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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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92화
092. 치유
“적이…… 아니라고?”
“그렇소! 돌을 날려 적들의 위험을 미리 경고한 것도 나요.”
안톤은 태연하게 거짓의 말을 내뱉었다.
사실 돌을 던진 행위는 앞서 말한 이유가 아니었으나, 어차피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던가.
거짓말 자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안톤이지만, 일단 당장은 사내의 경계심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게 우선이었다.
“…….”
2층 창가의 붉은 머리의 사내는 말없이 미간을 좁혀 안톤을 노려본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하기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역시 두 눈이 있다면 안톤이 자신을 구해 줬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습조차 숨긴 낯선 이방인을 완전히 신뢰할 근거는 되어 주지 않으니까.
“왜 우릴 도와주셨소?”
사내가 굳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피어났을 의문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떤 대답이 가장 적절할까. 짧은 시간 동안 무수한 선택지를 떠올렸던 안톤이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보여 주는 게 가장 빠르겠지.’
스륵.
안톤이 내내 머리를 덮고 있던 후드를 걷어 올리자, 그의 붉은 머리와 회색 눈이 드러난다. 그것을 본 사내는 처음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이윽고 사내의 눈에는 한층 경계의 빛이 어린다.
“당신은 누구지?”
총인원이 백 명도 되지 않는 소규모의 일족이다. 사내는 구성원들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모두 외웠다. 게다가 일족에서도 많지 않은 젊은 사람들임에야, 헷갈릴 일도 없다.
사내로서는 자신을 속이기 위해 안톤이 마법을 써서 모습을 바꿨다는 것이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지리라.
사내가 슬그머니 마음의 준비를 하며 안톤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경계하며 주시하는 순간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폭주하던 마나를 진정시키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은 아니에요.”
과연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것일까. 여인은 이미 사내가 속에서 하고 있었을 의심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톤은 이때다 싶어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고아로 태어났소.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회색 눈의 일족에 대해 말을 해 주더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을 찾는 중이었는데, 당신들을 보았고 그래서 도왔소. 혹여나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당신들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소.”
“우연이라고?”
“그렇소. 만약 그때 당신들이 계단을 내려오지 않았고, 스치듯 지나간 당신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그대로 여관 밖으로 나갔을 테니까.”
“……그렇군. 그렇다면 다행…….”
사내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다리의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몸의 균형을 잃고 창문 너머로 쓰러진 것이다.
“여보!”
안톤은 쏜살같이 앞으로 튕겨져 나와 떨어지는 사내의 몸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그리고 곧장 사내의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딱히 눈에 띄는 상처는 보이지 않는데…….’
안도 어린 표정으로 정신을 잃은 사내를 바라보던 안톤이 그의 어깨 부분의 옷을 거칠게 뜯어냈다. 비록 스치듯 난 상처였지만 검에 의한 자상이 실금처럼 나 있었고, 그 주변이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독이군.”
“당장 내 남편에게서 떨어져요!”
안톤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1층으로 내려온 여인이, 안톤을 향해 손을 내뻗고 있었다. 굳이 신안을 통해 손에 맺힌 마나를 보지 않더라도, 그녀가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끝마쳤다는 건 누군들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오. 독에 당했소.”
“내 말 안 들려요?”
여인의 손에서 잔불꽃이 치솟는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실력 행사를 하겠다는 위협이었지만, 정작 그녀의 손 마디마디는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겠소. 일단 물러나리다.”
안톤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여인은 안톤을 경계하면서도 조심스레 사내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플런, 조금만 참아요. 내가 고쳐 줄게요.”
마나를 잔뜩 머금은 여인의 손이 사내의 상처 부위에 닿자, 갈라져 있던 피부가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한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주변을 샅샅이 살피던 안톤이 입을 열었다.
“소란 탓인지 마을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중인데, 일단 자리를 뜨는 건 어떻겠소? 이런 사건에 연루되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오.”
“…….”
여인은 말없이 안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은 없었으나, 안톤은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엄청난 갈등이 일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안톤은 그녀의 선택을 돕기 위해 쐐기를 박았다.
“믿어 보시오. 결코 당신들을 해치려는 게 아니오.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지 않겠소? 내가 당신들을 도울 수 있게 해 주시오.”
“……한번 당신을 믿어 볼게요.”
“쿨럭쿨럭!”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사내가 거칠게 기침을 토해 내며 눈을 뜨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표정한 여인이 다가온다.
“아르토르 님, 괜찮으십니까?”
사내는 여인의 손길을 마다하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내지었다.
“고작 분신체 하나가 죽은 건데,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요.”
그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고서야 여인의 눈길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단 걸 알아챘다.
“그나저나 살리첸,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표정이 좋지가 않습니다.”
“……상처에서 피가 나고 있습니다.”
“상처……?”
아르토르는 문득 자신의 목 언저리를 쓱 어루만졌다. 그러자 손끝으로 질척이면서 뜨겁기도 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손에서 묻어난 피를 바라본 그는 잠시 의아한 표정일 짓더니, 이윽고 표정이 굳었다.
“하하.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면 될까요?”
이게 과연 도대체 얼마 만의 상처일까. 사내는 이렇게 피를 본 기억이 정말 까마득할 정도였다.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여인이 한 걸음 더 아르토르에게 다가갔다.
상처는 그렇게 깊지 않았으나, 피는 멎을 기미 없이 계속 주룩주룩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 상처쯤이야 살리첸의 도움 없이도 금방 나을 테니까.”
“그래도…….”
“살리첸, 제가 두 번 말해 드려야 하나요?”
묘하게 음의 높낮이가 낮아진 물음에 여인이 황급히 아르토르의 몸에서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아르토르의 말대로, 일말의 시간이 조금 더 지나가자 상처에서 피가 멎었다. 그는 슬며시 턱 근처를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흉터는 남겠는데요? 하하. 갑자기 흥미진진해지네요.”
비록 입은 웃고 있었으나, 아르토르의 눈에서는 무서울 만치 서늘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를 산맥은 안 돼요. 다른 곳으로, 아니 카라진으로 가요.”
“카라진이 어디요?”
“카라진은 이쪽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도시예요. 워낙 외부인들이 많은 도시이니 눈에 덜 띌 거예요.”
안톤은 여인의 말을 따라 동쪽으로 한참을 달리기 시작했다. 사내를 업고 여인을 안고 달리는데도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느닷없이 쏘아진 질문에 여인은 대답하는 걸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이름을 알려 주었다.
“……헤르시 델로난.”
헤르시 델로난.
안톤은 그 이름을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만 발음해 보았다. 뭔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묘하게 가슴이 먹먹해진달까.
어쩌면 안톤이 항상 부모를 원망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당신은요?”
“안톤이오. 아까 말했듯 고아인지라 성은 없지.”
혹시 자신이 물려받았을지도 모르는 저 사내의 성은 무엇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진 안톤이었지만, 그 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사내가 깨어나면 그때 직접 물어봐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렇군요. 아무튼 아까는 너무 갑작스럽고 흥분해서 인사가 늦었네요. 구해 줘서 고마워요.”
“괜찮소. 그런 상황이었으면 나라도 그럴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오.”
천으로 묶어서 등에 업은 사내와 달리, 배가 볼록한 헤르시는 안톤의 두 팔에 안겨 있었다. 안톤으로서는 고개만 살짝 아래로 내려도, 헤르시의 얼굴이 보이는 상황.
헤르시는 이런 상황이 조금 멋쩍었는지,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이 속도면 날이 밝기 전에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나저나 조금 뜬금없고 외람된 질문이지만……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겠소?”
“해 보세요.”
헤르시의 즉각적인 승낙에 안톤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오?”
“어떻게 생각하냐니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단 얼굴로 되묻는 헤르시의 반문에, 안톤이 말을 더듬으며 재차 물었다.
“아, 아니, 혹시 원망이라든가 그런 걸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아니, 당신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묻는 거요.”
이렇게 두서없이 말을 더듬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방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고 기괴하게 보였을지 상상해 본 안톤이 한숨을 내리쉬었다.
다만 다행인 점은, 헤르시가 안톤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고선 군말 없이 대답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배 속의 이 아이를 사랑하냐고 묻고 싶은 거였군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제 아이를 사랑해요.”
헤르시가 자신의 배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는다. 그것은 영락없이 어서 아이가 세상에 나오길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렇군. 이상한 질문을 해서 미안하오.”
“괜찮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당신 사정이랑 관련되어 있는 것, 그런 거 맞죠?”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군.”
그리 길게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닐진대, 안톤은 헤르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첫 모습에서는 위기일발의 상황이라 경황이 없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 남자도 꽤나 책임감 있고 희생적일 것 같았지…….’
안톤은 만약 자신이 이들 부부 아래서 제대로 자랐다면 어떻게 성장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상상 속의 모습은 안톤이 평소 머릿속에 그리던 이상과 다름이 없었다.
바라고 바라던, 꿈에서나 겨우 그리던 화목한 가정.
어쩌면 그것이 자신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안톤은 누군가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될 수가 없었던 걸까.
그 의문만이 안톤의 뇌리를 가득 채워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근데 만약에…… 당신이 그 사랑하는 아이를 노예로 만들어서 상인에게 팔아야 한다면, 그건 도대체 어떤 상황 때문일 것 같소?”
“……무슨 질문이 그래요?”
“내 질문이 이상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렇지만 대답해 줄 수 없겠소?”
자신에겐 둘도 없는 중요한 질문이라는 듯, 진지한 안톤의 표정에 헤르시가 굴복했다. 그녀는 대답을 해 주면서도 상당히 떨떠름해 보였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정말 그래야만 했다면…… 그랬다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겠죠. 아이를 살리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다든가 하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려. 아무튼 이런 질문들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어서 정말 고맙소.”
그 이후로 둘은 마땅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헤르시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안톤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 추적자들 때문에 무슨 일이 생겼던 것 같군.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을 거야.’
-아이야, 너는 살아야 한단다.
-명심해요. 이 아이는 대역죄인이에요. 무슨 일이 벌어지건 절대 죽게 해선 안 돼요. 알겠어요?
안톤은 기억 속 세계에서 헤르시가 자신에게 했던 한마디와, 그녀가 노예 상인에게 했던 한 마디를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럼과 동시에, 오랜 시간 마음 속 깊은 곳에 담아 두었던 부모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희석되어 간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원망이 쌓이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왜…… 나는 이들을 지켜 내지 못한 거지……?’
조르디가에서의 전쟁 이후, 신안을 개방한 안톤은 강해졌다.
일대일 상황에서 온-누르에게 치명상을 입힌 카트락시아를 단칼에 베어 냈고, 검성이라 불리는 가우스트조차 안톤을 인정했다.
아직 조르디가 내에서만 서서히 퍼져 가는 소문이었지만, 그러면서 검신이라는 위명도 얻었다.
‘그보다 더한 적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아까 복면인이 죽으며 남긴 말을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안톤이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등 뒤가 뜨거운데…….’
안톤은 세차게 달리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곤 우선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헤르시를 내려 두고, 등에 업고 있던 사내를 바닥에 눕혔다.
“엄청난 고열이군.”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사내의 몸은 끓는 물처럼 후끈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숨소리도 불규칙적이면서 거칠었고 말이다.
헤르시가 후다닥 사내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 부위를 살폈다.
칼에 베인 상처는 그녀의 마법으로 이미 아문 지 오래였으나, 피부 가죽 위로 새겨진 푸르스름한 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니, 천 위로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더 넓게 퍼져 있었다.
“해독 마법이 듣질 않았어요. 지금쯤 다 나았어야 하는데…….”
그러나 낫기는커녕 더 악화된 상황.
이대로라면 남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헤르시의 목소리가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진정하시오. 일단 도시로 가서 치유사를 구해 봅시다.”
“그때까지 그가 버텨 줄 수가 있을까요?”
“강인한 남자처럼 보였으니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것이오.”
이것은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 남자라면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는 명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다만 안톤이 걱정되는 것은 따로 있었고, 그는 지금 그 사실을 미리 말해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톤의 그런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헤르시가 그를 채근하고 나섰다.
“뭔가 할 말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해 주세요.”
“만약 도시로 가서도 해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면 큰일이오. 그때는 이미 독이 몸으로 퍼져 나가 손쓰기엔 늦은 상황일 테니.”
“지금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안톤은 사내의 상태를 보자마자 딱 떠올랐던 방법이 있었다. 옛날에 군대에 있던 시절에 꽤나 쓸 일이 빈번했던 그 방법이었다.
“있기는 한데…….”
안톤이 난감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린다. 그 방법이란 것이, 아내라는 사람에게 설명해 주기엔 너무나 단순무식하며 과격했기 때문이다.
“말해 주세요.”
남편이 쓰러진 상황에서도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는 여인을 보며 안톤은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그냥 듣기만 하시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독이 몸으로 퍼지기 전에 팔을 잘라 내는 것이오. 다행히 아직 독이 어깨 너머까지 퍼지진 않았으니, 목숨은 확실히 건질 수 있겠지. 게다가 독이 아니라 지혈과 치료는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고.”
말을 마치고 나서 안톤은 어째선지 헤르시의 눈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사내는 검사였으며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으니까.
검사에게 있어 팔 한 짝의 부재는 크게 다가온다. 한 손으로만 검을 써야 한다는 것 외에도, 일단 몸의 균형이 완전히 틀어져 버리는 것이다. 재활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데만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그 팔이 주로 쓰는 팔이라면 그 기간은 몇 배는 더 늘어난다.
헤르시 또한 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해도 남편의 팔을 자르는데 아무렇지 않을 여인은 없을 것이다.
“해 주세요.”
그렇기에 선뜻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는 헤르시를 보고 안톤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제안한 방법을 따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괜찮겠소?”
“그라면 이해해 줄 거예요. 내 아이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울 순 없어요.”
“그럼 그러리다. 잠깐 저쪽을 보고 있는 건 어떻겠소?”
“괜찮아요. 어차피 이후에 치료를 하려면 보기 싫어도 봐야만 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아이까지 있는데, 그럼 딱 그때만이라도 눈을 감고 계시오.”
“알았어요.”
그렇게 헤르시가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소리 없이 휘둘러진 안톤의 검이 매끈한 곡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