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11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11화
111. 인과
콰콰쾅!
겨우 단 한 번.
검을 사선으로 허공에 휘둘렀을 뿐인데, 성문이 우르르 무너진다.
기사단장 포틀란드는 생전 처음으로 머리털이 쭈뼛 섰다. 뭐가 지나갔는지 낌새도 느끼지 못했는데, 성벽에 이어진 궤적을 따라 그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잘려 나가 있었다.
사실 그는 안톤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쟈빌이 당한 것은 이미 전해 들어 알았지만 그가 방심했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직 쟈빌은 마나 유저였고, 만약 기공 대신 외공을 극한까지 수련했다면 아차 하는 사이 순식간에 당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
단 일격에, 그것도 별 힘을 실어 휘두른 것 같지도 않은 일격에 성문이 통째로 갈라졌다. 그것은 오러 유저인 그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각성을 거친 마스터들이나 할 수 있는 영역의 신위였다.
솔직히 그는 아직도 이게 정말 안톤이 행한 일인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이런 위력을 어찌 한 줌의 마나 없이 이루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한 영역이었다.
“조력자가 있다! 아마도 마법사일 확률이 높다. 찾아내라!”
잠시 굳은 채 멍하니 있던 포틀란드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아무래도 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모양이었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안톤의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숨은 조력자를 찾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안톤은 그런 분주한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 어깨에 짊어진 에멀린을 향해 말을 걸었다.
“잘 보고 들어라, 에멀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온전히 너로 인해 생긴 일들이니까.”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부하들에게 수색을 명한 포틀란드가 자신이 직접 안톤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매끄러운 양질의 검은 그가 전력으로 발휘한 오러로 뒤덮여 있었다.
안톤은 피하지 않고 한 걸음을 내뻗었다.
다른 자들의 눈에는 단순히 그렇게만 보였다.
그런데.
스윽.
포틀란드의 상반신과 하반신 사이에 미세한 실금이 생기더니, 이내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파밧!
잘려진 절단면에서 피분수가 튀어 올랐고, 안톤은 옷에 피가 묻지 않게 시체를 피해 지나갔다.
마치 당연한 일을 행한 것처럼 아무런 기색 없는 표정으로.
‘죽어 마땅한 녀석이었어.’
부단장인 가르스톤과 다르게, 포틀란드에 대해서는 꽤나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비명횡사를 해도 슬퍼할 자격도 없는 놈이었다.
물론 이 세상에 그런 자들은 널리고 널렸고, 안톤은 당연히 정의의 사도 같은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은 본보기가 필요한 때였다.
포틀란드가 단칼에 두 조각으로 분리되는 순간, 싸한 정적이 찾아왔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을 것이 분명함에도 다들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정적은 안톤이 다시 한 걸음을 내뻗는 순간 끝이 났다.
“막아야 한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가르스톤이 병력을 지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명령에 전열을 다잡은 병사들이 방패를 얼굴까지 들어 올리고 거리를 좁혀 왔고, 기사들은 가장 앞에서 안톤을 견제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안톤에게 있어 강철로 제련한 방패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고, 기껏해야 오러 유저인 기사들은 단 일검조차 제대로 버텨 내지 못했으니까.
안톤이 본격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에는 눈이 없다, 라는 옛말은 적어도 안톤에겐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의 검에는 눈이 있었고, 상대를 가려서 지나갔다.
일반 병사들은 그저 기절을 시키는 데 그치는 반면, 기사들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팔 한쪽 정도는 베어 냈다.
상황이 모두 종료되기까지는 일말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말도 안 돼…….”
순식간에 처참한 광경이 내려앉은 성문 앞을 보며 에멀린이 멍하니 중얼거렸고, 안톤은 이제 그 누구도 가로막지 않는 성문을 넘어 영주성으로 들어왔다.
처음 들어오는 외부인이라면 길을 헤맬 정도로 성 내부는 상당히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었지만, 안톤은 마치 제집에 온 듯 길을 찾았다.
‘이곳도 오랜만이군.’
안톤은 최단 경로를 따라 집무실로 이동했다.
보통 이런 사태가 터지면 백작가의 일원들이 모두 그곳으로 집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쓰레기들을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는 기회지.’
벌써 비상통로로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안톤은 속도를 올렸다. 이내 목적지에 도달한 그는 문을 열어젖히기 전에 또 한 번 에멀린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내가 명심하라 했던 말을 기억하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레온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여기서 끝내겠다.”
“용서는 무슨 용서? 너야말로 내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안톤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남았나 보군. 뭐지?’
안톤은 신안을 개방해 방문 너머를 확인했다.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사람이 한 군데 모여 있었고, 놀랍게도 그 사이에 마스터급의 무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스터가 있었군. 그래서 당신이 이토록 고집을 피울 수 있었던 거야.”
“그, 그걸 어떻게…….”
한눈에 보기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에멀린이었으나, 그녀는 금세 태도를 바꿨다.
“제국에서 온 마스터다! 네깟 놈은 단칼에 도륙 내 버리시겠지. 그럼 이제 알겠느냐? 지금 정말로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게 누구인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안톤이 기분 좋은 웃음을 내지으며 문을 걷어찼다.
쾅!
“한 번 알아보자고, 과연 용서를 구하는 쪽이 누가 될지.”
물론 안톤은 그 정답을 알고 있었다.
* * *
방문이 열리자마자, 에멀린은 안톤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 떨어지며 맞닿은 어깨가 엄청나게 아팠으나, 그녀는 외려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저 악마 같은 놈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내팽개쳐지며 발생한 충격 때문이었을까.
굳어서 움직이지 않던 몸도 이제 움직일 수 있었다.
에멀린은 후다닥 바닥을 기어 금발 사내의 뒤로 몸을 숨겼다.
백작가의 일원을 지키는 형세로 가장 앞에서 검을 빼 든 이 사내가 바로 제국에서 온 마스터였다.
바로 며칠 전 통성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저 제국의 마스터라고만 알 뿐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기사님! 어서 저 무뢰배를 응징해 주세요!”
울부짖는 듯한 애절한 외침이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발 사내는 그저 한결같은 자세로 안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래. 고수들의 싸움에선 먼저 움직이는 쪽이 불리하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살면서 언젠가 한 번 들었던 것 같은 얘기가 생각난 에멀린이 입을 꾹 닫았다.
혹여 자신이 집중력을 흩트렸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괜찮으세요?”
방에 있던 20대 초반의 사내가 비틀거리는 에멀린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녀와는 고작 열댓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나 항렬로는 손자뻘에 있는 사내였다.
에멀린은 감사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이름이 뭐더라?”
“카를로스입니다, 조모님.”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그저 그것을 끝으로 깔끔하게 관심을 거뒀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겨우 이런 게 아니었다.
에멀린의 독기 어린 시선이 안톤을 향했다.
저 기세등등하던 놈이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꼴좋구나!’
막힌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에멀린이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지켜봤다. 이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눈으로 봐 놔야지만 밤에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때까지도 에멀린은 금발 사내가 질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침을 꿀꺽 삼키며, 어서 저 망할 놈이 천벌을 받기를 두 손 모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숨죽이며 정적이 이어지던 때 안톤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설마 제국의 마스터라는 게 당신일 줄은 몰랐는데.”
에멀린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말투이지 않은가.
‘아, 안 될 것 같으니 허튼수작을 부리려는 것이구나!’
멀쩡한 사고였다면 이런 결론이 나오진 않았을 테지만, 지금 그녀의 정신은 한껏 피폐해져 있었다.
에멀린이 금발 사내에게로 황급히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거의 애원하듯 그에게 매달렸다.
“기사님! 저 악당 놈과 아는 사이는 아니시겠죠? 그렇죠? 아! 혹시 기사님도 저놈과 무슨 악연이 있었던 건가요? 그런 거지요?”
그러나 머지않아 그녀의 마지막 희망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금발 사내의 표정을 보게 된 순간, 모든 것이 명료해졌으니까.
‘이건…… 이건…….’
에멀린은 지금 그가 짓는 표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았다.
전대 백작이 사십 년 지기를 만날 때면 늘 이런 표정을 짓곤 했었다.
“그러게 오랜만이군.”
“아아…….”
손과 다리에 힘이 풀린다.
순간 현기증이 팍 하고 몰려온 에멀린이 바닥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그리고 금발 사내는 그런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선 웃는 얼굴로 안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로 놀랐네. 설마 거기서 자네가 나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
“그사이 진전이 있었나 보오. 축하하오.”
“고맙네. 모두 자네 덕분이야. 사실 나도 자네 소문은 익히 들었네. 조르디가에서 멋지게 한바탕한 모양이라지? 게다가 델-트로그 도적단을 섬멸한 것도 자네고, 심지어 광전사를 상대로 이겼다는 말도 있던데? 어때, 사실인가?”
한겨울의 눈도 금방 녹을 것 같은 훈훈한 분위기.
에멀린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그만뒀다. 그리고 마냥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건…… 꿈일 거야…….’
그렇지만 이것은 현실이었고, 둘의 대화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건 나중에 차차 얘기를 나눕시다. 저들과는 무슨 사이요? 당신과 검을 겨누는 상황은 나로서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닌데…….”
“거래 상대라고 할 수 있겠군. 참고로 요즘 나는 제국의 명을 받고 식량을 매입하러 다니고 있다네.”
“별 사이 아니라는 소리군.”
“그렇지.”
“그럼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소?”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나는 이 자리에 없던 걸로 해 줄 수 있겠나?”
“그러리다.”
그렇게 금발 사내가 에멀린을 그대로 지나쳐 방을 떠났다.
한 사람의 발소리가 그녀에게서 멀어진 이후, 다른 발소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뚜벅뚜벅.
그 발소리는 정확히 그녀의 무릎 앞 쪽에서 멈추었다.
에멀린은 위로 고개를 들었다.
금발 사내가 되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안톤이 위에서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군. 그나저나 이제 명확한 답이 나온 것 같은데…….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건가?”
정신이 바짝 드는 한 마디에 에멀린이 무너졌다.
더 이상 부릴 자존심은 그녀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어째선지는 모르지만 그는 아까부터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고, 이제는 그 기회를 잡아야만 할 때였다.
평생에 두 번은 없을 수치로 남겠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에멀린은 정말로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무릎을 꿇은 그녀가 흐느끼며 빌었다.
허나 이를 보는 안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대상이 틀렸다.”
살이 베일 듯한 차가운 목소리에 에멀린이 무릎을 꿇은 그대로 바닥을 기다시피 짐승처럼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레온의 앞까지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용서해 주세요. 제발…….”
그녀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이 순간의 굴욕이 너무나 서러워 자연스레 나온 것일 뿐, 진심으로 뉘우쳤기에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의 본심은 따로 있었다.
‘이 자리만 모면하면……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수치를 갚아 주마!’
어떻게 이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는 지금 그녀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저 끓어오르는 감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에멀린은 넘쳐흐르는 분노가 눈빛에 묻어 나올까 봐 절대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만을 바라봤다.
“레온. 네가 해라.”
도대체 뭘 하라는 것일까.
의문과 걱정이 동시에 피어났으나, 에멀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빌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이 들렸을 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무기가 필요하다면 빌려주지.”
아무리 그녀라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었으니까.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요?”
“아, 물론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 그냥 절망하고 애원하는 모습을 이 녀석에게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처음부터 사죄한다고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럴 수가…….”
레온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어떠한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저 손 안에 작은 무언가를 쥔 듯 주먹을 꽉 웅크리고 있었다.
“무기가 필요 없다니, 이거 참, 상상 이상으로 큰 원한을 쌓았던 모양이군. 그러니 누굴 탓하겠나.”
에멀린의 동공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들었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앞에 레온이 마주 보고 섰다.
에멀린은 눈을 감았다.
“으어어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온 어느 성난 검투사의 울부짖음과, 머지않아 관자놀이에서 전해지는 둔탁한 충격.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