 거지.”
“그렇다면 다행이오. 한결 무겁던 마음이 개운해지는군. 고맙소!”
“가자.”
일행 중 유일한 여성인 레이나가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그들의 뒤를 지켜보던 케이혼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안톤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를 들어 보니 별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속이 뻔한 짓을 해서 나서 봤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아니, 잘했소. 딱히 도덕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옆에 있었으면 꽤나 시끄러웠을 것 같거든.”
“하하. 시각의 차이는 있지만, 잘됐군.”
안톤은 문득 그들의 반응이 궁금해 청각을 키워 그들이 있는 쪽에 집중해 보았다.
그들은 분한 목소리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당연히 대화의 주제는 안톤과 그의 일행에 대한 것이었고, 안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을 그만뒀다.
더 들어 봤자 무익한 얘기들뿐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던 델스까지 씹어 대는 건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 말이지.’
안톤은 새삼 사람의 인상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극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감탄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귀찮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들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괜찮은 편이었다고 해야겠지.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대개의 사람들은 선과 악 중 어느 한 가지만으로 규정 지어지지 않는다.
전생까지 합쳐 몇십 년을 살아온 안톤이었지만, 그로서는 전혀 가늠조차 못 할 정도로 복합적인 것이 바로 사람의 감정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섬세하면서도 천덕스러운 면이 있기에, 누군가에게 선뜻 호의를 내비치다가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악의를 품는다.
그리고 저들은 단지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평범에서 벗어난 쪽은 나인가…….’
안톤이 씁쓸한 듯 미소 지었다.
겨우 이런 보잘것없는 사건으로, 선과 악이니 뭐니 비약해 대다니. 정말로 이상한 쪽은 이쪽 아닌가.
‘안 그런다 여겼는데, 아무래도 그들 때문에 머릿속이 꽤나 복잡했던 모양이야.’
그렇게 생각을 막 끝내던 차에, 케이혼이 문득 말을 걸어왔다.
“안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듣지 못했소. 무슨 말을 하고 있었소?”
“음……. 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나랑 친구 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네.”
다소 뜬금없는 제안에 안톤은 멍해졌다.
케이혼은 다소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연신 내뱉으며 말을 이어 갔다.
“흠흠. 뭐,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문득 친구라는 단어를 들으니, 핫산이 떠오른다.
허나 적어도 핫산은 안톤과 나이가 같았었다.
“음. 싫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당신이 손해일 것 같은데?”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케이혼의 나이는 얼핏 보기에도 30대는 넘어 보였다. 그리고 안톤의 지금 나이는 스물하나다.
뭐, 안톤의 전생 나이까지 합치면 실질적으로 손해는 아니겠지만.
“마음이 맞는다면 나이가 무슨 소용 있겠나?”
케이혼의 말에 안톤이 피식했다.
“합시다, 그럼. 그 친구라는 거.”
“좋아.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잘 부탁하네, 안톤.”
* * *
상당 시간의 기다림 끝에 검문을 끝마친 그들은 성문을 넘어 미궁 도시 안으로 진입했고, 그것은 이제 헤어질 때라는 것을 뜻했다.
“혹시 나를 따라 본단으로 가지 않겠나? 교황 성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인데…….”
“아까 말했다시피 해야 할 일이 있는지라.”
“거참, 아쉽게 됐군. 꼭 소개해 주고 싶은 여자가 있었는데 말이야.”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케이혼의 모습에 안톤이 혀를 내둘렀다.
누가 신을 모시는 사람 아니랄까 봐, 참 시종일관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방향 면에서는 한참이나 어긋났다 싶긴 하지만.
“그럼 나 먼저 가겠네. 아마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테니까, 한시라도 빨리 가서 진정시켜 줘야지. 아 참! 성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겠네. 그게 자네한테도 편할 테니.”
“고맙군.”
케이혼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이제 안톤은 델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열한 살의 작은 소년은 두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채 안톤을 마주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네가 한 일에 대한 대가니 고마워할 필요 없다.”
“그게 아니라, 버리고 가지 않아 줘서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잖아요.”
뭔가 그 한 마디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안톤이었다.
어린 나이에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안쓰러운 일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안톤은 델스에게 결코 동정의 눈빛은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열심히 살아가는 자에 대한 모독이었다.
“앞으론 어쩔 셈이냐?”
“이 돈으로 기술을 익힐 거예요. 그래서 길잡이가 아니라 떳떳한 모험가가 될 거예요.”
“딱히 길잡이라고 떳떳하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마는……. 뭐, 너라면 뭘 하든 잘 해낼 것이다.”
안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델스가 배배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도 가 볼게요. 여동생이 아마 엄청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 힘내거라.”
델스와도 작별 인사를 끝낸 안톤은 이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워낙 익숙한 일이었기에 쓸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어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카린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을 뿐이다.
똑똑.
칸타타의 마법상에 도착한 안톤은, 이번엔 창문을 넘지 않고 똑바로 문을 두들겼다. 그리고 결국 칸타타는 한참이나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나타났다.
“호오. 돌아오는 게 생각보다 몇 배는 빠른데? 설마 그냥 돌아온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그래서 돈은?”
“돈으로 바꿔 오진 않았지만…… 이거면 충분할 거요.”
안톤이 가방을 꺼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마석을 보여 주었다. 칸타타는 그제야 만족한 웃음을 내지으며 문을 활짝 열어 안톤을 맞아 주었다.
“혹시 몰라 일찍 준비를 끝마쳐 두길 잘했군. 들어오게나.”
안톤을 집으로 들인 칸타타는 안쪽에 숨겨진 지하로 그를 안내했다. 계단도 그렇고 그 아래의 방도 그렇고, 굉장히 음침한 느낌이 가득한 장소였다.
“굳이 이런 식으로 만든 이유가 있소?”
“내 취향이거든. 껄껄.”
“자, 어서 옷을 벗고 여기 눕게. 곧장 시술을 해 주도록 하지.”
상의를 벗어 옆에 건 안톤이 침대에 눕자, 칸타타가 기괴한 웃음을 흘린다.
“흐흐흐.”
괜히 불안해지게끔 만드는 웃음소리.
안톤은 도대체 왜 웃냐고 묻고 싶었으나, 왠지 그렇게 물어봤자 시답잖은 대답만 돌아올 것 같아 그만뒀다.
“그럼 시작하겠네. 조금 아플 수 있겠지만 참게!”
“그런 거야 내 전문이오.”
“그럼 다행이지만 말이야……. 흐흐!”
칸타타가 마법 염료를 묻힌 바늘로 안톤의 문신의 선을 따라 피부를 콕콕 찔렀다.
“읏!”
그런데 바늘이라고 생각하기엔 생각지도 못했던 고통이 찾아왔다. 버티겠다고 마음먹으면 버틸 수 없는 통증은 아니었지만, 거의 고문에 가까울 정도의 강도다.
“역시 아프지?”
“괜찮소. 참을 만하니 계속해 주시오.”
안톤의 말에 칸타타가 감탄한 표정을 짓는다.
“대단하군! 하긴 원래 대가 없이 얻은 과실은 쓰기만 한 법이지. 이 고통을 감수하면 적어도 자네는 지금보다 세 배는 더 강력한 육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네. 그러니 참게!”
“알았으니, 어서 하기나 하시오.”
“근데 진통제 좀 줄까?”
“왜 진작 주질 않고! 후우……. 아니오, 됐소. 그럼 부탁하겠소.”
뭔가 쓴소리를 뱉어 내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는 괴팍함이었다. 아무튼 칸타타가 건넨 의문의 알약을 먹고 나니 좀 괜찮았다.
바늘이 피부를 콕 찌를 때마다 살짝 따끔따끔하긴 했지만, 무의식중에라도 신음을 뱉을 정도는 아니랄까.
그렇게 한창 시술이 진행되던 중, 집중하느라 말이 없던 칸타타가 손을 멈추고 말을 걸어왔다.
“자네……. 이상한 술식을 몸에 달고 다니는군?”
“이상한 술식이라니?”
“확실히 노예 각인술은 아닌데, 뭔지는 잘 모르겠군. 마치 무언가를 봉인한 것 같은데…….”
봉인이라는 단어에서 안톤은 짐작되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헤르시가 펼쳤던 일족의 비기, 율법의 힘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각인술이었다.
혹시 자식을 걱정한 그녀가, 적들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 노예 각인술을 펼치며 일족의 비기도 같이 썼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오래되어서 그런가? 굉장히 불안정한 느낌이야.”
“불안정하다면, 혹시 없애는 것도 가능하겠소?”
“물론이지! 시간은 조금 더 걸리겠지만 이 정도쯤이야 금방 할 수 있네. 해 줄까? 뭐, 이건 굉장히 흥미로우니 추가 비용은 받지 않도록 하지.”
“그럼 그렇게 해 주시오.”
율법이란 운명을 이끄는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추측이 옳아, 봉인진으로 인해 억제되어 있던 율법의 힘이 풀려난다면 보다 강한 운명이 안톤을 이끌 것이었다.
평소 운명이란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안톤이지만, 정말로 그것이 운명이라면.
안톤은 그 진정한 운명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