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7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7화
077. 준비
“어! 늦는다더니 일찍 왔네요?”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서 말이오.”
별원으로 들어서니 린디아스가 안톤을 맞아 주었다.
그녀는 안톤의 행색을 뒤늦게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머! 옷 꼴이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어디 다친 건가 싶어 얼른 다가와 이리저리 살펴보는 린디아스였으나, 딱히 상처가 보이지 않자 이내 안심하는 눈치였다.
“오다가 바닥을 굴렀소.”
“무슨 가당찮은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뭐, 돌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했단 거예요?”
“그렇소.”
찰나의 순간 동안 린디아스는 고민했다.
‘날 놀리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심으로 이딴 거짓말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니까.
둘 다 기분이 나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후자가 조금 더 기분이 나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어쩜 이렇게 똑 닮은 건지.’
린디아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치사하게 비밀이란 거예요? 됐어요. 나도 더 이상 안 물어봐요.”
“…….”
안톤이 앞에서 우물쭈물거리자 린디아스가 호통을 친다.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냄새가 이렇게 나는 건지……. 어후! 일단 빨리 씻으러 가기나 해요.”
“흠흠. 그러리다.”
그녀를 피해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간 안톤은 먼저 옷에 잔뜩 묻은 진흙들을 털어 냈다.
그러자 흙 아래 숨겨져 있던 천 위로 붉은 자국이 흐릿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모두 헤스갈의 몸에서 나온 피였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심문 중에 이렇게 피가 옷에 묻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가 발버둥을 한껏 치며 달려드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 버렸다.
‘역시 굴렀다는 건 너무 이상한 변명이었나…….’
그래도 자세히 묻지 않고 넘어가 주어서 다행이다.
안톤은 서서히 달궈져 김이 피어나기 시작한 욕조 안으로 몸을 담갔다. 그러고선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꽤나 복잡했다.
사실 헤스갈을 심문하며 들은 정보는 딱히 별거 없었다.
그저 그의 옛날이야기였을 뿐이다.
안톤은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으아아! 말할게. 말한다고!”
얼굴이 퉁퉁 붓고 핏자국이 가득한 그를 상대로 왼손의 손톱 다섯 개를 차례차례 뽑았을 때,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모든 걸 털어놓았다.
헤스갈이 그들과 처음 접촉한 것은 10년 전, 그러니까 그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후원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카트락시아가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그때의 헤스갈은 지금과는 달랐던 듯하다.
거래를 해 보지 않겠냐는 그녀의 제안을 자세히 듣지도 않고 쫓아냈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듬해, 그녀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여자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생일 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동생과의 친선 비무를 해야 했고, 진심을 다한 끝에 나는 겨우겨우 그 아이를 이겼다. 그때 에스닌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아나?”
무정검 에스닌.
안톤이 알기로 그녀는 헤스갈보다 네 살이 어리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겨우 열한 살이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그 어린 여자아이에게 고전했다면 자괴감이 드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질투인가?”
“절망이라고 해 두지. 아무튼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에스닌을 후계자로 내심 점찍었다. 장남인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도 말이야.”
“그건 피해의식에 찌들어 혼자 갖고 있던 망상은 아닌가?”
“난 그 누구보다 내 아버지를 잘 안다. 그건 절대 그런 게 아니야.”
제 아버지의 목을 취한 패륜아라고 할지라도, 그 아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안톤으로서는 할 말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손을 잡았나? 그것도 아버지를 죽이려는 자들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웃기는군. 그냥 네가 권력에 눈이 멀었을 뿐이겠지.”
“그건 내 전부였다.”
이딴 치졸한 가문 따위가 어떻게 전부가 될 수 있는 걸까.
솔직히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안톤은 그것을 비웃지 않았다.
“그게 없어진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마치 안톤에게 있어 검이나 자유가 갖는 의미처럼, 헤스갈에게도 그랬던 것이었을 테니.
이후로 안톤은 계속해서 블라디미르와 관계된 이야기들을 물어보았다. 허나 해린에서 생포했던 암살자처럼 헤스갈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접촉한 것은 카트락시아, 그년뿐이었다. 나도 왜 그들이 제단을 원했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이제 대충 들을 건 다 들었다.
떠날 시간이 됐다는 생각에 등을 돌리려는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안톤은 다시금 뒤를 돌아 헤스갈을 쳐다봤다.
그때 그는 미친 사람처럼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재밌어질 것 같으니 말해 주마. 검령의 일족을 몰살시킨 건 내 아버지다. 부디 네가 아끼는 그 아이에게 전해 줬으면 좋겠군.”
안톤은 대답도 않고 감옥 밖으로 나갔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 * *
‘15년 전의 혈사가 슐츠 조르디의 짓이었을 줄이야…….’
그는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혹시 그는 남들이 모르는 진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는 모두 평생 추측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슐츠 조르디는 이미 죽어 버린 지 오래니까.
‘어쩌면…… 단순히 자식들이 원하는 사람과 혼인을 하길 원했을 수도.’
가능성이 가장 낮은 추측을 끝으로, 안톤은 고민하는 것을 그만뒀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이제 이곳에서 안톤이 해야 할 일은 없다.
그러니 더 이상 조르디가에 숨겨진 깊은 비밀들을 파헤칠 필요도 없을 터.
그럼에도 그가 헤스갈을 찾아갔던 것은, 혹시 다시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블라디미르에 대한 정보 획득과, 간직했던 자신의 작은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안톤은 왠지 모르게 남아 있던 찜찜함과 미련마저 털어 냈다.
“그럼 이제 너는 어쩔 것이냐?”
안톤은 온-누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안톤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온-누르는 안톤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게냐? 그러니까 이제 앞으로 어쩔 것이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앞으로의 행보를 묻고 있었다.
이제 안톤은 자유의 몸이다. 노예마법각인은 물론, 묵혀 있던 마음의 빚까지 모두 청산했다. 그러니 걸릴 것은 하나도 없다.
떠나고 싶으면 그냥 그러면 된다.
원래 안톤은 앞으로 대륙을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급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도 하나 남았고 말이지.’
물론 안톤은 그것에 대해선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끝까지 자신만 알고 있을 생각이었다.
“일단은 이곳에 머물면서 생각을 정리할까 합니다.”
“그렇군. 그럼 그동안 배우지 못한 무술들이나 배워 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런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지 않았더냐? 명색이 내 제자인데 아무것도 몰라서야 안 되지.”
보법 검술 등등.
정신검 수련이 궤도에 오르고, 본격적으로 그것들을 배우려고 하던 때. 그만 가주 살해 사건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안톤은 온-누르의 진신절기들을 배우지 못했다.
“뭐, 이제 네게는 딱히 필요 없을지 몰라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태연하게 말을 건네는 온-누르였으나, 안톤은 자신이 이 제안을 거절할까 봐 그가 내심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이제 안톤은 그것들을 배우지 않아도 강하다.
솔직히 과거의 온-누르나, 지금의 가우스트도 예의 안톤 같은 신위는 보이지 못한다.
물론 무인의 대결이 그런 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안톤이 이미 그들의 영역에 도달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톤이 고개를 끄덕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딱히 스승인 온-누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안톤은 검이 좋았다.
* * *
“잊지 마라. 하늘을 베는 검이라도, 휘두르는 것은 사람이다.”
안톤은 스승의 조언을 명심하며, 충실히 그의 무공들을 익혀 나갔다.
사실 형태만 익히는 것이기에 많은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게다가 애초에 안톤 또한 검술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이기도 했고 말이다.
불과 보름이 지나기 전에, 안톤은 모든 초식들을 익혀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온-누르가 안톤에게 손수 만든 책 한 권을 건넸다.
암혼경(暗混經)이라는 제목만이 표지에 있는 투박한 형태의 책이었다.
안톤은 감탄했다. 그동안 계속 어디로 사라지는가 했더니 두문분출하며 이런 것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온-누르는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이야말로 내 무학의 정수라 할 수 있겠지만, 기공인 이것은 네게 필요 없겠지. 그래도 갖거라. 나중에 네가 자식을 낳거나 제자가 생겼을 때, 그 아이가 네 검을 물려받지 못한다면 이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안톤은 그것을 받아 품속에 잘 갈무리했다. 그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여 나중에 시간이 될 때마다 틈틈이 정독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본성에 다녀온다고 했는데, 설마 벌써 다녀온 것이냐?”
“그럴 리가요. 지금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군. 잘 다녀오거라. 나는 아무래도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으니.”
“예.”
온-누르가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안톤도 바로 별원을 나섰다.
내전이 끝난 직후이기에, 내성 안에도 사람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내가 안톤을 보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부진 체격에 험악한 인상을 지닌 사내였다.
그 사내는 앞에 서자마자 대뜸 고개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암만 살펴보아도 그는 생면부지의 사내였기에 안톤은 조금 당황했다.
“혹시 날 아시오?”
“그런 무지막지한 대검을 들고 다니는 붉은 머리의 북부인은 조르디가에 한 사람뿐인데, 설마 몰라볼 리가 없잖소, 검신.”
검신.
안톤도 자신에게 그런 무호가 생겼다는 걸, 주변인들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나가던 사람이 다가와, 영광이라며 먼저 인사를 할 정도의 명성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안톤은 한바탕 주변을 쓱 훑어보고는 사내를 향해 물었다.
“혹시 그럼 저자들이 계속 이곳을 지켜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오?”
“무슨 당연한 말을 하고 있소?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자들이 널리고 널렸소. 그런 면에서 나는 참 행운아인 것 같지만, 아쉽게도 딱 여기까지인가 보오. 바쁜 용무가 있어 그리 향하는 길인지라 먼저 실례하겠소이다.”
“그러시오.”
사내는 아쉽다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떠나갔고, 안톤은 멈춘 발길을 다시 옮겼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처음의 그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스쳐 지나가는 자들이 먼저 그에게 호의 섞인 인사를 건넸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딜 가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영웅을 향해 보내는 선망과 동경이랄까.
원래 그들의 눈길이 이방인 바라보듯 냉담했었다는 걸 되새겨 보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본성에 도착하자 묘하게 친근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안톤!”
타르티안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옮기는 중이었는지, 양손 높이 짐을 쌓아 들고 있었다.
“바쁜 것 같군.”
“바쁘다는 게 좋은 거 아니겠소? 아버님의 일을 돕다 보니 차차 이렇게 되더군. 공적이 인정되어 천급 보영전의 출입이 허락되었다는 건 들었소. 혹시 지금 그리로 가시는 게요?”
“그렇소.”
“아, 그럼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내가 안내해 드리리다.”
타르티안은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짐을 넘겨주고는 다시 안톤에게 돌아왔다.
“자, 인수인계가 끝났으니 이제 갑시다.”
인수인계가 아니라 그냥 일을 떠넘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안톤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로서도 생판 남보다는 친분이 있는 타르티안이 보다 편한 것이다.
타르티안은 먼저 앞에서 걸어가면서도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부럽구려. 그곳은 천하의 보물들만 모여 있다는 곳인데 말이오. 언젠가 목록만이 아니라 실물도 한번 보고 싶구려.”
안톤은 예전에 린디아스가 양도해 준 출입권으로 지급 보영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보구가 지금 들고 있는 이 대검이다.
그런데 그보다 한 단계 등급이 더 높은 보물 창고라니, 기나긴 조르디가의 역사와 영향력을 떠올리면 아마 굉장한 것들이 모여 있으리라.
다만, 그렇기에 안톤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타르티안, 궁금한 게 하나 있소. 안 그래도 재정이 위험한 걸로 알고 있는데, 차라리 그것들을 모조리 팔아서 가문을 재건하는 게 낫지 않소?”
“나도 그렇게 판단하오. 내 아버님 역시 그렇게 일을 진행하려 하고 있고. 그래서 처분할 것들을 선별하기 전에 먼저 당신을 불러들인 거요. 소우든의 무인들은 은원이 뚜렷하니까.”
“그렇군.”
안톤은 타르티안을 따라 기관 장치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자 예전에 들어가 보았던 보영전이란 글자가 새겨진 전각이 나타났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구려.”
“나는 처음 와 봤기에 모르겠지만, 아마 그럴 것이오. 듣기로는 성이 무너져도 이곳은 안전하도록 설계됐다고 하더구려.”
“흠. 혹시 이것도 그 지하 암굴을 만든 북부인의 작품이오?”
“그건 잘 모르겠소. 꽤나 특이한 것에 관심을 갖는구려.”
보영전 전각에 올라서니 위압감이 느껴지는 인상의 문지기가 그때처럼 앞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예전과 비교하면 대우가 상당히 달랐다.
출입의 윤허를 의미하는 패도 확인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행해졌던 몸수색도 건너뛰었으니 말이다.
“시간은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 신중히 고르시오.”
심지어 전에 있었던 시간제한조차 없었다.
문지기의 손에 의해 보영전의 문이 활짝 열린다.
그곳에 들어가기 직전, 타르티안이 안톤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검은 매를 한번 찾아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