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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9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3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93화

093. 의문

 

 

“다 됐으니 이제 눈을 떠도 괜찮소.”

 

안톤의 신호에 슬그머니 눈을 뜬 헤르시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처음 보는 남편의 처참한 모습에, 흘깃 바라본 것만으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후…….”

 

숨을 한 번 길게 내쉰 헤르시가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절단된 어깻죽지로 피가 철철 새어 나오는 지금, 그녀가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은 이대로 눈물만 흘리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헤르시의 손에서 피어난 순백의 마나가 절단면에 닿자, 서서히 피가 멎고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그러고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안톤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소. 힘들었을 텐데, 고생하셨소.”

 

치료를 끝마친 헤르시가 이마에 잔뜩 맺힌 땀을 소매로 한 번 쓱 닦아 냈다. 아직 사내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은 아니었으나, 더 이상은 그녀의 몸 상태로는 무리였다.

 

“도시까지 가는 동안에 잠이라도 좀 자면서 쉬고 계시오. 흔들려서 불편하면 도와 드리리다.”

 

“그럼 부탁할게요.”

 

다시 등에 사내를 업은 안톤은 헤르시의 혈도를 짚어 잠재웠다. 그리고 먼저 검을 빼 들고는, 나머지 손으로 헤르시를 품에 안았다.

 

“이거…… 아무래도 가는 길이 꽤나 귀찮아지겠는데.”

 

안톤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둡던 수풀 속에서 한 명의 사내가 소리 없이 나온다. 사내는 이런 숲 속이 아니라 성대한 연회에서나 어울릴 법한, 한껏 빼입은 정장 차림이었다.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안톤은 느닷없이 나타난 사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앞선 습격자 무리들에게선 느끼지 못했던 요력이, 정장 사내로부터 진득하게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요력의 힘만을 놓고 따져 본다면 카트락시아보다도 훨씬 강했다.

 

‘설마 이번에도 블라디미르가 연관되어 있는 건가?’

 

솔직히 안톤으로서는 요력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블라디미르밖에 없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참 진절머리 나는 인연이 아닐 수 없으리라.

 

“제가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금방 뵙겠다고.”

 

“너…… 아까 보았던 그 녀석이군.”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아르토르 카나이슬런. 혹시 당신의 이름도 알려 주시겠습니까?”

 

“거절하지.”

 

“하하. 꽤나 성격이 까칠하신 모양이군요.”

 

“잔말 말고 시작하는 게 어떤가? 어차피 용건은 하나일 텐데.”

 

안톤이 보란 듯이 검 끝을 그에게 겨누었지만, 아르토르는 그 행동을 무시하고 그대로 말을 이어 갔다.

 

“생각보다 저돌적이기도 하고…… 세로게트와는 영 딴판이군요. 그나저나 그는 잘 지내고 있던가요? 뭐, 질긴 목숨을 이어 가며 여전히 잘 지내고 있겠죠. 참 아쉽습니다. 그냥 죽어 주면 참 좋을 텐데.”

 

쉴 새 없이 말을 이어 가는 아르토르를 보며 안톤으로서도 깨닫는 것이 있었다.

 

‘이 녀석…… 무슨 꿍꿍이인진 몰라도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어.’

 

정확히 어떤 속셈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내어 줄 뿐이라고 판단한 안톤이 발을 박차고 나섰다.

 

“흐음. 정말 그 상태로 저와 싸우겠다는 건가요? 적어도 짊어지고 있는 그들은 수풀에 내려놓는 게 좋을 텐데요.”

 

아르토르의 말대로 안톤은 지금 전투하기에 적합한 자세는 아니었다. 등 뒤로는 사내를 동여매고 있었고, 앞에는 한쪽 팔로 헤르시를 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잃은 그 둘을 위험하게 아무 데나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주변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

 

한 번의 도약만으로 단숨에 아르토르의 앞에 착지한 안톤이 그대로 세찬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휫!

 

“천검술은 막는 것보다는 피하는 게 최선이죠. 뭐, 제대로 피한 것 같지는 않지만…….”

 

안톤은 재빠르게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아르토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내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속도였을 리는 없다. 그랬으면 완벽하게 피할 수 있었을 테니까. 공간이동 같은 능력인가?’

 

“아아. 역시 천검술에 의한 상처는 유독 아프네요. 이거 잘 낫지도 않는단 말이…… 흡!”

 

문답무용.

 

안톤은 그가 말을 끝마칠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금 도약해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 짧은 간극을 잘 재었는지, 그는 상처 없이 공간이동을 통해 그의 검을 피해 냈다.

 

“계속해서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을 거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만…… 다행히도 이제 그가 깼군요.”

 

“그게 무슨…… 읏!”

 

뚝.

 

안톤의 가슴팍으로 등을 관통한 검이 찔러져 나온다. 등 뒤에 업혀 있던 사내가 찌른 일검이었다.

 

“그러게 제가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려놓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나저나 그 거리에서 그걸 비껴 맞다니, 정말 이런 말은 내키지 않지만 초인적인 신체 능력이군요.”

 

안톤은 검에 찔린 즉시 등에 매고 있던 사내를 땅에 패대기쳐 버렸다. 적잖은 충격이 있었을 텐데도, 사내는 다시 정신을 잃은 것인지 미동조차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처음부터 연기였던 건가?”

 

그런 안톤의 물음에 아르토르가 쾌활하게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재미난 소리를 하시네요. 당신은 아예 생각지도 못한 변수인데, 미리 함정을 짜 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죠. 그러니까 표정 좀 푸세요. 적어도 배신당한 것은 아니니까요.”

 

“배신이 아니라면 네놈 짓이겠군.”

 

“제가 조금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말이죠.”

 

‘용의 현자의 정신 지배 같은 건가?’

 

안톤이 속으로 그런 추측이나 하고 있을 때, 아르토르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뒤춤에 매어져 있던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럼 이제 슬슬 제대로 시작해 볼까요……? 나와라! 병사들이여!”

 

호리병의 마개를 손끝으로 튕겨 내자, 호리병에서 검은색 안개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새어 나온 검은색 안개는 굉장히 불길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그것들은 스멀스멀 뭉쳐지더니 실체를 갖추었다.

 

“제가 그동안 수집한 악마의 영혼들이죠. 이들이 오늘 저를 대신해서 당신과 싸워 줄 겁니다.”

 

적어도 백은 일찍이 넘은 듯한 숫자의 위압스러운 군세.

 

아르토르가 그중 가장 가까이 있던 악마 하나를 쓰다듬었다. 적어도 4미터는 사뿐히 넘을 크기의 괴물이었다. 괴물은 마치 인간 병사들처럼 갑옷과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인 녀석들이니, 아마 실망하진 않을 겁니다.”

 

지금 씨익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안톤은 직감적으로 이번 전투가 어려워질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그럼 일단 이제 쓸모가 없어진 저 남자부터 죽여 볼까요?”

 

아르토르가 땅에 쓰러진 사내를 향해 손가락질하자, 괴물이 그를 해치기 위해 앞으로 튀어 나간다.

 

물론 안톤이 이를 지켜만 볼 리가 만무하다.

 

그오오오우!

 

숲가를 울리는 악마의 음습한 비명.

 

사내를 보호하는 안톤의 모습을 보며 아르토르는 감명 깊었는지 탄성을 내둘렀다.

 

“호오. 이제 보니 쓸모가 없지는 않겠군요.”

 

그가 재미난 걸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낸다.

 

안톤은 그 안광에 섞인 악독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골치가 아프군. 차라리 혼자였다면 편했을 텐데 말이야.’

 

그러나 자신의 친부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이 사내를 이대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거기에 발목이 잡혀 모든 일을 망쳐 버릴 생각도 없었지만.

 

‘최악의 경우엔 저 사내는 포기한다.’

 

냉정한 걸 넘어 매정하게까지 보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늘 최악을 가정하는, 전장에서 길러진 이 버릇은 안톤의 목숨을 수차례 구해 주었고,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해 주었다.

 

‘지금 내가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헤르시다.’

 

물론 둘 다 무사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의 상황일 터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현재 회임 중인 헤르시의 안위였다.

 

안톤은 하고 있던 생각에 맺음을 내지 않고 엄지발가락에 힘을 집중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곧장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헤르시를 안아 들고 있던 왼손에서 축축하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피?’

 

가장 먼저 피어난 의심이었다. 그것은 물이라기엔 너무 질척거렸고, 또 굉장히 뜨거웠으니까.

 

그러나 안톤은 금방 이것이 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젠장, 하필 이런 때.’

 

이것은 양수였다.

 

그리고 원래 배 속에서 태아를 보호하던 양수가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단 한 가지 의미밖에 없었다.

 

바로 출산의 시기가 코앞까지 임박했다는 것.

 

‘시기가 좋지 않아도 이건 너무 좋지 않은데…….’

 

안톤은 슬그머니 아르토르를 살폈다.

 

낌새를 보아하니 아직은 양수가 터진 사실은 모르는 듯 보였다.

 

“어쩔 수 없나.”

 

안톤의 중얼거림에 아르토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무슨 뜻이죠?”

 

“아르토르라고 했나? 당신은 사람을 잘못 봤어.”

 

“그게 무슨 소리…….”

 

솨아아아앙!

 

원뿔 반경으로 검격을 날린 안톤이, 그대로 아르토르를 향해 날아들었다.

 

“읏……!”

 

아르토르는 이번에도 역시 공간이동을 통해 자리에서 사라졌고, 안톤의 검은 허공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분명 닿았다.’

 

안톤은 망설임 없이 다시 한 번 자리를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졌다. 아르토르가 공간이동을 막 끝마친 그 자리였다.

 

이번엔 아까와 다르게 수풀 쪽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그는, 안톤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찾아내 달려들자 놀라는 모습이었다.

 

휘이익!

 

‘이번엔 빗나갔군.’

 

안톤이 확 하고 등을 돌렸다.

 

그로부터 30미터 정도 떨어진 정면에 아르토르가 우측 허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저 사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겁니까?”

 

“그래. 양손에 모든 걸 쥘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하하! 그렇군요. 그래도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부터 일단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이봐라! 저 바닥에 있는 놈부터 해치워라!”

 

아르토르의 호리병에서 소환된 악마 병사들 중 일부가 정신을 잃은 사내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안톤이 그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역시 그럼 그렇지.”

 

그 모습을 보며 아르토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둘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앞서 한 말은 모두 허세였던 것이다.

 

스윽.

 

“……어?”

 

뒤늦게, 검이 자신의 가슴 상단을 찌르고 지나가고 나서야 아르토르는 자신의 생각이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방심했군.”

 

안톤은 아르토르에게서 시선을 고정시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껏 예민해진 귓가로 실시간 전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우적우적우적.

 

살이 짓뭉개지고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

 

턱에 힘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이가 어긋나는 소리가 안톤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에 후회하지 마라.’

 

안톤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며,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장 위에 턱 하고 올려진 듯한 이 무언가의 무게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정말 별 사이가 아니었던 건가요? 이런…… 내 감이 틀릴 줄이야.”

 

듣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후의 순간에 남기는 유언처럼 들리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하다는 느낌이 떨쳐지지가 않을까.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신경을 떼지 않고 있던 안톤은, 아르토르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빠르게 반응했다.

 

‘저건……!’

 

아르토르가 손에 집은 무언가를 입으로 넣고 있었다. 그것은 회색의 단환으로, 카트락시아가 괴물처럼 변할 때마다 꼭 삼켰던 그것이었다.

 

‘역시 블라디미르의 일원이었나!’

 

서둘러 막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치솟아, 아르토르에게 박혀 있던 검을 빼내려 한 안톤이었지만 검은 쉽게 뽑혀 나오지 않았다. 왜인가 했더니 아르토르가 맨손으로 검날을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왼손만 자유로웠다면……!’

 

헤르시를 안고 있느라 마음대로 쓸 수 없는 한쪽 팔의 부재가 크게 다가온다.

 

일단 쥐고 있던 검을 놓고 그 손으로 아르토르를 막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이미 늦은 때였다.

 

아그작.

 

아르토르의 목줄기로 단환이 완전히 삼켜지고, 동시에 검을 잡고 있던 악력도 풀어진다. 이렇게 가까이 있다간 헤르시가 다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안톤은 곧장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그를 지켜봤다.

 

단약을 먹고 곧장 외형적인 변화가 피어나던 카트락시아와는 다르게, 아르토르에게선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저 그의 몸에서 불길한 느낌의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났을 뿐이다.

 

‘악연이 있다면 분명 이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적이 블라디미르라는 사실이 판명 나자 잠재되어 있던 적의가 들끓는다.

 

본능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더욱 가해졌지만, 안톤은 헤르시의 앓는 듯한 신음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렸다.

 

“으흣…….”

 

무엇이 가장 우선인지, 한순간에 감정에 휩쓸려 망각할 정도로 안톤은 미련하지 않았다.

 

점혈을 짚어 강제적으로 잠에 들었던 헤르시가, 양수가 터진 일 때문인지 벌써 깨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출산을 할 만한 적당한 장소가 필요해.’

 

안톤은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며 미동도 없는 아르토르를 내버려 두고,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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