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1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13화
113. 수련
“오래 걸릴 것 같더니, 굉장히 빨리 왔군?”
“모두 당신이 준 트릭 씰 덕분이오.”
그동안에 많은 일이 있었긴 하지만, 실상은 겨우 하루 만의 재회였다.
세로게트는 안톤의 얼굴을 보더니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자네…… 무슨 일이 있었군.”
“별일 아니오.”
“정말 그렇다면, 자네의 얼굴이 하루 만에 이렇게 변할 리가 없지 않은가. 괜찮다면 말해 주지 않겠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안톤의 입에서 코르보 백작가에서 있었던 사건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그 또한 누군가에게 털어놓아 이 갑갑함을 해소하고 싶었고, 전생과 관련된 얘기들까지 전부 털어놓을 수 있는 자는 세로게트가 유일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야기를 다 들은 세로게트가 인자한 눈으로 안톤을 바라보았다.
“복수라……. 여러모로 골치 아픈 단어지. 아무튼 자네 표정을 보건대, 그 결말이 생각보다 개운치 않던 모양이지?”
그의 말에 안톤이 긍정했다.
에멀린을 죽음으로 이끌고, 코르보 백작 일가를 멸했지만 통쾌한 감정은 전혀 일지 않았다.
어쩌면 통쾌한 복수극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죄책감을 느끼는 건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안톤이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싼 녀석들이었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집행자의 운명을 타고난 자가 하는 말이니 그건 틀림없겠지.”
“나를 비꼬는 것이오?”
순간 안톤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세로게트는 부정하지 않고 재차 질문을 쏘아 냈다.
“병사들은 해치지 않았으면서 왜 기사들은 팔을 잘랐지?”
“기사들은 힘이 되니까. 코르보 백작가를 완전히 짓뭉개려면 그들이 없어져야만 했소.”
“그럼 왜 굳이 그 소영주와 에멀린이라는 여인 말고도 백작 일가를 몰살시킨 겐가? 어차피 기사들을 모두 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을 텐데 말이야. 정말로 그들 전부가 죽을죄를 지은 자들이었나?”
안톤은 말문이 막혔다. 선뜻 그의 말을 반박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스무 명의 백작 일가 중에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감히 그들의 죄를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안톤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단지 내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소.”
복수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언제나 사적인 감정을 근원으로 행해진다. 그리고 그건 안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세로게트는 그런 안톤의 말에서 모순을 잡아채 꼬집었다.
“그런데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라면서, 어째서 이렇게 흔들리는 겐가? 만약 자네가 복수를 끝마치고서 오히려 홀가분한 듯 웃고 있었다면,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걸세.”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그렇군. 하면 아쉽게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없겠어. 한 번 혼자서 열심히 고민해 보게. 고민을 한다는 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소. 나도 한 번 계속 생각해 보리다.”
안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로게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징조로군. 아마 자네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야.”
“그러기 위해 당신을 찾아온 거 아니겠소.”
“하하.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안톤이 어깨를 으쓱했고, 세로게트의 수업이 시작됐다.
* * *
세로게트와 온-누르는 가르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온-누르가 끊임없는 실전과 반복적인 노력을 주된 방식으로 삼았다면, 그는 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그의 수업은 신체에서 기초가 되는 부분부터 시작했다.
“인간은 단전이 두 개밖에 없네. 일반적인 무인들이 마나 홀이라 부르는 하단전과, 마법사들이 서클을 새기는 중단전이지.”
하단전은 배꼽에, 중단전은 심장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 혼요종과 더불어 다른 몇몇 종족들은 그 외에도 단전 하나를 더 가지고 있네.”
세로게트가 자기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상단전이네. 그리고 천검술 또한 이 상단전을 사용하네. 그래서 자네가 특별한 걸세. 원래라면 인간들은 천계, 즉 상단전을 열 수가 없으니까.”
세로게트의 말에 안톤이 반박했다.
“잠깐. 뭔가 이해가 되지 않소. 비록 흉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지만 나는 천검술을 쓸 수 있는 인간을 본 적 있단 말이오.”
해린에서 만났던 레버르트 남작.
그는 검혼을 쓰는 동방인이면서 서대륙의 오러도 썼다. 그리고 안톤이 천검술에 대해 알려 주자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무공에 섞어서 마지막 날 선보이기도 했었다.
이것저것 많이 섞이긴 했으나 그것은 틀림없이 천검술의 묘리가 접목된 일검이었다.
안톤의 말에 세로게트가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음……. 아무래도 이건 내 예상이다마는, 그자의 선조 중에 이종족이 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군.”
“아…….”
뭔가 짚이는 게 있는 얼굴로 안톤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고 보니 레버르트 남작은 순수한 동방인이 아니었다.
나중에 친해지고서야 들을 수 있었던 얘기지만, 그의 가문은 동방인의 태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구된 가문이었다.
4세대에 걸쳐 여러 피들이 섞였고, 그중엔 서대륙인이 아니라 이종족들이 있어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기대되는군.’
문득 레버르트 남작의 근황이 궁금해졌던 안톤이지만, 이내 상념을 떨쳐 내고 세로게트의 말에 집중했다.
“아무튼 동방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떠오른 말인데,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동방인들은 대개 마법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나?”
“금시초문인 일이오.”
동대륙에는 마법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고 들었고, 해린에서도 펠샤인이나 용의 현자를 제외하면 마법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애초에 무인보다 마법사가 훨씬 적다고는 해도, 북부 국가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적은 비율이었다.
“왜일 것 같나?”
“음. 왠지 단전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 같소만.”
“동방인들은 선천적으로 중단전의 크기가 엄청나게 크네. 한 마디로 마법을 익히기 수월한 육체인 것이지. 대신 치명적인 단점이 있네. 바로 그 반대급부로 하단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야. 그들이 오러를 쓰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세.”
동방 무예의 근원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그들은 검을 휘둘러 단전이 아니라 전신에 마나를 쌓는다. 단전이란 구심점이 없기에 효과는 더디지만, 오랜 시간을 행하면 자연스레 신체적 능력도 상승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거친 파의 과정과도 비슷할지도…….’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검에 몰두하여 발현이 가능할 정도의 마나가 몸에 쌓이면, 그때 비로소 검혼을 쓸 수 있게 된다.
‘나중에 핫산을 만나면 꼭 이 얘기를 해 줘야겠군.’
애꿎은 검혼에 매달리지 않고, 차라리 마법에 몰두하여 마법사를 양성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터였다.
아무튼 그 이후로도 안톤은 세로게트와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딱히 검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더라도, 얘기가 딴 쪽으로 새면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잡다한 이야기라 하기엔 세로게트의 말은 모두 놀라운 이야기들뿐이었다. 마치 오래전에 있던 전설들을 듣는 것 같달까.
세로게트의 지식은 정말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것들을 그는 태연자약하게 얘기했다.
이에 대해 한 번 칭찬을 했더니 그는 멋쩍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5천 년 정도 살면 이 정도는 알게 된다네.”
세로게트가 본격적인 주제를 꺼낸 것은 그로부터 얼마 더 지나서였다.
“자네는 현재 자신의 수준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얼마만큼 된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나도 그게 너무 애매하오. 명인 중 하나를 이겼지만, 블라디미르의 그자는 이길 수가 없었소.”
“내가 알아보기로 쟈카론은 블라디미르 내에서도 첫손에 꼽을 만큼 전투에 능한 능력자라고 하네. 게다가 자네는 합공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1:1이라면 틀림없이 자네가 이길 수 있었을 것이네.”
안톤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위로해 주고 있는 것이오?”
“사실을 말할 뿐이네. 사실상 천계를 연 이상, 자네를 이길 만한 인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게. 물론 그렇다고 안도하라는 소리는 아닐세. 자네가 상대할 자들은 인간이 아니며, 그 수도 많으니까.”
“블라디미르…….”
안톤이 무심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들 단체의 주축은 고대 시절부터 최상위종이라 불렸던 진혈종들이다.
당연히 그들 또한 상단전의 힘을 쓰고 있고, 그 힘은 고유 능력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말게나.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네는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지금부터 그 방법을 내가 알려 주도록 하겠네.”
안톤은 침도 삼키지 않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 * *
에반하임과 레노테이르 사이의 관계가 원만하게 회복된 후, 아쟈스탄은 다시 원래의 활기를 찾았다.
거리 곳곳에서 쉽게 혼요종들을 볼 수 있었고, 에반하임의 관문을 넘으려는 상인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런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느 고급 별장의 테라스에 다섯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시간을 날려야 하지? 벌써 겨울도 지나갔고 이제 봄인데?”
일행 중에 있던 유일한 여성, 카트락시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고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들 아무 소득도 없이 반년 동안 기다리고만 있는 생활에 지쳐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아르토르. 이쯤 되면 신중한 것도 도를 넘었다. 이제는 슬슬 결정을 내려라. 이대로 물러나고 다음 기회를 노릴지, 아니면 피하지 않고 제대로 한 번 붙어 볼지.”
“나는 한판 붙는 쪽이다! 이런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가르톤과 쟈카론도 불만을 표하며 누군가에게 대답을 요구했고, 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모였다.
벽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복면 사내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눈길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따가운 눈총을 한 몸에 받던 아르토르가 덜컥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고 현재 이 상황이 달가울 리 없었다.
‘왜 하필 에반하임에 처박혀 가지고…….’
카트락시아. 로푸스. 가르톤. 쟈카론. 아르토르.
하나하나가 강력한 힘을 소유한 이들이 이렇게 모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타고난 운명의 가호를 받아 더 성장하기 전에, 빠져나갈 수 없는 궁지로 몰아 해치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 반년 동안 그 목표를 이루기는커녕,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바로 단 한 존재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르토르는 지금 그 존재의 이름을 거론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여기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어야 했는지. 세로게트. 그자는 괴물입니다.”
“흠…….”
겨우 이름을 한 번 언급했을 뿐인데, 불만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
그 정도로 세로게트 알-바흐르란 이름은 그들 사이에서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겁쟁이들. 그냥 한판 붙으면 될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군. 쯧쯧. 아무리 그놈이라도 우리 다섯이라면 해치울 수 있다.”
“절반은 넘게 죽을 거라는 말은 빠졌지만, 뭐 쟈카론 님의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가 방해한다면 결국 우리의 목표는 살아서 도망가고야 말겠지요.”
아르토르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가르톤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 안톤이란 놈이 언제 에반하임에서 나올지도 모르는 노릇인데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만은 없다.”
사실 가르톤의 말도 맞는 소리였다.
다들 오랜 숙원을 이루기 위해 바쁜 시기였다. 아르토르만 해도 제국에서 자리를 비운 탓에 꽤나 골치가 아팠으니까.
하지만 안톤을 죽이는 일은 그 모든 걸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뭐가 가장 중요한지도 모르는 머저리들…….’
속에서는 욕지거리를 뱉으면서도 아르토르의 안색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계획을 수립한 것이 저이니, 어느 정도 책망의 말을 듣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아르토르의 노력은 딱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
“알겠다. 대신 최종 기한을 두지. 오늘로부터 30일이 지나면 난 주저 않고 돌아가겠다.”
할 말만 내뱉고는 어디론가 사라진 가르톤을 따라, 모두가 한 마디씩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동의한다.”
“나도 안톤 그놈이 미친 듯이 싫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서…….”
“크하하! 너답지 않게 웃긴 표정이군! 아르토르!”
그들이 모두 자리를 떠나고 그는 한참이나 모멸감에 떨어야 했다. 어쩌면 혼자만의 힘으로 그들을 통제하겠다는 건 오만이었을지도 몰랐다.
‘이젠 어쩔 수 없군. 그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겠어.’
또 다른 운명의 주인이기도 한 자를 떠올리며 머리가 복잡한지 그가 이마를 질끈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