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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7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5화

075. 검신

 

 

“안톤! 안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안톤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 눈에 들어간 것처럼 흐릿한 시야로 한 여인이 보인다.

 

“정신이 들어요?”

 

안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시켜 나갔다.

 

다시 눈을 떠 보니 린디아스는 한껏 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톤은 외려 그런 그녀를 향해 안위를 물었다.

 

“공녀는 괜찮소?”

 

“네. 저는 괜찮아요. 당신은요?”

 

“멀쩡한 것 같소. 일단은…….”

 

“일단이라뇨?”

 

“도대체 뭐에 당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오. 시간이 얼마나 지났소?”

 

“저도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안톤은 검령이 맹약을 통해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간단히 설명했다. 다소 당황할 법한 진실인데도 린디아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랬군요.”

 

“일단 나갑시다. 밖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니.”

 

“알았어요. 솔직히 이제 이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린디아스는 그냥 그렇게 수긍하며 더 다른 질문을 날려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망연자실한 태도였다. 안톤은 그런 린디아스를 데리고 왔던 통로를 되돌아갔다.

 

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은 린디아스뿐이었다.

 

그녀가 문 위로 손을 얹자 문에 조각된 보석들이 푸른 광채를 내기 시작했다.

 

스르릉.

 

석문이 완전히 열리자, 그 너머로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들어올 때는 미처 보지 못하였으나, 안톤은 그 사이의 푸른 장벽이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림막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 역시 마나로 이루어져 있는 벽이었고, 신안을 열고 나니 이런 것까지 보이는 것이다.

 

‘조금 어지럽군.’

 

이제 그가 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달랐다.

 

허공을 보면 바람이 보였고, 그 위를 떠다니는 마나가 보였다.

 

심지어 사람을 볼 때도 그랬다. 체내에서 흐르는 기가 눈으로 보인다.

 

이것 참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

 

이제 어느 무인이건, 한 번 쓱 보는 것만으로 기공의 원리를 속속들이 알아챌 수가 있다는 말이었으니.

 

또한 그뿐만이 아니다. 이 능력은 전투에서도 그 효용도가 무궁무진하다.

 

기를 어디로 흘려 넣는지를 볼 수 있다는 건, 앞으로 어떤 공격을 할지 예상할 수 있다는 말과 동일했으니까.

 

상대방 입장에서는 미래 예지나 마찬가지일 테지.

 

‘근데 이건 뭐지?’

 

어느 사물을 보아도 마치 금이라도 간 것처럼 실선이 그어져 있다.

 

안톤은 두 눈에 보이는 그 결을 따라 장막 너머로 검을 살짝 내리그었다. 그러자 얇은 막을 날카로운 것으로 댄 것처럼 스르르 닿은 부분만 찢어진다.

 

그리고 그 찢어진 틈으로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갑시다.”

 

안톤은 스스럼없이 그녀를 한 손에 안아 들었다.

 

물속에서 천을 뜯어서 내던진 이후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린디아스가 크게 호흡을 삼키자, 안톤은 거침없이 물 너머로 몸을 들이밀었다.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로군. 다행이야.’

 

고개를 들어 수면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 카트락시아가 여전히 괴물의 형상을 유지한 채 헤엄을 치고 있다.

 

안톤은 차분히 그 괴물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세세히 관찰할수록 정말 괴물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지만, 아까처럼 승산이 없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길 수 있다.’

 

이것은 예감이 아닌 확신이다.

 

그도 그럴 게, 저 괴물에게도 길게 이어진 실선이, 아니 결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크오아아아아!

 

안톤을 발견하고 거칠게 헤엄쳐 오는 괴물을 보고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

 

압도되는 크기의 괴물이 입을 벌려 오고 있었음에도, 딱히 두렵다는 생각조차 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일단 물속에서 벗어나야겠군.’

 

물론 밖이 환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아직 밖의 상황은 무엇도 모른다.

 

어쩌면 안톤과 린디아스의 복귀를 기다리던 본대가 버티지 못하고 퇴각을 하였거나, 이미 전멸했을 수도 있다.

 

쿵.

 

괴물과 충돌하기 직전, 안톤은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물속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괴물도 뒤늦게 몸을 돌려 그를 맹렬한 기세로 추격했으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멀어져만 갔다.

 

콰콰콰콰앙!

 

입구 쪽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어느덧 괴물의 몸이 벽에 맞닿을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런 제약도 없다는 듯, 괴물은 모조리 부서트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슈웅!

 

안톤은 단숨에 물 밖으로 치솟아 올랐다. 잔뜩 붙은 가속도 덕에 그의 몸은 수십 미터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의도한 바였다.

 

‘아직 해가 중천인 걸 보니 한 시간도 안 지났군.’

 

확 트인 시야로 지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상은 아직까지도 전투에 여념 없었다.

 

다만 형세가 이전과는 달랐다.

 

가우스트의 진형은 오밀조밀 뭉쳐 수비진을 형성하고 있었고, 적들 무리는 사방을 포위하며 그들을 말살하려 하고 있었다.

 

계약이고, 뭐고.

 

어떻게 잘됐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저들과 합류하여 퇴각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어느덧 떠오른 몸이 한계점에 임박해 내려가기 시작할 때.

 

아래 연못에서 괴물이 머리를 거칠게 치켜 들이밀었다.

 

쿠웅!

 

안톤이 나올 때와는 다르게, 주변의 지형이 박살 나며 거대한 물폭포가 치솟는다.

 

괴물은 아래로 떨어지는 안톤을 잡아먹을 기세로 입을 벌려 왔지만, 안톤은 공중에서 살짝 몸을 틀어 괴물의 이마에 착지한 뒤, 사뿐히 즈려밟으며 도약했다.

 

그가 내려온 곳은 적군으로 둘러싸인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허나 주변의 적들이 검을 들이밀며 경계하는 것도 잠시였다.

 

그들은 이내 안톤을 따라 쫓아오는 괴물의 모습에 아연실색하며 스스로 진형을 무너뜨렸다.

 

“이제 어떡하죠?”

 

품에 안긴 린디아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안톤을 올려다본다.

 

안톤은 제단 속에서 신안 개방의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티가 나지 않고, 린디아스로서는 설명을 들어도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리라.

 

“걱정할 것 없소.”

 

크와아아아아!

 

괴물은 다리가 없었지만, 뱀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지상에서 움직였다.

 

물론 그런 것치고 상당히 빠른 이동 속도임에는 틀림없지만, 물속과 비교하기에는 많은 손색이 있었다.

 

안톤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저 정도 속도라면 제쳐 두고 본대에 합류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안톤은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갚아 줄 때로군.”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면, 그도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갖진 못했으리라.

 

안톤은 가만히 서서 직선으로 돌진해오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괴물의 피부에는 마치 거미줄처럼 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안톤에게만 보이는 선이다.

 

안톤은 괴물이 자신의 반경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냅다 그 선을 따라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제단에 들어가기 전, 검을 휘둘러도 흠집 하나 남지 않던 그 피부가 길게 갈라진다.

 

그것도 마치 두부나 종잇장을 칼로 긋는 것처럼 부드럽게.

 

끄에에에에!

 

통증에 더욱 광폭하게 변하는 괴물을 보며 안톤은 눈을 번뜩였다.

 

‘아직 부족해.’

 

괴물이 지느러미로 지면을 박차며 위에서 덮쳐든다.

 

안톤은 보다 집중하여 괴물의 몸에 나 있는 결을 바라보았다.

 

과도한 정신 집중의 효능일까.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듯 괴물의 몸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였던 결이 둘로 늘어나고, 그 하나를 바라보니 그것이 또 셋으로 늘어난다.

 

결 속에도 또 다른 결이 존재하는 것이다.

 

안톤은 그 과정을 계속 반복했다.

 

그리고 열 개의 결 중 하나를 볼 수 있게 됐을 때, 안톤은 더 이상 다른 결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것이 모든 것을 이루는 최소 단위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것이 현재 안톤이 해낼 수 있는 한계였다.

 

안톤은 문득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마치 깨지기 직전의 유리처럼 온 세상에 금이 가 있었다.

 

그것은 하늘도 바람도 땅도 마찬가지다.

 

마치 지금이라면 하늘이라도 벨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래, 하늘이라고 베어 내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

 

그렇게 검을 휘두르는 도중, 문득 온-누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예전에 경지에 대한 설명을 들을 당시의 대화였다.

 

-안의 경지라니, 역시 너무 폼이 안 나는 이름이지? 뭐 마땅한 이름이 없으려나? 아, 그래! 기공의 완성이 아닌 검의 완성이니, 검경…… 검경이 어떠하냐?

 

-그것도 별로인 것 같습니다만…… 뭐, 이미 정한 모양이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남부어가 아니라 북부어로는 뭐라고 합니까?

 

-그건…….

 

안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역시 스승님은 유치한 걸 좋아한다니까?’

 

휘이이이이이이잉.

 

‘소드 마스터, 라니 말이야.’

 

괴물의 몸뚱이와 함께, 하늘이 갈라졌다.

 

 

* * *

 

‘너무 오래 걸리는군…….’

 

연못가를 흘깃 쳐다본 가우스트가 침음을 삼켰다.

 

벌써 안톤과 린디아스가 제단에 들어간 지 어언 한 시간째.

 

처음에는 계획이 무사히 진행되고 있다고 여겼다.

 

분명 그게 아니라면, 뒤따라 들어간 백무대주가 진작 나와서 전투에 가세했을 테니까.

 

그 생각으로 가우스트는 어떻게든 그들이 나올 때까지 버텨 내고자 수비진을 펼쳤다.

 

하지만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적을 감당하는 것도 이제 슬슬 한계다.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는데…… 혹시 실패한 건가?’

 

실패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최선의 실패와 최악의 실패.

 

가우스트에게 있어서 전자란 안톤과 린디아스가 죽음으로써 계획이 실패하는 것이었고, 후자란 린디아스가 적에게 생포 당했을 경우였다.

 

둘 다 실패는 실패이다.

 

허나 전자의 경우는 적어도 제단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역시 너무 큰 욕심이었나……?’

 

가우스트는 퇴각 명령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연못가로 시선을 또다시 옮겼다.

 

저 연못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갑갑했다.

 

여건만 된다면 진즉에 연못 속으로 들어가 상황을 파악했을 그였으나, 앞에 있는 복면 사내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가우스트가 막 연못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침울함이 번져 가던 그의 얼굴에서 한 줄기의 화색이 돌았다. 연못 속에서 안톤이 덜컥 튀어나온 것이다. 그의 품에는 린디아스가 멀쩡하게 안겨 있었다.

 

‘성공했군.’

 

그러나 이내 환해지던 그의 낯빛에 다시 그림자가 졌다.

 

연못에서 솟아난 것은 안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앙!

 

안톤을 따라 지상으로 내려온 괴물로 인해 주변의 땅이 흔들린다.

 

가우스트의 눈에는 안톤이 몹시 위험에 처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에 달려 나가 그를 돕기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등장을 본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고, 적의 공세 또한 거세진 것이다.

 

자신의 발목만 붙잡던 복면 사내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어떻게든 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나…….’

 

가우스트는 다시금 전투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기적을 보았다.

 

 

* * *

 

“…….”

 

전투가 시작된 이후, 병장기 소리와 비명이 잦아들 순간조차 없었던 전장. 그런데 그곳에 처음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동료가 죽어 나가고, 자신의 배에 화살이 틀어박혀도 기필코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던 그들이, 가만히 몸을 멈춰 세워 놓고 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은, 절로 압도적인 광경을 보았을 때 짐짓 그렇듯 몸이 굳어 버린 것이니까.

 

전장의 모두가 고개를 돌려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넋 잃은 얼굴로 중얼거린다.

 

“하늘을…… 베어 냈다고……?”

 

그는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목격한 얼마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집 세 채를 이어 붙인 크기의 괴물이 전장 한복판으로 떨어진 이후, 은근히 그쪽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던 그는 보았다.

 

검으로 하늘을 베는 남자의 모습을.

 

“이것이 정말 인간의 힘으로 행한 일이란 말인가.”

 

그는 경이로움에 몸을 떨며 검을 바닥에 떨궜다.

 

비라도 내릴 것처럼 우중충하던 구름에 선이 쭉 그어졌고, 그 사이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리며 그의 몸을 감쌌다.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은, 역으로 이것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검성 가우스트는 모든 검사들의 우상이었지만, 결코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붉은 머리의 사내는 어떤가.

 

그는 어느 누구보다 먼저 그의 새로운 이름을 불렀다.

 

“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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