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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7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2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3화

073. 제단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한 크기의 공동이 나타났다.

 

정중앙 부분에 제단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위치해 있었고, 벽과 천장, 바닥에는 검으로 인한 흔적이 가득했다.

 

조르디가 검술의 역사가 고스란히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안톤과 린디아스는 가운데 위치한 제단에 가까이 갔다. 제단 안쪽 석판 부분에는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은색 광채를 흩뿌리는 평범한 형태의 장검이었고, 손잡이 부분에 붉은색 보석이 박힌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장식은 없었다.

 

그런데 비밀스럽게 느껴지는 분위기 탓이었을까.

 

안톤은 그 검이 마치 어느 설화 속에 등장할 법한 대단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어떠시오? 뭔가 느껴지시오?”

 

안톤의 물음에 린디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익숙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그 계약이란 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오? 그냥 검을 잡아서 뽑으면 되는 거요?”

 

“그런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은 대로 해 볼게요.”

 

린디아스가 조심스레 검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몸짓에는 일말의 두려움과 망설임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혹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당장 그만두시오. 알겠소?”

 

“훗. 알았어요. 꼭 그렇게 할게요.”

 

염려의 말이 오히려 용기를 내게 하였는지, 린디아스는 서슴없이 검병 위로 손을 올리곤 눈을 감았다.

 

‘교감을 해야 한다고 하셨지…….’

 

처음 린디아스가 가우스트에게 절차를 들었을 때,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린가 했었다.

 

그러나 직접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던 가우스트의 말은 옳았다.

 

검에 손을 맞대는 순간, 린디아스는 교감이란 단어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해 버렸으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검이, 아니 검 속에 숨겨져 있던 어느 존재와 영혼이 연결되는 기분이랄까.

 

조금 생경하긴 했어도 그리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부터 직접 음성이 울렸다. 안톤의 전음과 달리 목소리나, 음의 높낮이가 뚜렷한 음성이었다.

 

-순수한 일족의 아이는 굉장히 오랜만인걸? 항상 반푼이들만 와서 심심했었는데 말이야.

 

“흐앗!”

 

내심 긴장하고 있던 찰나에 들려온 목소리에, 린디아스는 그만 놀라서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오!”

 

넘어진 그녀의 몸을 부축하며 질문을 던지는 안톤이었지만, 현재 린디아스에게는 그 질문을 대답할 정신머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녀의 눈앞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형체가 뭔가 희미해서 몸 너머로 그대로 벽이 비치는 남자아이였다.

 

“유, 유, 유령?”

 

린디아스가 까무러치는 심정으로 손가락을 치켜든다.

 

안톤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앞에 뭔가 있는 것이오?”

 

“저기, 안 보이세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

 

그런 기괴한 현상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남자아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용없어. 일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들은 절대 나를 느끼지 못하거든. 아무튼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잠깐만요, 안톤.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아요.”

 

너무 갑작스러운 등장에 한바탕 당황했으나, 아무래도 짚이는 게 하나 있다.

 

린디아스는 경계를 낮추지 않는 안톤의 등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혹시 검령님이신가요?”

 

-글쎄. 다들 그렇게 불렀으니, 이제 그게 내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말을 돌돌 꼬았으나, 결국 긍정의 의미가 담긴 대답이다.

 

“아……. 그럼 진짜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린디아스가 우물쭈물거리며 묻자, 그 이유를 눈치챈 검령이 피식 웃었다.

 

-꼭 나를 호칭할 것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아.

 

“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야? 그 반푼이들이 절대 순순히 순혈을 들여놓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친근하게 물음을 던졌으나 린디아스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근데 검령님, 아까부터 일족이니 순혈이니 하시는데……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저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그러자 계속 헤실헤실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검령의 얼굴이 덜컥 굳는다.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야?

 

급변한 태도 변화에 린디아스는 죄인이라도 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저는 그저 조부님이 부탁하셔서…….”

 

-잠깐, 혹시 조부라는 놈이 조르디가의 인간이야?

 

“조부님은 물론이고 저도 조르디가의 사람인걸요.”

 

-웃기는 소리. 너는 그런 반푼이들과는 다른 순혈이야. 이건 틀림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타박하듯 몰아치는 검령의 말에 린디아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안톤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검의 일족은 15년 전에 모조리 죽었소. 그 혈사에서 살아남은 그녀만 빼고.”

 

 

 

 

 

린디아스가 어떤 무언가와 대화를 시작한 이래, 안톤이 들을 수 있던 것은 그녀의 목소리뿐이었다.

 

허나 물속에서 경험한 기이한 현상을 토대로 감각을 깨워 보니 어느덧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말했던 본다, 라는 게 이런 것이었나.’

 

물론 보는 것은 아직이었고, 겨우 듣는 거나 성공한 것이었지만 아무튼.

 

드디어 그 실마리를 잡았다.

 

극도로 집중력을 키우면 검령의 존재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진다. 아마 조금만 더 연구한다면, 보는 것도 가능하리라.

 

안톤은 쾌재를 속으로 잠재웠다.

 

최대한 이 감각이 유지될 수 있도록 듣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내가 보여?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얼떨떨한 목소리에 안톤은 린디아스의 앞쪽 허공을 바라보았다.

 

“보이지는 않소만…… 목소리가 들리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굳이 이해할 필요 없소. 갑자기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잠깐만! 네놈은…… 이제 보니 혼요종의 검술을 배웠구나? 하긴…… 이제야 말이 되네.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확신에 찬 말투에, 안톤은 빈 허공을 향해 반문했다.

 

“혼요종이라니? 나는 처음 듣는 소리요.”

 

-하! 자기가 쓰고 있는 검술의 기원도 모르는 거야?

 

검령은 우습다는 듯 혀를 몇 번 차더니, 이번엔 칭찬의 말을 뱉었다.

 

-그래도 대단하네. 내 긴 생애 동안에도 그들의 검술을 쓰는 인간은 처음 봤어. 갑자기 네 정체가 궁금해지는걸?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오.”

 

-뭐, 말하기 싫다면 됐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래, 15년 전 혈사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빨리 설명해 봐.

 

반말로 하는 명령조였으나, 안톤은 그냥 그러려니 하며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듣자 하니 저 검령은 나이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고대의 존재인 듯했고, 게다가 자신들은 도움을 얻기 위해 온 것 아닌가.

 

정작 안톤에게 거슬리는 점은 따로 있었다.

 

옆에 있는 린디아스를 흘깃 바라본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건너들은 이야기라 나도 자세히는 모르오. 다만, 아까 말했든 검의 일족은 대가 끊겼고, 앞에 있는 린디아스 공녀만이 유일한 생존자라고 하더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톤?”

 

린디아스가 화들짝 놀라며 대화에 껴든다.

 

검령은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었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안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들은 대로요. 검성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니 의심할 필요는 없소.”

 

“그럴 수가. 그럼 나는…… 나는…….”

 

“…….”

 

린디아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기야, 믿던 사람들이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숨겨 왔으니 충격이 어지간히 클 것이다.

 

허탈한 얼굴로 멍해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안톤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자신 또한 그녀를 속이는 일원 중 하나가 된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튼 이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것은 린디아스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래! 일족의 대가 끊어졌다고? 하하하! 이거 참 바깥세상이 재밌게 돌아가네?

 

“그게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빌어먹게도 그렇소이다. 아무튼, 적들에게 제단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당신과 계약을 해야 하오. 듣기로 그런 게 있다고 하던데?”

 

-아! 설마 맹약을 말하는 거야?

 

“호칭이야 아무래도 좋소. 게다가 뜻도 비슷해 보이는군.”

 

-그래. 지금 겨우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검성이라고 했나? 암만 봐도 그놈이 이 모든 일을 꾸민 것 같은데……. 이거 완전히 잘못 알고 있잖아?

 

“잘못 알았다니?”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잘된 일인가? 낄낄. 그래, 너희들의 장단에 어울려 주도록 할게. 자, 이리 와 봐.

 

검령은 자기 혼자서만 아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 일에 자신이 모르는 뒷사정들이 얽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깐! 계약, 아니 그 맹약이란 것이 뭘 말하는지 정확히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왜 여기까지 와서 망설이는 거야? 너희들의 목적은 적들이 이곳을 갖지 못하게 하는 거였잖아?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수상해져서 말이오. 좀 자세히 알아야겠소.”

 

-너는 저 아이와 어떤 관계지?

 

“일단은 그녀의 호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오. 그렇다고 내가 조르디가의 사람인 건 아니오. 나는 그들과는 아예 무관하지.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순전히 그녀를 위해서였소.”

 

-뭘, 그렇게 복잡하게 말해? 결국 저 아이의 편이라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오. 그러니 말해 주시겠소? 만약 검성이 무슨 암흉을 꾸미던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알아야겠소이다.”

 

-간단하게만 말해 줄게. 저 아이는 제물이야.

 

“그게 무슨 소리요?”

 

간단해도 너무 간단하게 말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것치고 너무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검령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낄낄거리며 안톤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제단을 적들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맹약을 맺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모순이 느껴지지 않아? 왜 그런 불필요한 짓을 해? 정말 그것만이 목적이면, 마지막으로 남은 순혈을 직접 해치면 될 텐데 말이야.

 

“……!”

 

솔직히 그런 식으로는 생각지 못했다.

 

다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가우스트는 충분히 대의를 위해서라며 일을 벌일 자였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안톤이 느낀 그의 성품이었고, 그는 실제로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

 

“우린 그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소. 만약 그가 그러고자 했다면 진작 실행에 옮겼겠지.”

 

-그야 내 힘이 탐나서 녀석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거 아니겠어? 내가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줄까? 계약을 한 자가 죽으면, 검이 돼.

 

순식간에 여러 정황들이 맞물리기 시작한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검성은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던 건가?’

 

하기야, 이 제단의 효능이야말로 조르디가의 힘의 원천인데,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있나.

 

게다가 그간 보아 온 가우스트라면 이렇게 체념하듯 포기하는 것보단, 직접 싸워서 어떻게든 탈환해 내려는 것이 그의 성정에 어울렸다.

 

“그럼 혹시 아까 그 또한 잘못 알고 있다던 것도 알려 줄 수 있겠소?”

 

안톤은 끓어오르는 피를 삭이며,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나름 평정심을 유지했다 싶었는데, 검령이 보기엔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웃는 듯한 검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알려 줄게. 뭐 어렵다고. 낄낄. 문제는 검성이라는 놈이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거야. 왜냐면 저 아이로는 내 힘을 다 받아들일 수 없거든. 겨우 십 분의 일쯤이면 한계려나?

 

“한계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오?”

 

-킬킬킬! 뭐 별거 있나? 몸이 터져 죽는 거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열띤 광기.

 

안톤은 온몸의 피부가 쭈뼛 섰다.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맹약을 맺으려 했다고?’

 

린디아스를 해치려고 한 건 가우스트뿐만 아니라 저놈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우린 이만 가 보겠소. 계약은 하지 않을 거요.”

 

안톤은 황급히 린디아스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무언가 알 수 없는 돌풍이 피어나 그를 덮쳐 왔다.

 

-글쎄. 누구 마음대로?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치받은 안톤은 곧장 일어나려 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어떠한 기운이 이를 방해하고 있었다.

 

-아무도 여기서 못 나가.

 

두 눈으로 검령의 형체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안톤은 검령이 있는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역시 인간들은 항상 이유를 궁금해한단 말이야. 말해 줘도 이해하지도, 아니, 할 생각도 없으면서.

 

아무래도 검령에겐 더 이상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제,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어!

 

주변의 공기가 회오리치듯 요동치며, 린디아스의 허리가 마치 경련하듯 뒤로 꺾인다.

 

안톤은 무언가 린디아스의 몸으로 거칠게 파고드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보였다.

 

-이제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완전해지는 거라고! 킬킬킬!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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