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04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04화
104. 보상
“갑자기 직통으로 연락이 와서 뭔가 했는데……. 근데 뭐? 철수하라고?”
수정구를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리던 쟈카론이 눈빛을 달리했다.
“지금 나한테 명령이라도 하겠단 건가?”
정색하고 말하는 그를 보며, 아르토르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차피 쟈카론 님께서 하시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까? 이미 운명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혼자 힘만으론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이.”
“그 운명이 진짜라면, 나는 그때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난 지금 잘만 살아 있지.”
“도적단을 견제하기 위해 크렌디아에 파견되어 있던 광전사 가롱 센데벨. 그가 도적단의 토벌을 위해 안톤과 손을 잡았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근 시일 안에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흥! 그래서 내가 놈들에게 당하기라도 할 거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게 원래의 운명이었겠지요. 전 그런 운명을 바꾸고자 합니다.”
아르토르의 확언에 쟈카론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꼬리는 한쪽만 올라간 채 굳어 뒤틀려 있었다.
그를 아르토르가 능숙한 솜씨로 살살 달랬다.
“무력만 놓고 보자면, 쟈카론 님은 우리들 중에서 가장 강하지 않습니까?”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만을 얘기한다는 듯한 말투에 무안해진 쟈카론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눈을 피했다.
“그런……가? 음,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다마는…… 네가 그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대영웅에 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그를 한 번 물리치기도 했고 말입니다.”
“흠.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라.”
“지금 이곳에서 쟈카론 님을 잃는다면, 후에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를 상대하는 일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저로서는 완벽을 기하고 싶습니다.”
“완벽이라고?”
“아무리 거대한 운명의 소유자라도, 피하지 못할 막다른 길로 몰면 수가 없을 겁니다. 전력을 다해서, 단숨에 죽여야 하지요. 십인 위원회의 구성원 중 절반이 모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절반이라니, 지금 그만한 인원이 한곳에 모이기엔 다들 바쁜 걸로 아는데?”
쟈카론의 물음에 아르토르가 재빨리 대답했다.
“가르톤, 카트락시아, 로푸스 그리고 저까지 총 네 명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를 비울 수 있습니다.”
“흐음…….”
턱을 짚고 고민에 잠긴 쟈카론을 향해, 아르토르가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쟈카론 님께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흠흠! 전력으로 상대해야 한다라……. 확실히 일리가 있는 소리야. 당장 놈과 싸우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뭐, 어차피 슬슬 이 짓도 지루해져 가던 참이었으니까. 네 말을 따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르토르가 감격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쟈카론에게 보이지 않게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고방식이 단순무식한 쟈카론을 설득하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다.
* * *
휘이이잉.
사막의 건조한 바람이 세 사람의 인형을 스치고 지나간다.
“없군.”
“그러게요…….”
가롱의 말에 오르메넨이 말꼬리를 흐리며 턱을 짚었다.
그들의 시선은 아직까지도 둔덕 아래에 있는 오아시스 근처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가 잘못 찾아왔다거나 그런 건 역시 아니겠지?”
“이곳이 확실하오.”
델-트로그 도적단이 주둔해 있던 오아시스의 옆은, 고작 며칠 사이에 텅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되어 있었다.
“그럼 내가 오는 줄 알고 도망을 쳤나 보군.”
오만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가롱이었으나, 안톤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함정인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재 상황이 의아했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아무라 생각해도 그 호전적이던 인물이 자신들을 피해 도망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은 내려가서 살펴보는 게 좋겠어요. 혹시 무슨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오르메넨의 말을 따라 일행은 둔덕 아래로 내려가 주변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막사로 쓰였던 천의 조각이나, 피가 묻은 검 따위의 것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을 뿐,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단서는 없었으니까.
“완전히 해산한 것이 아닌 이상, 이 사막 어딘가에 있을 테지.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는 걸로 하세.”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그들은 원래 있던 크렌디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기다리며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봤다.
가롱과 안톤, 오르메넨. 이 셋이 다시 한자리에 모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병사들을 풀어 온 사막을 헤집고 다녔지만 놈들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악명 높던 델-트로그 도적단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 많던 인원이 어떻게 이리도 한순간에 종적이 묘연해질 수 있는지 의문일 정도로 흔적도 없이.
눈치가 비상한 몇몇 상인들은 벌써 사막을 횡단해 북상하고자 크렌디아로 모여들고 있을 정도였다.
“이제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도 사라졌으니, 나는 내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걸세.”
“탈로스로 돌아가는 것이오?”
“그렇지. 이제 자넨 어떻게 할 텐가?”
“나도 이만하고 돌아가야겠소. 혼자서 사막을 헤집고 다녀도 그들을 찾진 못할 거란 생각이 드는 데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 있는지라.”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오르메넨이 안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에반하임으로 가시나요?”
“일단은 그렇소만.”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선 세로게트에게 돌아가 이번 일의 경과를 알려 주고, 이후 그레일시아로 가서 카린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그럼 폐가 안 된다면 거기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요?”
조금 의외의 부탁에 안톤이 잠깐 고민했다.
탈티온을 데리고 있는 도적단에 대한 걸 깔끔히 정리한 것처럼 보이는 데다가, 숙부인 가롱 센데벨을 따라가거나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다고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도록 하시오.”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르메넨이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이 안건에 대해서는 미리 가롱과 이야기가 되어 있던 것인지, 그는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다른 언급은 없었다.
“그럼 이제 얘기는 다 끝났군. 먼저 일어나지.”
자리에서 일어난 가롱이 시원스럽게 걸음을 뻗어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방을 나서기 전.
“만약 일이 잘못되거나 있을 곳이 없게 된다면 언제든 내게 오거라, 오르메넨. 기다리고 있으마.”
“네. 고마워요, 숙부님.”
털컥.
문이 닫히고 가롱이 떠난 후.
굳이 더 지체할 것 없다고 생각한 안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준비해야 할 것이 더 없다면, 오늘 당장 출발하는 걸로 해도 좋겠소?”
“괜찮아요.”
“좋군. 그럼 갑시다.”
* * *
“밤 그림자.”
불철주야 질주한 안톤은 겨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에반하임에 도착했다. 이렇게 빨리 도착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는지, 오르메넨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이만 헤어지도록 합시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예전에 혼요종 무리들과 마찰이 있었던 곳으로, 길목을 따라 올라가면 혼요종들의 마을이 나오고 서쪽으로 산을 오르면 세로게트의 오두막이 나온다.
그리고 안톤이 가려 하는 곳은 마을이 아니라 세로게트의 오두막이다.
“혹시 마을까지 같이 가 주실 수는 없을까요?”
“무슨 문제가 있소?”
“그런 건 아니지만…….”
오르메넨이 잔뜩 주눅이 든 모습으로 말꼬리를 흐린다.
안톤은 그 모습에서 그녀의 감정 상태를 엿볼 수가 있었다.
‘당시의 그녀라고 보기엔 확실히 어리군.’
믿고 따르는 상관이었던 탈티온이 없어서일까. 그녀는 굉장히 심리적으로 불안해 보이고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러긴 어려울 것 같소. 저번에 말했듯이,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렇군요. 죄송해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그것을 끝으로 등을 돌리려는 찰나,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 안톤은 그녀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혼자라고 불안해할 것 없소.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시오.”
“알았어요.”
“그럼…….”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안톤은 산길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뛰어가니 산 정상에 이르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로게트는 오두막 앞의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게 왔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그를 보며, 안톤은 옆으로 다가가 바닥에 앉았다.
“내 부탁은 어떻게 됐는가?”
“도적단은 섬멸하지 못했소. 탈티온도 구해 내지 못했고.”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안톤은 사막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도적단을 더 추격하고 싶기는 하지만, 카린을 도와야 하기에 시간이 없다는 것까지.
“당신과 한 약속을 어긴 것이 됐기에 일단 경과를 말해 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여 이곳에 들른 것이오. 그럼 다 끝났으니 이만 가 보리다.”
할 말만 모두 마치고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안톤을 그가 붙잡았다.
“잠깐 기다리게. 부탁을 하면서, 자네가 돌아오면 강해지는 방법을 말해 주겠다 하지 않았던가.”
“나는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소.”
“그래도 그의 부관은 구해 내지 않았나? 게다가 결과적으로 사막을 가로막던 도적들이 사라지게도 했고.”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오.”
묵묵히 고개를 젓는 안톤을 보며 세로게트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내가 자네를 그곳으로 보낸 건 사막의 길목이 다시 뚫리길 원했기 때문일세. 그러니 자네는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뤄 주었고,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네.”
“방금 전에 말했듯, 내가 한 일이 아니오.”
“이거 참 상상 이상으로 답답한 친구였군.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명목상의 얘기라고 해도 처음부터 내기란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럼 이건 어떤가? 그냥 보상이 아니라, 호의라고 생각하는 건. 설마 이것도 싫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그러도록 하겠소.”
가르침을 주는 쪽이 애걸복걸하는 상황이라니. 입장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어 있었다.
뭔가 기분이 묘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잘된 일이다.
“자네는 더 강해져야만 하네.”
결국 세로게트의 숨은 의지마저 끌어낸 안톤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소. 본격적으로 수련을 하는 건 그레일시아에서 할 일을 끝낸 후여도 괜찮겠소?”
“그러고 싶다면 그러도록 하게나.”
그렇게 이제 막 세로게트와 헤어지기 직전.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던 안톤이 품속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검은 매 형상의 인장이었다.
“아, 혹시 이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알고 계시오?”
본인 입으로 5천 년을 넘게 살았다는 인물이니, 이것에 대한 것도 알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물건을 넘겨받고 잠시 요밀조밀 살펴보던 세로게트가 허허 웃음을 지었다.
“설마 이게 자네 손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이걸 도대체 어디서 찾았나?”
“조르디가에서 구했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고 있소?”
“알다마다. 원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인데 모를 리가 없지.”
“……그럼 돌려 드리겠소. 가져가시오.”
“뭔지도 묻지 않고 돌려주겠다는 건가?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는데, 자네는 정말 참 독특하군.”
“그래서, 안 가져가시오?”
무미건조한 안톤의 대꾸에 세로게트가 질린 듯 손을 저었다.
“됐네. 이건 자네가 가지고 있게나. 당장은 자네에게 더 필요할 것 같군.”
“필요하다니? 무슨 대단한 능력이라도 숨겨져 있는 거요? 예를 들면 그 전설같이…….”
“전설이라니?”
안톤은 타르티안에게 들었던 보영전의 전설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천하를 얻는다고? 누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군!”
“영문 모를 소리일랑 그만하고 어떤 용도인지나 말해 주시겠소?”
“아, 맞다. 자네 급한 일이 있다고 했지? 직접 사용해 보게. 그럼 이게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그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