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7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8화
078. 비밀
“검은 매? 그게 무슨 소리요?”
안톤은 영문 모를 얼굴로 되물었지만, 타르티안은 웃는 얼굴로 대답을 피하고 쪽지 하나를 안톤에게 주며 보영전을 떠났다.
“나중에 봅시다.”
철컥.
문이 완전히 봉인되고, 안톤은 차분히 장중을 훑어보았다.
그는 아직 지급 보영전 안에 있었다.
“다시 봐도 장관이군.”
한 등급 아래인 이곳이 이 정도인데, 그보다 윗등급인 천급은 과연 어떨지 절로 기대가 된다.
안톤은 곧바로 천급 보영전으로 넘어가기 전에 일단 타르티안이 주고 간 쪽지를 열어 보았다.
“무구들의 목록을 정리해 둔 건가? 고마운 일이로군.”
쪽지에는 무구들에 대한 설명들도 짧게나마 적혀 있었다.
그렇게 선 자리에서 차분히 쪽지를 쭉 읽어 내리며, 안톤은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생각보다 물건이 너무 적어서였고, 다른 한 번은 그 물건들이 엄청나게 유명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안톤의 식견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눈에 이름만 보고도 뭔지 아는 이름난 보구들이 다수 존재했다.
‘블러드 샤롯? 오르메넨 여왕이 쓰던 스태프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조르디가의 명성을 생각하면, 아마 같거나 비슷한 이름의 무구는 아니리라.
‘생각해 보면 대전쟁 당시, 그들은 같은 연합에 속해 있기도 했지. 아무튼 그나저나 검은 매가 도대체 뭐지?’
타르티안이 떠나가며 흘리듯 남겨 둔 단어. 검은 매.
허나 여러 번 살펴봐도 목록에 그 엇비슷한 것조차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가 볼까.’
안톤은 천급 보영전으로 이어진 문을 활짝 열었다.
‘지급 보영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군.’
보관과 전시의 차이랄까.
하나씩 하나씩 귀중하게 관리했다는 느낌이 물씬 피어난다.
안톤은 섬세한 눈길로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이곳엔 딱히 무기로 볼 수 없는 물건들도 많았다.
하기야, 세상의 모든 보물이 무기인 것은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안톤은 가장 근처에 있던 도자기의 겉면을 어루만져 보았다.
무일견의 안목으로 보아도 굉장히 공을 들여 만들어진 예술품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안톤은 마당에 놓고 쓰는 항아리나, 이 도자기나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모으는지 이해를 못 하겠군.’
이내 예술품들에서 흥미를 거둔 안톤은 이제 서적들로 관심을 옮겼다.
책의 권수는 여타 물품 중 가장 많은 편이었는데, 물론 이 또한 평범한 책들은 아니었다.
무공에 관련된 서적으로, 하나같이 어려운 제목의 책들이었다.
안톤은 짚이는 대로 한 권을 들어 첫 장을 펼쳤다.
‘시간제한도 없다고 했으니, 이 기회에 실컷 봐 놔야겠군.’
한 권 한 권이, 전생에 익혔던 코르보 백작가의 비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상승 무공들이다.
문득 제대로 된 기공을 익히지 못해 검만 뻘뻘 휘두르던 시절이 떠올라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새삼 감회 깊게 느껴졌다.
안톤은 아예 바닥에 편히 앉아 책들을 읽어 내려갔다.
소우든의 글자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안톤은 기공에 관련된 책들은 빠르게 내용과 원리만을 확인하고 도로 덮었다.
어차피 마나를 사용치 않는 그에겐 별 소득이 없는 책들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 글귀들을 모두 읽은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면 기공이 아니라, 무술에 관련된 서적들은 상당히 공을 들였다.
검, 활, 창 등등. 그는 굳이 검이 아니더라도 꼼꼼히 책을 읽었다.
방식도 형태도, 이치도 모두 다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극강이든 화합이든, 무겁든 빠르듯, 다채롭든 단순하든, 그건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결국 이치는 어디서나 일맥상통하기 마련이니까.
안톤의 목적은 그러한 이치들을 자신의 검에 녹여내는 것이었다.
한나절이 지나고서야 안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책의 내용을 외운 것은 아니었다. 한 번 대충 휙 본 걸로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울 기억력은 그에게 없었다.
물론 더 많은 시간, 집중해서 책을 보았다면 좀 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늙은이가 뭔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며칠이나 이곳에 있을 순 없지.’
그래도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들은 모조리 머리에 때려 박았으니 됐다.
게다가 어차피 이러한 무공 서적들은 결국 안톤에게 참고 수준의 도움밖에 되지 못한다. 그래도 지식에 목말라 있던 과거의 욕망을 충족시켰으니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안톤은 기지개를 펴며 슬슬 몸을 풀었다.
이내 그의 동공이 활짝 열린다.
그의 시선은 초점이 명확치 않아 마치 현실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역시 되는군.”
블러드 샤롯.
안톤은 붉은색 보석이 끄트머리에 크게 달려 있는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의 보석 안에선 무시무시한 양의 마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대검도 근본적으로 마력이 내장된 아티팩트이긴 하나, 이것과는 아예 급이 달랐다.
이윽고 지팡이에서 눈을 뗀 안톤은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전체적으로 확인했다.
‘엄청나군.’
이곳에 있는 물건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마나를 풍기고 있었다.
뭐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조금 신기했던 것은, 단순한 예술품이라 여겼던 작품들에 마나가 담긴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용도지?’
설명이 적힌 목록에도 유래 정도만 짧게 쓰여 있을 뿐, 용도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나름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안톤은 금세 궁금증을 거두었다.
이젠 본격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나갈 단 하나의 물건을 골라야 할 때였다.
안톤은 타르티안이 주고 간 쪽지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씩 하나씩 물건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총 세 개의 후보를 추렸다.
갑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이었다.
칼날이 스치는 것만으로 얼어붙게 하는 검이라든가, 벼락을 내뿜는 지팡이라든가, 휘황찬란한 무구들은 많았다. 허나 안톤이 고른 세 가지의 물건들은 그것들에 비하면 다소 평범한 외견과 단순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었다.
혼급 마법까지 완벽하게 방어가 가능한 갑옷과, 착용자가 물 위를 걷거나 공중에서 도약할 수 있게 하는 신발. 마지막으로 작은 방 정도 크기가 내장된 아공간 가방이었다.
이 셋 중에서 가장 안톤의 구미를 당긴 것은 가방이었다.
‘전투냐, 일상이냐.’
마법사가 많은 북부나, 지상이 아닌 곳에서 전투를 치를 때를 생각하면 신발이나 갑옷을 고르는 게 현명할 것이다.
허나 이 가방을 택하면 앞으로의 여행에서 그 어떤 무구보다도 편리하게, 또 자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검을 따로 몸에서 떼어 두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안톤은 점점 더 가방을 택하는 것으로 마음의 추가 기울고 있었다.
게다가 마법을 방어하는 것이나, 물 위를 뛰는 것은 왠지 자신의 힘만으로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런데 그때, 안톤의 눈에 문득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다.
바닥 아래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마나였다. 그것은 다른 마나와 달리 푸른색이 아니라 하얀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체 뭐지?’
안톤은 그 바닥을 노크하듯 살짝 쳐 봤다.
도대체 얼마나 아래에 있는 것인지, 공허한 소리조차 피어나지 않았다.
‘이거 더 궁금해지는데.’
왠지 타르티안이 아까 말했던 검은 매가 이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분명 무언가 감춰진 기관 장치가 있을 터.
안톤은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고 다니며 그것을 찾아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기관을 찾는 것도, 이대로 정체를 확인하는 것을 포기하고 등을 돌리는 것도 썩 내키지가 않는다.
그렇기에 안톤은 지금 골똘히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냥 이걸 파, 말아?
그리고 고민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해 준 게 얼만데,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결국 이 또한 가우스트의 것이라 생각하니 작은 죄책감마저 사라진다.
행동은 짧은 고민보다도 빨랐다.
안톤이 단숨에 바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대리석 바닥에 사각형의 선이 그려진다.
안톤은 그 중앙 부분에 손가락을 깊이 박아 넣고는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깔끔하게 절단된 대리석이 부드럽게 뽑힌다.
쿵.
안톤은 뽑아낸 석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곧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생각보다 넓군.’
내부는 굉장히 어두웠지만 사물을 분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 애초에 사물이랄 것이 딱 하나뿐이었다. 안톤은 곧장 눈에 들어온 상자를 향해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흰색의 빛무리가 상자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 빛무리는 상자를 엶과 동시에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상자가 마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싶었다.
안톤은 상자 속 붉은 천 위에 올려진 매 조각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검은 매라……. 아무래도 이게 맞는가 보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조각상이 아니라 인장이었다.
재질이 무엇인지 모르나 겉면에는 검은 광택이 흘렀다.
그나저나 이건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 것일까. 호기심이 한껏 치밀어 올랐지만 안톤은 일단 그것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일단 챙기자.’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 인장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위에 있는 여타 보물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였으니까.
다시 위의 공간으로 올라가기 위해 등을 돌리니, 올라가는 형태의 계단이 보인다.
아마도 저것이 이곳으로 이어지는 원래 통로였으리라.
안톤은 이곳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장소를 만든 제작자가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침입한 안톤을 봤다면, 그만 화병이 도져 쓰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탁.
한 번의 도약으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안톤은 주저 없이 아공간 가방을 등에 걸쳤다.
원래 보영전에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물건은 딱 하나뿐이다. 허나 방금 획득한 인장은 목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물품이었다.
안톤이 이곳에 들어올 때 몸수색도 하지 않았으니, 원래 갖고 있던 물건이라 하면 그만이리라.
‘게다가 이 가방을 두고 가는 건 여러모로 아쉽고 말이지.’
안톤은 일단 바닥에서 뽑아낸 석재를 다시 홈에 맞게 끼워 넣었다.
손가락 자국도 남았고 높낮이도 차이가 났지만 얼추 들어맞았다.
걸리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톤은 어차피 이제 곧 이곳을 떠나지 않는가.
이것을 확인하고 어이없어할 가우스트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 안톤이었다.
보영전에서의 볼일을 모두 마친 안톤은 밖으로 나서서 곧바로 타르티안을 찾았다.
그는 안톤을 보자마자 웃으며 반겨 주었다.
“그래, 어떤 것을 골라서 나오셨소? 궁금하구만.”
안톤이 등에 멘 배낭을 보여 주자, 타르티안이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아공간 배낭을 고를 줄은 예상도 못 했소이다. 역시 당신은 특이한 사람이구려.”
“근데 아까 말하였던 검은 매는 뭘 뜻하는 것이었소?”
“아, 그건 그냥 조르디가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것이오.”
“전설이라니?”
“검은 매를 얻는 자는 천하를 얻을 것이다. 원래는 그런 구절이 보영전에 있었다고 하더군. 사실 조르디가 내에서는 유명하고도 오래된 수수께끼 같은 것이오. 보영전 내에는 그런 물건이 없지 않소?”
“확실히 목록에는 없더군.”
“혹시 찾은 것이오?”
잠깐 고민하던 안톤은 비밀 공간에서 획득한 인장을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걸 거기서 찾았소?”
“바닥에 숨겨져 있더군. 그래서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오?”
“……그건 나도 잘 모르오. 사실 당신이 그걸 정말 찾아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단 말이오. 내가 잠깐 봐도 되겠소?”
“그러시오.”
인장을 넘겨받은 타르티안은 구석구석 꼼꼼히 그것을 살폈다.
“흐음……. 이게 확실한 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야 그렇지……. 하하! 이거 당신에게 잘 보여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소. 전설대로라면 당신은 천하를 얻을 남자가 아니오.”
“그런 건 별로 갖고 싶지도 않소만…….”
“큭. 당신이야 그런 사람이었지. 그래, 가방을 고른 걸로 봐서 곧 떠나려는 생각인가 보오?”
“그렇소.”
“그렇군. 떠나기 전에 술이나 한잔합시다.”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말이오.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들르겠소이다.”
“알겠소. 아, 그 검은 매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비밀로 하시오. 아버지나 다른 누군가가 듣는다면 당신이 떠나지 못하게 잡을 수도 있소.”
“마지막 해결할 일만 마치면 바로 떠날 생각이니 걱정일랑 마시오.”
안톤은 조르디가의 가주전으로 발을 옮겼다.
이곳에서 해야 할 마지막 업무를 끝마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