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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9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6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99화

099. 구출

 

 

철창에서 나온 탈티온은 그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가 갇혀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주변에 있는 어떤 막사보다 크고 화려했다.

 

“크흣.”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강압적으로 무릎이 꿇려진 그는, 이내 우악스러운 손길로 인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자세가 되었다.

 

그런 자세에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투박한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발이었다.

 

“오랜만이군.”

 

탈티온은 목을 치켜들어 그 음성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의자가 꽉 차게 느껴질 만큼 거구인 사내가 그를 오만한 눈길로 내려 보고 있었다.

 

그 사내의 이름은 쟈카론.

 

겨우 1년 넘는 사이에 츠레이바 사막 북부지대에서 엄청난 악명을 떨친 델-트로그 도적단의 두목인 자였다.

 

“이렇게 빨리 길들여질 놈처럼은 안 보였는데, 뭔가 이유라도 있었나?”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물어 오는 그를 보며 탈티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흥미로운 장난감, 그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걸 그 한 마디를 통해 알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대결에서 패해 포로가 되었다고 한들.

 

이런 취급을 받고서는 인간으로서 자존감이 짓뭉개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길들인다는 그 표현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게 가장 분하다.

 

어쩌면 무인으로서 대결에서 진 것보다, 그 이후 감옥에서 여러 수모를 겪은 것보다도 더.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조건이 있다. 오르메넨을 치료한 뒤 고국으로 무사히 돌려보내라. 그게 내 조건이다.”

 

“과연……. 역시 그 계집 때문이었나? 그 꼿꼿하던 허리를 숙이게 된 것이. 뭐, 좋다! 나야 그런 이유 따위야 아무래도 좋으니. 자, 그럼!”

 

쟈카론이 의자에서 거구를 일으켰다.

 

유독 막사를 크게 지은 것이, 우두머리란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 키 때문이란 착각을 할 정도로 장대한 체격이었다.

 

“이제 슬슬 복종의 맹세를 해야지?”

 

“맹세……?”

 

당황한 얼굴로 되묻는 탈티온을 향해, 쟈카론은 말없이 오른쪽 발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대화는 없었으나 의사는 명백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지금 그가 말하는 복종의 맹세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순 없으리라.

 

‘뭘 망설이는 것이냐. 어차피 이곳에 오기 전에 각오하지 않았더냐!’

 

이윽고 눈을 질끈 감은 그가 턱 끝을 천천히 내렸다.

 

쟈카론의 발등을 향해서. 고작 몇 치 정도 고개를 움직이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동작이 매우 굼떴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허나 쟈카론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부들부들 떠는 그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실미소를 지으며 끝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탈티온의 입술이 그의 더러운 발에 닿는 순간.

 

쟈카론이 광인처럼 크게 대소했다.

 

“하하하하! 이거 참 볼만하군!”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영혼이 죽는 기분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때에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땐 차라리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되, 결코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리라고 여겼으니까.

 

근데 그런 그가 발등에 입맞춤까지 하면서 적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그것도 심지어 대의가 아니라 고작 사사로운 정 때문에.

 

‘누군가에겐 좋은 상관으로 남겠지만…… 이거 아무래도 난 성주로선 실격이군.’

 

남들 눈과 귀는 다 속여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

 

탈티온에게 있어 오르메넨은 깨물면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같이 사로잡힌 것이 평범한 병사였다면 그는 절대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약속을 지켜라.”

 

“복종의 맹세가 모두 끝난다면.”

 

“무슨 소리냐! 방금 끝마치지 않았느냐!”

 

“나야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네놈이 멋대로 한 짓 아니냐?”

 

능글맞은 쟈카론의 대꾸에 탈티온은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런 그를 향해 쟈카론이 보라색 단환을 하나 건넸다.

 

“자, 이걸 삼키고 마나를 운기해라. 그럼 끝이다.”

 

“정말 끝인가?”

 

“그래, 약속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단환.

 

신용할 수 없는 도적놈의 약속.

 

하지만 탈티온에게는 남은 방법이 없었다.

 

이내 최후의 망설임을 지운 그가 단환을 낚아챈 뒤 단번에 삼켰다.

 

꿀꺽.

 

단환은 조금 쓴맛이 났고 엄청나게 뜨거웠다.

 

마치 불꽃을 삼킨 것처럼 목이 타는 듯한 고통에 탈티온이 목을 부여잡았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쟈카론의 시선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이봐, 그럴 때가 아니야. 재빨리 마나를 운기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탈티온은 그의 말을 따라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나홀을 중심으로 마나가 전신 세맥을 순환하기 시작하자, 그보다도 훨씬 큰 고통이 찾아왔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불가한,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만약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그 계집을 죽이겠다. 살아 있는 동안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선사한 뒤 처참하게.”

 

탈티온은 그의 진심 어린 경고를 들으며 흐트러지던 정신을 다잡았다.

 

그렇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운기를 지속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 그 변화가 생긴 것은 마나홀, 즉 단전이었다. 모든 마나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기운이 그곳을 메웠다.

 

이종족들과 부딪칠 일이 많던 레노테이르 출신인 그는 이 새로운 기운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요력이었다.

 

‘어찌 이물들의 힘이 내 몸에…….’

 

이해할 시간도 없이 두 번째 변화가 찾아왔다. 그의 심장 부분에서 생긴 변화였다. 그의 심장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어느 이름 모를 짐승의 것처럼 그 형태가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왼쪽 가슴 상단이 터질 것처럼 아팠을 뿐, 탈티온은 단전이 변할 때처럼 그 변화를 눈치채진 못했다.

 

“크하하. 명인급의 종속인이라. 어떨지 실로 기대되는구나!”

 

가만히 서서 그의 변화를 지켜보던 쟈카론이 눈을 빛냈다.

 

탈티온이 무사히 두 번째 변화를 끝내고,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뇌의 변화.

 

복용자가 오러 마스터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여간 라트로이안. 그 늙은이가 맨날 골방에만 박혀 있더니 이번에 정말 멋진 물건을 만들어 냈어.”

 

정확히 말하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개량한 것이지만. 뭐, 사실 이쯤 되면 개량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겨우 블라디미르에 소속되길 원하는 외부 인간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던, 부가적으로 복용자가 소유한 마나를 요력으로 치환한다는 효능뿐이던 종속단을 궁극의 형태로 이끌어 냈으니까.

 

“뭐, 실패하면 죽는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부작용쯤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개량된 종속환의 효능은 월등했다.

 

일단 단순히 1:1 비율로 치환되던 요력의 양이 몇 배나 증가했고, 아르토르의 고유 능력인 지배의 힘을 섞어 넣어 애매한 충성이 아니라 완벽한 복종을 끌어낼 수 있게 됐다.

 

“만약 성공만 한다면, 이제 아르토르 그 재수 없는 자식에게 꿀릴 일도 없겠어.”

 

명인급의 종속인은 블라디미르 내부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아직 그 원인이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종속단의 실패율이 복용자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탓이다.

 

그렇기에 쟈카론은 탈티온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2단계의 변화를 쉽게 넘긴 데다가, 3단계의 변화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인간은 궁지에 몰아 놔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그러던 그때.

 

누군가가 막사의 천을 휙 걷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두목! 습격입니다! 인원은 한 명. 아무래도 명인급의 고수 같습니다.”

 

“한 명이라고? 지금 습격자는 어디 있지?”

 

콰콰콰카아아앙!

 

그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폭음과 진동이 전해졌다.

 

그가 있는 막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피어난 굉음이었다.

 

“벌써 이곳까지 왔나 보군? 뭐, 좋다. 안 그래도 딱 좋은 시기에 와 주었으니까.”

 

출입문을 바라보던 쟈카론이 등을 돌려 다시 탈티온을 바라보며 호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느냐, 탈티온?”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탈티온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로.

 

 

 

 

 

‘저곳인가.’

 

거대한 오아시스 옆에 위치한 델-트로그 도적단의 주둔지.

 

둔덕 위에 선 안톤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 그럼 저는 이제 풀어 주시는 겁니까?”

 

그는 사막을 종횡무진하던 중에 만난 도적단의 잡졸로, 머뭇머뭇 얘기를 꺼내면서도 불안한지 시도 때도 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안톤은 그의 물음을 듣자마자 아차 싶었다.

 

아, 지금까지 이런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구나.

 

그가 도적 무리들 중에 그만을 살려 둔 것은 단순히 길잡이로 삼기 위해서였고, 그 역할은 방금 끝이 났다.

 

그동안 안톤은 거짓말로라도 살려 주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역시 자신의 운명을 알고 순응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안톤이 고개를 저었다.

 

살고 싶다니.

 

이거 참, 도적놈 주제에 분에 넘치는 소망이 아닌가.

 

“그럴 리가 있나.”

 

안톤은 자신의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검을 휘둘러 그의 목숨을 끊었다. 그 행위에 망설임이란 일절 존재치 않았다.

 

자기 배 불릴 줄만 아는 귀족 놈들보다도 혐오하는 종자들이 바로 같은 양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도적놈들이었다.

 

이내 그에 관해서 완전히 신경을 끈 안톤이 다시금 언덕 아래의 주둔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상상 이상으로 몸집이 큰데?’

 

살펴본 그들의 모습은 도적단이라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유목민족에 가까웠다.

 

전리품처럼 약탈되어 가축 대접을 받는 여인들의 모습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안력을 키운 안톤은 이후 신안까지 개방했다.

 

막사 안에 있을 인물들까지 파악해 내기 위해서였다. 뭐, 마나가 아예 없는 일반인은 확인이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자들은 있으나 마나였기에 어차피 확인을 하나 마나다.

 

“흐음……. 그자는 이미 죽은 건가?”

 

대충 주둔지를 쭉 훑어보니 규모가 700~800명은 가뿐히 넘는다. 그러나 그중에 마스터급의 무인은 없었다.

 

그것은 도적단의 섬멸 외에 따로 구출 요청을 받은 탈티온 베니체른이 죽었거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군.”

 

안톤은 금세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세로게트도 구출에 대한 것은 여차하면 무시하라 했었다. 그러니 그냥 그러면 될 일이다. 안톤이 그와 따로 별다른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다른 것을 신경 쓰면서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적들이 아니다.’

 

아까 쭉 둘러본 대로, 이곳에 마스터급의 무인은 없었다.

 

다만 그와 비슷한 수준의, 아니 그 이상으로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는 자가 둘이나 존재한다.

 

‘요력이라……. 도대체 어디를 가든 블라디미르 놈들이 나타나는군.’

 

물론 요력이라는 것이 그들만의 대명사는 아니다.

 

혼요종은 아니지만, 아인종들과 화요종들도 그 힘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안톤은 그들의 정체가 블라디미르일 것이라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세로게트에게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가.

 

끊을 수 없는 질긴 악연의 끈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짧게 내쉬던 안톤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주둔지 중심부에 위치한 철창.

 

그 안에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쓰러진 것처럼 누워 있었다.

 

비록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그자와 함께 있었던 마법사군.’

 

그때 보았던 화사했던 금발과 깨끗했던 제복은 누더기처럼 변해 그 빛을 잃었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때도 느낀 거지만 굉장히 얼굴이 낯익다. 마치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허나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그냥 느낌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아무튼 갑자기 골치가 아파 왔다.

 

아예 처음부터 그녀를 보질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본 이상 이대로 모른 척하기에는 양심에 찔린 탓이다.

 

‘그래, 급할 것 없이 천천히 하자. 도적놈들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

 

그리고 대뜸 전면전을 벌이기보단 일단 적의 전력을 한 번 확인해 두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으리라.

 

안톤은 일단 도적단의 섬멸은 미뤄 두고, 여인부터 구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 그럼 가 볼까?’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지체할 것 없다.

 

안톤은 곧장 지면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었다. 둔덕의 높이와 안톤의 도약력이 합쳐지자 그의 몸은 단숨에 하늘 위로 치솟았다.

 

땅에 있는 인간들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높은 상공.

 

아마 그것은 지상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자의 눈에도 그리 보였으리라.

 

“저게 뭐지? 새인가?”

 

델-트로그 도적단의 외곽 경비를 맡고 있던 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문득 하늘을 보던 중에 목격된 검은 형체가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정도까지 좁혀진 거리.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사람이…… 떨어진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는 앞뒤 잴 것 없이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동료를 밀치며 바닥을 굴렀다.

 

“피, 피해!”

 

콰앙!

 

바닥에 쓰러진 채로 상체를 들어 올린 그는 황급히 자신이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그곳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제때 피하지 않았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지는 상황.

 

그러나 십년감수했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은 아직 일렀다.

 

구덩이 속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모래 먼지를 맞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육중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들고 미소까지 내지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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