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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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68화
068. 일족
안톤은 위스퍼 스톤을 들어 자신의 턱 끝으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시동어를 외웠다.
“산을 덮는 파도.”
푸른빛의 보석이 채색을 뿌리며 서서히 진동한다.
때마침 상대 쪽도 위스퍼 스톤을 만지고 있던 것일까.
기다림의 시간은 짧았다.
-어, 어…… 아, 안톤이에요?
“그렇소.”
-안톤!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카린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이제 조르디 가문령에 진입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로서는 안톤이 죽었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을 상황.
“미안하오. 일이 있었소.”
-……혹시 다친 거예요?
역시 누가 상인 아니랄까 봐.
눈치가 정말 빠르다.
“그렇소이다. 거의 죽다 살아났다 해야겠지. 몸이 말이 아니오. 3주 내리 꼬박 의식을 잃고 있다가, 깨자마자 연락한 것이니 용서해 주시오.”
-용서고 자시고, 그보다 몸은 어떤데요? 괜찮아요?
“잘하면 이제 무인으로서는 끝이라고 하더군.”
본인의 얘길 하는 것치고는 매우 담담한 어조가 아닐 수 없다.
외려 탄식의 음성이 새 나온 것은 위스퍼 스톤 너머에서였다.
-그럴 수가…….
“그래서 말인데…… 혹시 엘릭서를 구할 방도가 없겠소?”
-엘릭서요?
“그 정도 되는 것이 아니면 답이 없을 거라 하더군. 구할 수만 있다면 수중에 있는 돈을 전부 써도 좋소.”
-엘릭서라면…… 그 정도 돈까지는 필요치 않아요. 다만, 문제는 그게 그렇게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건데…….
말을 질질 끄는 모양새를 보니 왠지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방법이 있는가 보군.”
-후! 하나 생각나는 게 있긴 해요. 그 노인네가 순순히 내놓을지는 미지수지만…… 걱정 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 일이니까, 내가 어떻게든 구해다 줄게요. 대신 시간은 조금 걸릴 거예요.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음……. 일이 잘 풀린다면 당신이 받아 봤을 때쯤엔 한 석 달쯤? 그 정도 될 것 같네요.
“고맙소.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미안하오.”
안톤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카린이 멋쩍은 듯 대꾸했다.
-됐어요. 그리고 미안하단 말 좀 그만하고요.
“그럼 다시 연락하겠소.”
-알았어요. 쉬고 있어요. 제가 또 연락할게요.
보석에서 피어나던 푸른색 빛이 멎기 시작한다.
이내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린디아스가 오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예요, 그 여자는?”
“아까 말했지 않소. 그냥 알게 된 사람이라고.”
“어떻게 그냥 알게 된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그런 귀물을 구해다 줘요?”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말투가 꽤나 퉁명스럽게만 들린다.
너무 간략한 설명 때문일까 싶었지만, 딱히 카린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할 게 없었다.
전생의 일들을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해린국에서 만난 상인으로 돈이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오. 직업 특성상 아는 사람들도 많은 듯하고 말이오. 아무튼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연락을 해 보았는데, 어떻게 다행히도 방법이 있는가 보오.”
그 돈의 대다수가 자신의 돈이란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안톤은 이만하면 설명이 됐냐는 눈으로 린디아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알았어요. 이만 쉬세요.”
도망치듯 린디아스가 황급히 자리를 뜬다.
안톤이 뭐라 붙잡을 새도 없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온-누르가 고개를 갸웃하는 안톤을 향해 혀를 찼다.
“쯧쯧. 무정한 녀석. 공녀님이 얼마나 네 녀석을 기다렸는데, 그사이를 못 참고 다른 여자를 만난 것이냐?”
참 오랜만에 만나긴 만났나 보다.
이 익숙한 형식의 몰아가기도 묘하게 반갑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안톤은 여전한 그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린은 그냥 협력 관계인 사람입니다. 게다가 애초에 저와 공녀님이 특별한 사이인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아휴…… 공녀님이 불쌍하구나. 안 그래도 무력감에 몸부림치고 있던 때인데 말이야. 근데 너는 정말로 공녀님께 아무런 감정도 없더냐?”
항상 농담식으로 장난치기만 했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안톤은 아까처럼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
린디아스는 그에게 있어 참 묘한 존재였다.
처음에는 애증의 관계랄까? 하여튼 그랬다.
콜로세움을 탈출할 때 그녀가 없었다면 안톤은 바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 일이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고 여겨졌다.
린디아스 공녀와, 스승인 온-누르 둘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 앞에 있을 때, 안톤은 노예가 아니었으니까.
사람 대 사람.
그것은 안톤이 처음 겪어 보는 정으로 엮인 관계였다.
이는 그를 인간적으로 성장시켰다.
만약 그들을 만나지 않고 그대로 대륙을 떠돌았어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답은 아니다, 였다.
스스로 자유롭다 기만하면서 정작 사람들의 시선은 피해 도망만 다니는 탈주 노예였을 테지.
그리고 요즘 들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삶이다.’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 뿌린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이를 극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하나씩 배워 가며 성장한다.
세상은 거대하며, 그 흐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제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러한 면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피하고, 진심의 말을 입안으로 삼켰으며, 마음의 문고리를 꼭꼭 걸어 잠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삶이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 일의 연속이란 걸.
무작정 그걸 피하기만 해서는 언제까지고 삶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린디아스 공녀를 어떻게 생각하지?’
참아 왔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내던진다.
안톤은 회귀하고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사람으로서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 역시 그에 속해 있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건 결코 스승님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안톤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 행동에 실린 의미를 알아들은 온-누르가 피식 웃었다.
“그렇더냐? 그럼 그런 것이겠지.”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웃음이다.
어찌 됐건 이제 앞선 화제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안톤은 온-누르를 향해 기다려 온 질문을 내던졌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스스로 검의 뜻을 꺾은 공녀가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있었던 겁니까?”
“음. 그건…….”
난감한 질문이었는지, 온-누르는 바로 대답치 못했다.
그때, 또다시 문이 열렸다.
혹여 린디아스 공녀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안톤이었지만, 그곳엔 생면부지의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대답해 주겠네.”
노인은 성큼성큼 걸음을 뻗어 왔는데, 안톤은 그 걸음걸이에서부터 그가 평범한 노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이라니…….’
마치 힘을 잃기 이전의 온-누르, 아니 그보다도 거대해 보이지 않는가.
이로써 짐작할 수 있는 인물은 오로지 딱 하나뿐이었다.
“검성이십니까?”
“그러네.”
백의 노인, 아니 가우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톤의 표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잘됐습니다. 안 그래도 당신에게 묻고 싶었던 게 참 많았으니까.”
“그게 무슨 말버릇이더냐?”
온-누르가 안톤을 꾸짖었지만, 안톤의 눈에 실린 적대감은 잠재워질 기미가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일이 벌어질 땐 대체 뭘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겁니까?”
안톤은 해린에 있으면서도 핫산을 통해 조르디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온-누르가 실종되고, 사태가 최악에 치달을 때가 되어서야 등장한 것이 그였다.
그렇게 뒤늦게 나선 주제에 일 처리 또한 제대로 못 했다.
1년 내내 내전을 벌이다가, 이윽고 지금에 이르러선 거의 패망한 상태에 이르지 않았던가.
연배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한참 아래인 안톤의 꾸짖는 듯한 발언에 짐짓 역성을 낼 만도 했지만 가우스트는 차분했다.
“밖에서 이야기를 무심코 듣고 말았네. 아마 자네가 이토록 화내는 것은 아마도 넬 때문이겠지?”
다 들었다니 안톤도 굳이 속내를 감추지 않기로 했다.
“그렇소. 손녀를 서슴없이 험지로 내보내니, 그게 무슨 조부요? 그 시간 에스닌 공녀는 뭘 하고 있었지?”
격앙된 감정이 물씬 묻어나는 말투였지만, 가우스트의 표정엔 미동이 없었다.
이후 이어진 대답은 안톤을 더욱 열이 뻗치게 만들었다.
“일단 이 말부터 해 줘야겠군. 넬은 조르디가의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네.”
“……그래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몸 전체를 붕대로 휘감고서 침대에 누워 있는 안톤이었으나, 그의 눈빛은 살벌했다.
가우스트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 갔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네. 넬이 사생아라는 소문을 들은 모양인데, 그건 사실이 아닐세.”
안톤은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중의적인 표현이라 여겼다.
허나 이제 사생아도 아니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넬은 내가 밖에서 데려온 아이야. 내가 고집을 부려 그 아이를 입양시켰지. 오히려 다른 자식들보다 아끼면 아꼈지, 덜하진 않을 것이야.”
“그런데 왜…….”
“그런데 왜 그런 위험을 무릅쓰게 만들었냐는 말이렷다?”
가우스트는 일단 끝까지 들어 보라는 듯 안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건 이번 일에는 그 아이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네.”
이렇게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무언가 이유가 있기는 한가 보다.
분노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지만, 안톤은 일단 얘기를 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그만 에둘러 말하고 자세히 말해 주시지요.”
“지금부터 해 줄 이야기는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라네.”
쉽게 말해 아무 데서나 떠벌리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다.
안톤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몸으로 어딜 가서 어디에 이런 얘길 하겠냐는 자조 섞인 몸짓이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가우스트가 천천히 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조르디가에는 아주 신성한 장소가 있다네. 우린 그곳을 검의 제단이라 부르지.”
얘길 들어 보니 검의 제단은 가주의 직위를 얻어야만 출입이 가능한 가문의 비처로, 그곳에서는 밖에서보다 수십 배의 속도로 기가 쌓인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역대 가주들의 강함도 이해가 가는군.’
아무튼 가우스트는 괴단체 블라디미르가 조르디가에 수작을 벌인 이유가 바로 그 제단 때문이라고 말을 붙였다.
가문의 비처 검의 제단, 그리고 블라디미르.
이제 안톤도 둘의 상관관계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아직도 잘 모르겠는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근데 그게 내 질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결국 모두 린디아스 공녀와는 무관한 얘기가 아닌가.
가우스트는 안톤을 다그치듯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상관이 있지. 그것도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그럼 계속 말해도 되겠는가?”
“…….”
안톤이 입을 꾹 다문 상태로 바라보자, 가우스트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일단 잠자코 들어 보게나. 질문에 대한 답은 이후에 모두 해 주겠네.”
“알겠습니다.”
안톤은 일단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고맙네. 일단 검의 제단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 주겠네.”
검의 제단과 연결되는 문은 선택받은 혈족만이 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혈족이란 조르디가의 일족을 말함이 아니었다.
“……?”
안톤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주들만 출입이 가능하다더니, 이거 모순이 있지 않은가.
그 의문점이 거슬려 못내 눈살을 찌푸리자, 가우스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정말 이거 급한 성격이로세. 예로부터 조르디 가문령 산맥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이들이 있었네.”
그들이란, 검령의 일족이란 이름을 가진 혈족이었다.
원래 검의 제단 또한 그들의 소유였고, 그 힘을 탐낸 조르디가의 선조가 그들의 것을 빼앗기 위해 강제적으로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이란 간단했다.
일족의 비밀과 영역을 보장할 터이니 대가 바뀔 때마다 혼사를 맺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조약은 가우스트의 대까지는 잘 지켜져 내려왔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슐츠 대에 이르러서 끝나고 말았지.”
슐츠 조르디는 가문의 규율을 무시하고, 기어코 평범한 여인과 인연을 맺었다.
가우스트가 한사코 반대했지만,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억센 고집은 조르디가의 전통인가?’
아무튼 결국 이 이야기의 결론은, 그렇게 태어난 헤스갈이나 에스닌은 제단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안톤은 문맥상, 그가 뭘 위해 이런 설명을 했는지 알아챘다.
“그렇다면 혹시 공녀가…….”
“그래, 넬은 15년 전 혈사에서 살아남은 일족의 유일한 아이라네. 그 참상 속에서 내가 데리고 와 슐츠의 아이로 입적시켰지. 갓난아기였다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었기에 완전히 친자식처럼 꾸밀 수는 없었네. 그래서 그간 공공연연하게 사생아라 알려져 있었던 게야.”
15년 전 혈사란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었으나, 안톤은 보다 중요한 다른 질문을 날렸다.
“린디아스 공녀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그 아이는 이 사실을 모르네. 그냥 자기가 사생아인 줄로만 알고 있지. 당시 어린 나이기도 했지만, 사건이 벌어지고 부분적인 기억 상실 증세가 있더군.”
“그런데 그런 일을 시켰을 때, 고스란히 따랐단 말입니까?”
“그 아이를 위해 자세한 얘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네. 다만 그 아이는 그럼에도 가문을 위해 하겠다고 나섰지.”
분명 린디아스의 성정상 위기에 빠진 그들을 모른 척하지 못했을 것이란 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우스트라고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공녀를 위해서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웃기고 있군.’
겉으로는 대의를 위한 영웅처럼 보여도, 실상은 자신의 목적만을 관철하는 이기주의자.
안톤의 시각에서 바라본 가우스트는 그랬다.
“그럼 이제 검의 제단을 탈환하려는 그 계획에 넬이 꼭 필요했다는 건 설명이 됐겠지?”
길었던 이야기가 종지부를 향하고 있었으나, 안톤은 끝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날렸다.
“검의 제단을 탈환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건물째로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가우스트는 지친 내색 없이 최선을 다해 설명을 이어 갔다.
“제단은 그 장소로 신비한 곳이 아니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안에 보관되어 있는 검령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그곳이 특별한 것이지. 나는 넬로 하여금 그 검령과 계약을 맺게 할 생각이었네.”
가우스트는 계약이 성사되면 제단은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 말은 즉 블라디미르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아예 없어지는 뜻이다.
“그럼 이 모든 상황 역시 종료될 것이라 여긴 게지.”
“그렇다면 본인이 직접 가도 되는 거 아닙니까.”
계속해서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하지만, 안톤은 그 모든 것들이 변명처럼만 느껴져 자꾸만 퉁명스럽게 말이 나왔다.
“나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계약은 일족의 순혈들만 가능한 일이라네. 그들의 피가 반만 흐르는 나는 검령의 주위에서 작은 이득이나 취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리고 살짝 오해가 있는 듯한데, 검령과의 계약은 전혀 위험하지 않네. 오히려 그 아이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그래서 가우스트는 그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시키기 위해, 적들의 시선을 끌기로 했다.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건 그래서였나.’
그의 말대로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었다면, 린디아스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고, 린디아스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안톤이 때마침 시기 좋게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면 정말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은 미리 검의 제단에 병력을 대기시켜 둔 이후더군. 내 실책일세.”
스스로를 질책하는 듯한 말이었으나, 안톤은 작은 동정심조차 일지 않았다.
결국 모두 다 그의 욕심이었으니까.
이제 안톤은 최후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자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듣기로 몸을 회복할 방법이 있다지?”
“저도 이용해 먹을 생각입니까? 린디아스 공녀처럼?”
비꼬는 말에도 가우스트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이거 고약한 심보만큼이나 뻔뻔한 남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마는…… 이번 일에는 자네에게도 책임이 어느 정도 있네.”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립니까?”
만약 허튼소리를 해 댄다면, 안톤이라 해도 가만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이 가문 내에서 활개치고 있을 때, 나는 제단을 지켜야 했기에 미리 대처할 수가 없었네. 그래서 피치 못하게 암검에게 대신 조사를 해 달라 부탁했지. 하지만 그는 그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네. 그 이유는 아마 자네가 더 잘 알 것이야.”
허나 안톤은 그의 말이 끝난 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였나, 역사가 뒤틀린 것은…….’
예전에 한 번, 왜 역사가 이토록 변했는지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기 때문이란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설마 이게 이유였을 줄이야…….’
온-누르에게 없었던 제자가 생겼다.
그래서 가우스트의 부탁을 받고도 모든 신경을 그곳에 쏟아 부을 수 없었다.
그 탓에 전생과 달리 초장에 대처를 잘 하지 못했고, 사태가 이렇게까지 치달았다.
‘스승님이 늘 밤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던데, 조사를 하고 계셨던 거군.’
이 조차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때는 매일 수련하기 바쁜 일상이었으니까.
그래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만약 내 추측이 옳다면…… 그의 말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야.’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멀쩡했던 슐츠 조르디가 죽고, 소우든 최고 명가라던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다.
물론 가우스트 역시 이 모든 사실을 알기에 하는 말은 아니었을 테다.
‘그저 조금이라도 책임을 전가해 마음의 짐을 느끼게 할 목적일 뿐이었겠지.’
하지만 그 의도는 실패다.
모든 진상을 알게 된 지금도 전혀 책임감이나 마음의 짐 따윈 느껴지지도 않으니까.
“거절한다면 더 이상 강요치는 않겠네. 물론 협력한다면 일이 훨씬 수월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 또한.”
다만, 안톤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온-누르에게 갚아야 하는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게 전부라네. 시간은 넉넉하니 부디 잘 생각해고 답해 주게나. 그럼 이제 나는 가 볼 터이니 그간 몸조리 잘하고 있으시게.”