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74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4화
074. 검령
안톤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무력한 기분이 드는 것도 간만에 있는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은 계속해서 린디아스의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막아야 해.’
하지만 보이지도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안톤은 아까 헤스갈 측의 무사들이 느꼈을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했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안톤은 겨우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령의 말을 들을 수 있었으니, 볼 수도 있을 거야.’
끝없는 노력으로도 넘지 못했던 최후의 벽.
한시가 급박한 이 상황 속에서, 안톤은 신안 개방의 경지를 이루려 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야 겨우 그 실마리를 잡았을 뿐이지만, 해야 했다.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본다는 건 뭘까.’
모든 것은 이 화두에서 시작된다.
장님인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하늘, 땅, 바위, 풀, 사람, 짐승…….
명확한 실체를 가진 것들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하나, 세상을 이루는 것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기는 어떤가.
그 누구도 실제로 본 적은 없을 것이지만, 모두 그 존재는 인지하고 있지 않은가.
숨을 쉬지 못하면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의 기능이 정지한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을 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심지어 마법사들은 그 공기를 직접 다루기도 하지.’
보지도 못하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다룰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안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그들이 다루는 건 마나야.’
하지만 이 또한 부질없었다.
마나, 즉 기 또한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렇지만 공기처럼 다들 이를 잘 활용하며 살아간다.
‘근데 왜…… 도대체 왜 보지 못하는 거지?’
처음에는 그것들이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미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톤은 보다 멀리, 정확히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를 했었다.
헌데 지금.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아까 그건 뭐였을까?’
어쩌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안톤은 물속에서 있었던 경험을 다시금 회상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갑자기 물들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흐름들은 길처럼 연결이 되어 있었고, 안톤이 한 것이라곤, 단지 그 길을 따라 평소대로 헤엄을 친 것뿐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원래 능력의 몇 배나 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갑자기 그런 것이 눈으로 보였던 걸까.
안톤이 당시 했던 거라곤, 그저 막막한 상황 속에서 길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것뿐이었다.
허나 바라는 것만으로 신안을 열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을 리가 없지 없다.
혹시 하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부족했던 탓은 아닐까도 싶었지만, 이 역시 모순은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안톤은 그 당시보다 몇 배는 더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자.’
사고가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 전에, 안톤은 처음의 화두로 돌아갔다.
‘지금 내 앞엔 분명 녀석이 존재한다. 허나 왜 들을 수만 있고 보지는 못하지?’
안톤의 정신검은 여타 검술과는 다르다.
만물의 근원이라는 마나 대신, 사람의 의지를 사용한다.
굳건한 믿음으로 불가능을 실현시키는 힘.
날카로운 검기가 아니라, 반드시 벤다는 믿음이 그의 검을 강하게 만들고,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이 그를 가볍게 만든다.
반대로 무거워지는 것과 멀리 보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오늘 있었던 일도 결국 같은 궤의 선상이다.
물속에서 길을 바라자 길이 생겼고, 말을 듣고자 하니 말이 들렸다.
‘어쩌면 이건 검술이 아니라 마법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
이것은 상상하는 모든 것들을 실현시키는 불가해의 힘이다.
‘헌데 왜 보는 것은 안 되는 거지?’
그렇게 막막해하던 때.
순간 무언가가 확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온-누르가 해 주었던 말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우선 눈으로 보아 왔던 모든 걸 부정해야 하는데 그게 쉽겠느냐?
‘부정이라……. 한 번 해 보자.’
스승의 조언대로, 안톤은 모든 것을 역순으로 시도해 보고자 마음먹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
꽃, 나무, 땅, 불, 바다 등등.
안톤은 눈으로 보아 온 형태들을 의식에서 없애 버렸다.
그러자 기억 속에 있는 여러 장면들이 부분부분 붕괴하기 시작한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 왔지만, 안톤은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것들을 지워 낼 차례였다.
먼저 벽에 무수하게 그려져 있는 검의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 갔다. 흔적들이 사라지자 어느새 벽은 울퉁불퉁한 원래 모습처럼 변했다.
그러고 나서 벽을 지웠고, 밟고 있는 땅을 지웠다.
예전에 용의 현자로부터 정신세계에 갇혔을 때처럼, 세상은 하얀 공간처럼 변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바닥.
그 위에 린디아스가 떠 있듯이 존재한다.
안톤은 그녀 또한 지웠다. 옷을 지우고 머리를 지우고 눈을 지우고 몸을 지운다.
그러자 이제 이 장소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아직 하나가 남았어.’
그것은 바로 안톤, 자기 자신이었다.
내려다본 손바닥이 지워지고, 발이 지워진다.
믿음직하던 두 다리가 사라지고, 이내 모든 것이 사라진다.
피부로 느껴지는 여러 감각들마저 사라지고, 무엇도 귀로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완벽한 고요가 찾아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자신의 검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최후의 함정이었다.
‘몸이 없어졌는데 보일 리가 없잖아?’
안톤은 마지막으로 본다는 인식 자체를 지웠다.
그러자 하얗던 공간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파묻힌다.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
그 속에서 안톤은 상상했다.
‘저기에 그 녀석이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목소리를 제외하면 외견을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재료도 없었으니까.
‘아니, 목소리면 충분해.’
그렇게 굳게 믿은 안톤은 검령의 목소리를 상세하게 떠올렸다.
‘앳되어 보이는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남자였지. 마치 굉장히 장난기 어린 꼬마 같았어.’
칠흑 같은 공간 속에서 하얗게 윤곽이 생겨난다.
작은 소년 정도 크기의 형상.
속은 하얗게 텅 비어 있었으나, 딱히 무언가를 더 하지 않아도 순식간에 살이 붙으며 제 형체를 갖추었다.
‘됐다!’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자, 안톤은 곧바로 해 왔던 것을 순차적으로 되돌렸다.
검은 공간이 하얗게 변하고, 그 위에 린디아스가 나타난다.
땅이 생기고 벽과 천장이 만들어졌으며, 그 위로 수천수만 개의 검흔이 다시금 새겨졌다.
‘혹시, 지금이라면…….’
그것은 명확하게 발현된 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에 푸른색의 안개가 피어난다.
누가 따로 알려 주지 않아도 안톤은 그것이 마나라는 걸 곧장 알 수 있었다.
마나는 대개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으나, 유독 진한 부분들이 있었다.
대체로 생명이 있는 곳의 주변이었다.
안톤은 자신의 몸을 관찰했다.
이젠 기공을 사용하지도 않건만, 마나는 혈맥을 타고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그 순환의 중심은 심장이었다.
‘이건…….’
안톤은 자신의 심장 주변의 마나들이 사슬 같은 모양으로 얽혀 있는 걸 확인했다.
이것이야말로 노예마법각인의 진짜 형태였다.
그동안 안톤을 속박해 왔던 영겁 같은 굴레.
예전에 온-누르는 말했다.
볼 수 있으면, 베어 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베어야 할까.
자신의 심장 위로 칼을 박아 넣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어?’
아주 작은 의지였을 뿐이고,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나로 이루어진 사슬이 베어지며 대기 중으로 흩뿌려진다.
혹시 실체가 없기에 실체를 이용해 벨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조금 우습다.
‘겨우 이런 작은 의지에 부서질 만큼 하잘것없던 것이었다니…….’
허탈한 마음을 빠르게 정리한 안톤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폭풍 치듯 회오리가 치는 장내였지만, 그 무엇도 그의 걸음을 방해할 순 없었다.
안톤은 린디아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몸을 향하던 희미하던 기운이, 이제 또렷이 보인다.
그것은 아주 맹렬한 기세로 린디아스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였으니, 신안을 열기 전에도 희미하게 보였을 테지.’
아무튼 저것은 노예각인마법처럼 쉽게 끊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치민다.
안톤은 검을 크게 올려 들어 온힘을 다해 그대로 내리쳤다.
‘벤다!’
쉬이이이이!
혹 누군가에겐 허공을 향해 휘둘러진 것처럼 보였을 일검.
그것에 검령과 린디아스 사이에 이어져 있던 끈이 끊어졌다.
길을 잃은 기운들이 공기 중에 확 분산되며 바람이 불었다.
-설마 인간이 천계를 열 줄이야. 놀라워.
검령은 고통스러운 기색으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안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속하게 뛰쳐나갔다.
사실 아까부터 검령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부터 시작하여, 혼요정의 검술이나 천계이니 하는 것들을 말이다.
이 고대의 존재는 그 모든 궁금증을 풀어 줄 지식을 가졌고, 들으면 큰 도움이 되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톤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기회가 있을 때 베어야 해.’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소년의 외견이다. 허나 안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올곧게 검을 내질렀다.
실체를 찌른 것이 아니기에, 소리는 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작은 파공음이 새어 나왔을 뿐.
심장이 찔렸음에도 검령은 작은 비명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고개를 들어 안톤을 노려보았다.
-인간아. 너는 네가 지금 한 짓이 뭘 의미하는지 아무것도 몰라.
“그렇겠지.”
-분명 언젠가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그럴지도.”
-크크큭. 그래……. 원래 인간은 이랬지?
검이 파고든 상처 주위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영혼이 붕괴하며 나오는 잔여물들이었다.
안톤은 그것을 바라보며 마치 은색의 연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언을 해 줄게, 인간.
“그게 뭐지?”
-너는 검이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제단에 꽂혀 있던 검과 함께 검령의 모든 부분들이 바스라진다.
장내는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은색의 입자들이 나풀거렸으나, 어디서도 검령의 존재는 느낄 수가 없었다.
“정말 끝난 건가…….”
안톤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흥분한 육신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바닥으로 가라앉던 은색의 입자들이 안톤을 덮쳐 왔다.
피하거나 막거나 할 틈도 없었다.
사방에서 날아든 입자들은 그대로 안톤의 입과 코, 피부를 통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뭐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혼란스러워하며 몸 상태를 점검해 봤지만, 딱히 달라진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일단은 린디아스를 살펴보자는 생각으로 발을 떼던 차였다.
시야가 사선으로 기운다.
“젠장…….”
의식이 희미해져 감을 느끼며, 안톤은 차가운 지면 위로 쓰러졌다.
* * *
“으음…….”
온-누르가 몸을 움찔했다.
그는 현재 계획의 성공을 바라며, 총관과 함께 은신처에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물을 다리에 흘렸음에도, 그저 가만히 굳어 있는 온-누르를 보며 총관은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몸이 불편하십니까?”
“나는 괜찮으니 걱정할 것 없네. 다만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랬네…….”
무언가 주어와 여러 수식어들이 송두리째 빠진 대답에 총관이 되물었다.
“기운이라니요?”
혹시 말 그대로 몸에 기운이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닐까 싶었던 총관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온-누르는 그의 손을 정중히 밀어냈다.
“그런 게 아닐세. 제자 녀석과 이어져 있던 마법적인 끈이 사라졌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르신께선 무공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자네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저 사용할 수가 없을 뿐이지, 단전이 사라졌다고 기를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네.”
“그렇군요. 근데 그게 그렇게 큰일인 겁니까?”
“그렇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니까 말이야.”
“무슨 일이라 하심은…….”
“보통의 경우 이런 상황이 생길 이유는 딱 두 가지뿐이네.”
“……?”
“내가 죽거나, 그 아이가 죽거나.”
총관이 대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금 온-누르가 한 말은 즉 안톤이 죽었다는 말이었고, 그 뜻은 함께 있던 린디아스도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그의 침착함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린디아스가 죽거나 사로잡히면 지금 행하고 있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뿐더러,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제자가 얽힌 일이지 않은가.
그때 온-누르가 넋두리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부디 그 둘이 아닌 다른 하나면 좋겠네만…….”
“아니, 아까는 딱 두 가지뿐이라더니요?”
“그건 보통 사람들의 얘기지. 그 녀석의 경우 한 가지 더 방법이 있네.”
“……그게 뭡니까?”
“마지막 벽을 넘어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