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7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9화
079. 경고
가주를 위한 상석엔 가우스트가 앉아 있었고, 장로들을 위한 열두 좌석에는 은퇴했던 원로들이 자리했다.
그들은 가문의 대소사를 논하느라 쉴 새 없이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똑똑.
그때 가주전 출입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그로 인해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혹시나 이럴까 싶어 미리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방해치 말라고 일러두었거늘.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던 가넌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무슨 일이더냐?”
가넌의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 있었다.
물론 어지간한 일이라는 명제가 있긴 했지만, 실상은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게, 가문을 재건하기 위한 안건을 나누는 이 자리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 그게, 가주님을 뵙길 원하는 자가 있어서…….”
문 너머로 들려온 경비의 목소리에 가넌의 심기는 더 불편해졌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당장은 나름 좋게 타일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돌아가라 전하거라.”
“그래도 아주 중요한 분이신지라…….”
“방금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더냐!”
“알겠습니다.”
이 자리가 끝나면 저 얼빵한 경비에게 단단히 혼쭐을 내 주고 말리라.
작게 한숨을 내쉰 가넌은 다시 장중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아니, 이어 가려 했다.
“아, 그래서 제가 어디까지 말했지요?”
그 순간 덜컥하며 가주전의 문이 열렸다.
“이놈이 내 말을 뭘로 듣고…….”
휙 고개를 젖힌 가넌의 얼굴은 금방 당혹으로 물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예의 경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윽고 사내의 정체를 알아챈 가넌의 눈이 커졌다.
“엇, 너는 설마…….”
타오르는 듯 시뻘건 머리색에 북부인들 특유의 하얀 피부.
그리고 등 뒤로 맨 거대한 대검.
근래 들어 가장 유명한 이 인물을 그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안톤.
조르디가를 구한 영웅이자, 검신이란 무호와 함께 젊은 검사들 사이에서 우상시되는 불세출의 무인.
그러니까 젊은 경비도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방문을 알렸을 테지.
가넌은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애송이를 나보다 우선시해?’
가넌은 우선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자신을 제외한 열한 명의 장로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동일했다. 바로 안톤이 저지른 가주전 난입에 대한 무례에 그러려니 하는 눈치라는 것.
‘저까짓 놈이 대체 뭐라고…….’
가넌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작은 명성을 얻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장중하고도 근엄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진다.
겉보기에 그는 매우 노기 어린 얼굴이었으나, 사실 지금 그는 그렇게까지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안톤이 저자세로 먼저 사과하고 나서면, 그땐 가넌도 한 걸음 물러나 줄 생각이었다. 그게 그의 예상이기도 했고.
다만 그가 간과한 것은 상황이 언제나 예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안톤은 무표정한 얼굴로 장로들을 쓱 바라보며 이렇게 통보했다.
“무례를 저지른 김에 한 번 더 저지르도록 하겠소이다. 검성과 할 말이 있으니 모두 나가 주시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가넌이 뒤늦게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자신과 똑같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지금 장로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은 가우스트와 시대를 공유했던 원로들이다.
다들 적어도 예순은 넘은 나이였고, 모두가 젊었을 때부터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근데 그들이 살아오며 면전에서 이런 말을 내뱉는 이가 언제 있었겠는가.
“이 젊은 놈이!”
이제는 진심으로 화가 난 가넌이 손을 검병 위로 올렸다.
그렇지만 그는 검을 뽑아내진 못했다. 이성이 아니라 본능 때문이었다.
평소에 하던 대로 어서 저 무뢰배에게 교훈을 내리라는 이성과는 반대로, 검을 휘두르면 위험하다는 본능이 몸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베인다.’
움직이는 순간 목이 땅에 떨어질 것 같은 기묘한 감각.
피부가 곤두서고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린다.
그렇게 몸이 굳어 있던 때.
안톤이 그를 향해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뽑을 테요?”
안톤의 입가에는 자그마한 실미소가 하나 그려져 있었고, 가넌은 그 미소의 의미를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무시하는 건가! 감히 나를?’
수치와 모멸감에 몸이 바르르 떨린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르고 싶다.
허나 바위처럼 굳은 몸은 도무지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가넌은 안톤이 그에게 다가와 스쳐 지나갈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잘 생각했소. 나가는 문은 저쪽이라오.”
가넌은 겨우겨우 목을 돌려 가우스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 해답을 기다리는 듯했고, 이는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가우스트는 한숨을 크게 푹 내쉬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는 걸로 합시다.”
그의 말에 장로들은 못 이기는 척 하나 둘 일어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한적해진 가주전.
가우스트는 여전히 상석에 앉아 있었고, 안톤은 가만히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 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가우스트였다.
“기다리고 있었네. 당장에라도 찾아올 것 같더니, 꽤나 오래 걸렸군?”
“차분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말이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다시 묻겠네. 그날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넬, 그 아이는 왜 나를 피하며, 자넨 또 왜 이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구는 거지? 설명해 주겠나?”
직설적으로 사건의 경위를 묻는 가우스트를 보며, 안톤은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한가 보군.’
끝까지 발뺌을 할 게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을 털어놨으면 조금 덜 구차해 보였을 것을.
역시 믿을 만한 인물은 못 된다는 판단이 내려진다. 안톤은 거리낌 없이 솔직한 감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첫 대면부터 느꼈지만 당신도 참 뻔뻔한 사람이군.”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해 주겠나?”
가우스트는 예상했던 대로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나왔다.
어찌나 연기가 자연스러웠는지, 설마 군주의 자질에 연기 항목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안톤은 떨림 없는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을 해 주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소.”
“뭔가?”
“그냥 닥치고 내 말만 들으라는 것. 어차피 당신은 끝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굴욕스러운 언사에 가우스트의 얼굴색이 어두워진다.
허나 그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알았으니, 일단 말해 보겠나?”
“당신이 지금 가장 궁금한 건 계약이 어떻게 끝났는가에 대한 것이겠지? 근데 아쉽게도 그게 제대로 성사됐는지는 나 역시 알 수 없소.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 내가 검령을 베어 버렸으니까.”
가우스트는 검령의 존재를 알지만, 이를 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베어 버렸다고?
그의 얼굴에 경악이 피어났지만, 안톤은 그가 놀라건 말건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곳에서 당신의 진짜 계획이 뭔지 알게 됐소.”
“진짜 계획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아까 내가 말한 조건을 벌써 까먹으셨소?”
“…….”
가우스트가 약속대로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안톤이 더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그게 뭔지 알고 있는데,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하고 싶진 않군. 그러니 일단은 계속 들으시오. 계약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검령은 죽기 전에 나보고 검이 될 거라는 유언을 남겼소. 이게 뭔 뜻인지는 아마도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으니, 이것 또한 가타부타 설명은 않겠소.”
안톤의 말이 일단락 지어지자, 가우스트는 안톤이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 그 아이가 맘에 걸려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구나. 설마 내가 내 손으로 손녀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조건을 벌써 까먹은 것이오?”
“어차피 들을 건 다 들었는데, 내가 왜 계속 그딴 바보 같은 짓거리에 어울려 줘야 하지?”
안톤의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들에도 평상심이 유지되던 가우스트의 눈빛에 불이 켜졌다. 아무래도 이제 가식은 벗어던지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덜 역겨운 얼굴이 됐군.”
“닥치고 원하는 걸 말하기나 해라.”
“린디아스 공녀를 건드리지 마시오.”
“지금 내가 여기서 알겠다고 하면 믿겠느냐?”
“그럴 리가. 당신의 말 따위를 믿을 만큼 순진치는 않소.”
“그럼 어쩌자는 게냐? 뚱딴지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똑바로 말해라.”
“내가 믿는 건 이거요.”
안톤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등 부분을 가리켰다.
정확히 말해서 등에 매어진 대검을 말한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말이었다.
가우스트에게서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 앞에서 그러는 놈은 네가 처음이라 그런지, 이거 참 신선하구나.”
가우스트가 감탄하건 말건, 안톤은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지만, 내가 없는 동안에도 딱 하나 명심하고 사시오.”
“…….”
“나는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것이고, 그때 공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면 조르디가를 박살 내 버릴 생각이란 걸. 피가 얼마나 흐르든, 맹세코 그땐 이 치졸한 가문을 끝장내 버리겠소.”
“……오만하구나.”
“자신감이라고 해 주시오. 나는 더 강해질 거니까.”
“내겐 더 싹이 트기 전에 해치우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혹시 그럴까 싶어 검도 챙겨 왔지. 그럼, 뽑을 테요?”
아까 장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가우스트에게까지 하는 안톤이었다.
가우스트는 입을 다물고 안톤을 노려보았고, 안톤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윽고 속에서 결정을 내렸는지, 가우스트가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됐다. 내가 그 아이를 건드릴 리가 없지 않느냐.”
“잘 생각했소.”
“그래……. 아무래도 이야기는 끝난 듯싶군. 나가는 문은 저쪽이라네.”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모습에, 안톤이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려던 차, 마지막으로 해 줄 말이 떠올라 다시 가우스트를 향해 돌아섰다.
“내가 당신이라면 넬을 애지중지 아끼며 키워 보겠소. 혹시 그녀가 만수를 누리고 조르디가에서 눈을 감는다면, 제단이 생길지도 모르는 거 아니오?”
“아까는 그럴 일 없을 것 같다더니?”
“그거야 검령이 그런 말을 한 거지. 부디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길 바라오. 헤스갈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이 빌어먹을 가문이 전부이지 않소? 작은 걸 위해, 큰 걸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거라 믿소. 당신이라면.”
* * *
안톤이 지내고 있는 별원에는 작은 뜰이 하나 있다.
봄이면 꽃이 만개하여 그윽한 향취를 뽐내고, 가을이면 단풍이 바닥을 덮는 운치 가득한 장소다.
평소 셋이서 식사를 마치고 함께 이곳에서 차를 마시곤 했는데, 오늘은 온-누르가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둘뿐이었다.
린디아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곧 이곳에도 다시 꽃이 피겠네요.”
그제야 안톤도 앙상한 화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최근 날씨가 많이 풀렸다 싶었는데, 벌써 가지 위로 싹이 트고 있다.
“겨울도 끝나 가는구려.”
안톤도 중얼거리듯 대답을 했고, 그게 끝이었다.
둘은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 화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안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떠나려고 하오.”
그러나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는다.
조용히 꾹 입술을 깨물던 린디아스는 고개를 푹 숙였고, 다시 안톤을 향해 시선을 던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나도 데려가 줄 수 있어요?”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소?”
“글쎄요. 그게 어디든 상관없어요.”
자신과 함께라면, 일까. 아니면 그게 말 그대로 이곳만 아니면 된다는 것일까.
처연한 눈빛의 린디아스를 보며, 안톤은 그 말의 의미가 후자라고 생각했다.
“검성이라면 걱정 마시오. 이미 다 손을 써 두었으니, 결코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요.”
그리고 그 생각은 린디아스의 대답을 들으며 확신으로 변했다.
“그것참…… 고맙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뭔가 미묘하긴 했지만, 분명 감사의 말을 전한 것이다.
뭔가 석연찮은 찜찜함이 자리했지만, 안톤은 꿋꿋이 처음부터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그러니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삶을 사시오.”
“당신은요?”
“물론 나도 앞으로 그럴 생각이오.”
“……그렇군요. 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일은 없겠죠?”
“그럴 리가. 아마 살면서 몇 번은 오지 않을까 싶소. 게다가 스승님도 이곳에 계시지 않소?”
게다가 검성과의 약속이 잘 지켜졌나도 확인을 해 봐야 하니 살면서 한 번은 반드시 와야 할 테고 말이다.
그런데 뭔가 말실수라도 한 것일까.
린디아스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휙 하고 돌린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요?”
“아뇨. 아무것도.”
“근데 왜 갑자기 그러고 있소?”
“그냥요. 석양이 너무 예뻐서. 그래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안톤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린디아스가 도중에 끊으며 다급하게 말한 것이다.
“아, 그럼 이만 가 보세요.”
“갑자기 어딜 가라는 말씀이시오?”
“누르 공한테도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에요? 내일 떠난다는 거.”
“그거야 천천히 가도 상관없는 일이오만…….”
“어서요…….”
간곡하게 들리는 그녀의 말에 안톤도 더 고집을 피울 순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안톤은 뜰을 떠나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린디아스는 여전히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